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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14

예술가가 건네는 두 번째 작별

13년간 그린 작품을 불태운 ‘화장 프로젝트’로 대중에게 작별을 고한 존 발데사리가 다시 한번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1 Font, Two Black and White Photographs with Vinyl Paint, 183.5×121.3cm, 1987
2 The Space between Two Cowboys, Varnished Inkjet Prints on Canvas with Acrylic Paint, 54 1/8”×57 5/8”×1 1/2”, 2019

미술은 답습을 용인하지 않는다. 아무리 새로운 운동일지라도, 얼마 안 가 다음 세대의 도전을 받으며 기성세대로 전락하는 게 미술 생태계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전통 회화에 대한 반발로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가 차례로 탄생했고 20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이미지 그 자체에 저항하는 개념미술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라는 뒤샹의 선언을 필두로 미술은 이미지가 아닌 개념, 아이디어, 제작 과정 등을 도구 삼았다. 개념을 중시한 존 발데사리(John Baldessari)도 기존의 미술에서 벗어나고자 한 작가 중 하나였다. 존 발데사리에게 가장 많이 따라붙는 수식어는 ‘미국의 개념미술가’다. 그러나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로 조용히 반박했다. “저에게 개념미술가라는 꼬리표가 붙은 걸 압니다. 잘못됐다고 생각하죠. 캘리포니아 예술가라는 수식도 있는데 이 또한 알맞은 표현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단지 예술가이고 싶습니다.” 그는 딱히 개념미술을 해야겠다고 다짐해본 적이 없다. 단지 회화와 조각 위주의 전통 미술에 고루함을 느껴 예술로 인정받지 않던 텍스트, 잡지나 신문 광고 이미지를 활용했을 뿐이다. 그를 대표하는 매체인 사진을 쓰기 시작한 것도 전통을 탈피하려는 시도에서 비롯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예술의 무한한 잠재력을 믿은 그는 미술 교육 방식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때 그의 눈에 사진이 들어왔다. 지금이야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지만 당시만 해도 사진은 회화나 조각을 ‘기록’하는 용도였다.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어린 그의 눈에 사진과 예술의 역사를 구분 짓는 모습은 이해가 가지 않았을 터. 회화와 사진을 달리 취급하는 걸 의아하게 여긴 그는 두 장르를 같은 선상에 놓고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960년대까지 사진과 텍스트를 이용한 작업을 이어가며 이름을 알렸다. 만약 존 발데사리가 여기서 멈추었다면 개념미술을 하는 여러 작가 중 한 명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970년에 그는 ‘화장 프로젝트(Cremation Project)’를 발표하며 자신을 단지 개념미술가로 규정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그해 여름 존 발데사리는 그간의 작업을 돌아보며 문득 진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얼마 뒤 1953년 5월부터 1966년 3월까지 그린 그림을 모두 모아 불태웠고, 이때 나온 잿더미로 쿠키를 구웠다. 그리고 전통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공표라도 하듯 뉴욕 현대미술관에 쿠키를 담은 유리병을 전시했다. ‘화장 프로젝트’는 고루한 미술의 죽음과 새로운 미술의 탄생을 알리기 위해 행한 일종의 의식이었다.





3 Tetrad Series: What was Seen, Inkjet on Canvas; Acrylic and Enamel Paint on Canvas, 238.8×238.8cm (In Four Parts), 1999

한자리에 안주해본 적이 없기에 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풍을 꾸준히 바꾸었다. 오로지 텍스트만 쓰기도 하고, 직접 찍은 사진과 찾은 이미지(found image)를 조합해 원본과 정통성에 도전하기도 했다. 1985년에는 가장 널리 알려진 ‘도트 초상화(Dot Portrait)’가 ‘우연히’ 탄생한다. 이 시리즈는 존 발데사리의 유쾌한 성격에서 기인했다. 어느 날, 그는 평소 싫어하던 유명인사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동그란 모양의 스티커를 장난 삼아 붙였다. 얼굴을 가리자 사진 속 인물은 특정인에서 익명의 누군가가 되었고, 이미지는 즉각 힘을 잃었다. 유명을 무명으로 만드는 이 단순한 장난이 마음에 든 그는 스티커 컬러로 변주를 주며 시리즈를 발전시켜나갔다. 그는 ‘도트 초상화’와 관련해 흥미로운 말을 남기기도 했다. 자신은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였음에도 후대에 ‘얼굴에 점 찍은 사람’으로 남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샌디에이고 주립 대학교에서 교육학을 공부한 존 발데사리는 전공을 살려 30년간 교단에 서기도 했다. 캘아츠, UCSD, UCLA를 거치며 데이비드 샐(David Salle), 잭 골드스타인(Jack Goldstein), 켄 페인골드(Ken Feingold) 등 후학을 여럿 양성했다. 특히 캘아츠에서 진행한 ‘포스트-스튜디오 미술(Post-Studio Art)’은 참신한 방식으로 아직도 회자되는 수업이다. 미술사학자 김정아의 논문 <존 발데사리의 미디어 이미지 차용 전략 연구: 포스트-스튜디오 미술 시기 픽처스 세대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에 따르면 포스트-스튜디오 미술이란 용어는 미술 작품의 유일성과 독창성을 보증하던 전통적 스튜디오 중심의 작업에서 벗어난 현대미술의 한 경향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스튜디오에서 나가 회화가 아닌 대중매체와 인쇄물 이미지로 작업해보길 권했다. 미술로 인정받지 못한 존재도 작품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려는 의도에서였다. 제자 제임스 웰링(James Welling)은 “존 발데사리는 학생인 우리에게 꼭 필요한 제안만 했다. 많은 말은 하지 않았다. 하루는 그와 함께 캘아츠 앞 공터에 나가 카메라로 사람들의 머리를 찍었다. 인간의 뇌를 가장 밀접히 촬영해본 일종의 개념적 농담이었다”라며, 그의 수업이 당시 젊은 예술가에게 환상적인 경험을 선사했다고 회상했다. 존 발데사리는 살면서 두 가지 약속을 했다고 한다. ‘지루한 예술은 하지 않겠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예술을 가르치겠다’가 그것이다. 작고하기 직전까지 크고 작은 회고전과 개인전을 열며 신작을 공개했고, 다음 세대 예술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킨 존 발데사리. 그를 전방위로 뛰게 한 예술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언제나 예술을 예술가들의 대화로 바라봤습니다.
저는 단지 다른 예술가와 대화를 시도했을 뿐이고, 제 부름에 다른 이들이 응답한 것이죠.
사실 제 작품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걸 믿진 않아요.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죠.
그냥 제가 행복해서 하는 거예요.
예술은 저 스스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일이니까요.”

 

에디터 이효정(hyojeong@noblesse.com)
이미지 제공 존 발데사리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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