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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18

날아라 이날치

소리꾼 넷, 베이스 둘, 드럼 하나. 이날치가 축조한 신도시에서 날아다니는 힙한 소리들.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_ 권송희가 입은 프린트 톱 Clan by Reelee, 허리 밴드로 연출한 코튼 리넨 톱 Artclub by Net-a-Porter.장영규가 입은 블루 니트 베스트, 포켓 디테일의 팬츠 모두 Cos, 셔츠 스타일리스트 소장품.이철희가 입은 핑크 셔츠, 팬츠 모두 Cos, 블랙 로퍼 Dr. Martens. 이나래가 입은 레이스 디테일의 실크 드레스 Biscuitshop, 화이트 롱부츠 Prada, 안이호가 입은 화이트 톱, 체크무늬 재킷, 팬츠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정중엽이 입은 화이트 톱, 데님 재킷, 팬츠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신유진이 입은 플라워 디테일 포인트의 시스루 드레스 Sinoon.

처음 을지로 바 ‘신도시’에 발을 들인 순간을 기억한다. 황량하다 못해 공포스러울 정도로 오래된 건물, 낡은 붉은 벽돌 외벽에 걸린 신도시란 간판을 확인하고 높이와 너비가 일정치 않은 계단을 비틀거리듯 올라가며 만난 기기묘묘한 풍경. 을지로 골목에 지금처럼 젊은이(?)들이 드나들지 않던 무렵, 아직 정식 오픈하기 전인 그곳에서 ‘신도시’는 내가 그전까지 알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르게 읽혔다. 영화 <벨벳 골드마인>이나 <헤드윅>처럼 환상 속 세계에 뛰어든 듯 이미지와 소리, 물질이 하나의 덩어리 같은 세계로 내 앞에 현현했을 때 그것은 분명 ‘신(新)’도시였다. 뒤섞인 시대와 풍경이 주는 생경함은 나중에 젊은 세대 사이에 ‘힙’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몇 달 전 유튜브에서 밴드 이날치의 온스테이지 공연을 처음 보았을 때, 신도시의 문턱을 넘던 그날의 기분이 떠올랐다. 이날치는 조선 후기 8명창 중 하나인 판소리 명창의 예명이다. 날쌔게 줄을 탄다고 해서 ‘날치’라는 예명이 붙었고, 음량이 매우 커서 10리 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네 명의 소리꾼과 드럼, 베이스가 합을 이룬 2020년의 이날치는 10리를 훌쩍 넘어 그 영향이 미치는 거리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파격으로 지금의 대중음악 신을 흔들고 있다.



덧셈 아닌 곱셈, 아니 그 이상
이날치는 장영규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뮤지션 교집합의 합집합이다. 장영규는 밴드 어어부로 데뷔해 <타짜>, <곡성>, <부산행> 등 다수의 영화음악 감독으로 활약했고, 국악 그룹 ‘비빙’ 감독을 거쳐 소리꾼과 함께 밴드 씽씽을 만들어 국악을 바탕으로 한 밴드 음악의 시장성을 증명했다. 그는 재작년 광주 국립아시아 문화의전당 애니메이션 음악극 <드라곤 킹>을 준비하면서, 작업을 함께할 인물로 소리꾼 안이호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판소리 5마당 중 하나인 ‘수궁가’에 누구보다 애착이 깊은 소리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소리꾼 권송희, 신유진, 이나래가 다양한 공통분모의 형태로 추가되었다. 어어부와 씽씽을 함께한 드러머 이철희, 장기하와 얼굴들의 베이스였던 정중엽의 합류 역시 물 흐르듯 순순했다. 신진 밴드라지만 이들의 음악 경력을 다 합치면 150년은 족히 넘을 것이다. 안이호는 1995년에 판소리를 시작해 안은미 컴퍼니와 함께 <심포카 바리>에 참여하며 엔터테이너로서 지평을 넓혔고, <공무도하>, <금시조> 등을 공연했다. 권송희는 국악 뮤지컬 집단 타루의 배우이자 자유국악단 타니모션의 보컬로 활동했고 작창, 작사, 퍼포먼스가 가능한 싱어송라이터다. 이나래는 소리꾼 이자람이 극찬한 엔터테이너로 창작극 <옹녀>로 많은 주목을 받았고, 공옥진 여사의 인생을 다룬 창무극 <주름이 많은 소녀>에서 주인공을 맡아 뛰어난 연기력과 춤 실력을 선보였다. 신유진은 국악 그룹 ‘이상’을 통해 소리로 다양한 장르를 노래해온 인물이다. 한복을 입고 세계 곳곳을 돌며 우리 소리를 알리기도 했다. 각자가 지닌 세계가 함께 모여 확장되는 힘은 협업, 크로스오버라는 말로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리듬으로 직조한 소리의 판
이날치 1집은 ‘수궁가’를 해체, 분리, 다시 조립하는 형태로 완성됐다. 장영규가 평소 즐기는 창작 방식이다. “리듬, 구조가 될 프레이즈를 먼저 만들고, 그것과 어떤 소리가 어울릴지 찾아가는 여정이었습니다.” 가보지 않은 길에 이정표가 있을 리 없지만, 다만 분명한 목적성이 있었다면 ‘대중음악 신에 진입하는 것’, 그리고 뻔한 길에 들어서지 않는 것.
“소리꾼들이 같이 부르며 만들어가는 작업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잘 어우러지는 지점이 있어요. 다수가 단번에 ‘좋다’고 느끼는 건 대개 그런 익숙한 것이죠. 그런 부분은 과감히 버리고 익숙지 않은 것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상이한 것들이 만났을 때 뭔가 새롭게 작용하는 대목을 찾으려고요.”
집단지성이 동력을 내고, 벗어난 곳에서 길을 찾는 장영규의 음악은 건축물 같다. 다양한 점이 만나 층을 이루고 선과 면, 덩어리가 되는 식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에서는 늘 공간감 같은 게 느껴진다. 어떤 사람과 함께하는가 역시 장영규의 작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판소리는 기본적으로 고수의 반주에 따라 혼자 부르는 장르다. 원래 알던 ‘수궁가’가 이날치의 음악 세계에서 완전히 새롭게 읽히는 건 이들이 대목을 주고받으며 합창을 하는 까닭. 안이호, 이나래, 권송희, 신유진 소리꾼 네 명은 각기 다른 음색을 지닌 데다 판소리 유파 역시 조금씩 다르다. 함께 부를 때 화합하기 쉽지 않고, 반대로 말하면 기대하지 않은 지점에서 신선한 파격이 탄생한다. 판소리는 화성이 없는 음악이기에 음과 음으로 화합하는 대신 리듬과 소리로 조합했고, 두 대의 베이스가 판소리 고수의 북처럼 리듬 악기로서 소리를 지탱한다. 덩어리진 소리의 형태는 탁구공처럼 바닥 위를 가볍게 튕기기도 하고(범 내려온다), 깊은 바닷속에 둥둥 뜬 것 같기도 하며(약성가), 구름처럼 하늘에 떠다니기도 한다(말을 허라니 허오리다). 줄타기의 달인 이날치가 줄 위에서는 과연 어떠한 모습일까?





장영규가 입은 화이트 셔츠, 플리츠 디테일의 오렌지 톱, 베이지 재킷과 팬츠 모두 Cos. 이나래가 입은 블랙 니트 톱, 그레이 체크 원피스, 화이트 롱부츠 모두 Prada. 권송희가 입은 패턴 시스루 톱 Pushbutton by Net-a-Porter, 점프슈트 Cos, 슈즈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조선의 클럽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날치는 분명 하나의 현상이다. 앨범 첫 곡 ‘범 내려온다’를 부른 온스테이지 영상 조회 수는 200만 회를 넘었고, ‘1일1범’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견고한 마니아층이 생겨났다. 이날치의 음악으로 자신만의 영상 콘텐츠를 만드는 ‘밈’도 유행 중이다. 이날치로 시작한 검색 알고리즘으로 국악에 빠진 이도 심심찮게 보인다. 재미있는 점은, 이 중 대다수가 젊은 밀레니얼 세대라는 것.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움직였나? 각종 언론은 요즘 이날치를 분석, 규정하려는 시도에 혈안이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날치의 인기를 국악의 대중화로 연결하려는 시도도 눈에 띈다. 한데, 미안하지만 이날치의 존재 이유는 신토불이와 거리가 멀다. 우리 소리를 재료로 한 팝 밴드이자 춤출 수 있는 밴드 음악을 하고 싶었을 뿐. 하지만 국악이 ‘어차피 팔리지 않는 음악’이라고 단념해온 소리꾼 넷은 이러한 현상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처음 네이버 온스테이지 영상이 올라갔을 때, ‘조선의 클럽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댓글이 달렸어요. 우와, 우리 음악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고? 특히 기분 좋은 건 노동요로 듣는다는 반응이에요. ‘이날치 들으면서 설거지했더니 어느새 설거지가 끝나 있네요’ 같은 댓글이요. 사실 판소리가 일상에서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성질의 음악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런 반응을 마주하면 판소리가 ‘일상 공간에서 흘러가게 내버려두어도 즐겁게 해주는 음악이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더라고요. 제가 하는 행위가 이들의 일상과 같이 흘러가는구나. 이제껏 공연하면서 사람들과 일상을 나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거든요.” 인터뷰 중 시종일관 장난스럽던 안이호가 일순 진지한 눈빛으로 이야기하는 동안 나란히 앉은 소리꾼들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국악의 그루브와 팝 그루브는 결이나 색이 완전히 다르지만 방향성은 결국 동일하다는 것을, 이날치를 보면서 실감한다. ‘놀자’는 마음으로 서서히 풀어낸 고삐는 이날치의 음악을 더 자유롭게 한다. ‘별주부가 울며 여짜오되’에서 진짜 우는 것처럼 청승맞게 연기하는 것이나, ‘호랑이 뒷다리’에서 방정맞게 ‘가운데 뒷다리’를 코러스로 넣은 것도 이들끼리 장난스럽게 막 던지다 나온 것이다. 공연을 할수록 빗장 풀린 이들의 춤을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다.





안이호가 입은 아트 컴즈 퍼스트(Art Comes First)와의 컬래버레이션 라인 피케 티셔츠, 스트라이프 니트 모두 Fred Perry, 블랙 카고 팬츠 Cos. 정중엽이 입은 옐로 터틀넥, 그린 레인코트 모두 Prada. 신유진이 입은 프린트 디테일의 재킷, 러플 톱 모두 Sinoon, 카키 컬러 실크 스커트 Biscuitshop. 이철희가 입은 스트라이프 니트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날치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안 되는 건 없지요.” 화보와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이날치 측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연주 영상을 찍는데 공연 대열은 지겨우니 객석 자리에 멤버들을 세울 수 없느냐고 물었을 때, 공연장 매니저는 ‘진심이세요?’라는 눈빛으로 에디터를 바라봤다. 음질이 현저히 떨어질 테니 멤버들이 원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한데 이날치 측에서는 오히려 바닥에서의 공연을 고수했다. 신난 에디터는 각 멤버가 현대미술 작품처럼 일정 간격으로 툭툭 서 있으면 좋겠다고 주문했고, 장영규는 그 말을 귀담아듣고 멤버들에게 전달했다. 가장 불편한 신발을 신은 소리꾼 이나래는 “익숙한 무대가 아닌 작업이라 환기가 되었다”며 화보 후기를 전했다. 촬영이 끝나고 며칠 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을지로 신도시에서 이날치를 한 번 더 만났다. 그날은 신도시의 5주년 기념 공연 중 두 번째 공연을 이날치가 장식할 참이었다.
5년 전 신도시에서 느낀 이상하고 신비한 기운과 공기, 냄새가 다시 한번 나를 자극했다. 이날치 역시 오랜만의 공연에 꽤나 흥분했다는 걸, 가장 멀찍이 선 관객인 내게도 전해졌다. 영상으로 수십 번은 돌려본 그들의 몸짓이 어느 때보다 크다는 걸 실감했으니까. 마스크로 가린 얼굴이지만 둠칫둠칫 저마다 그루브를 즐기며 ‘수궁가’ 가사를 따라 부르는 관객들의 기이한 풍경에 나는 또 한번 취하고 말았다.
전통을 지킨다는 건 뭘까.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 후대가 기억할 지금의 전통은 과연 무엇일까. 판소리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처럼 누군가는 깨고,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으로 어떤 전통을 잇는다. 그 파도 위에 21세기의 이날치가 있다. 이들을 어떤 형태로 규정하려는 해석에 과감히 반대하고 싶다. 그저 이날치가 세워 올린 이상한 신도시에 발을 들일 수 있음에, 그들과 함께 춤출 수 있는 동시대를 산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마침 내 손에는 미지근하고 김빠진 기원 전 4세기의 맥주 대신, 지금 마시기 딱 좋을 정도로 가볍고 청량한 21세기의 라거 맥주가 들려 있었다.

 

에디터 전희란(ran@noblesse.com)
사진 김참
헤어 & 메이크업 김지혜, 장해인
스타일링 이은진
어시스턴트 최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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