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지기 정민자 고문은 멈추지 않는다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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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30

아름지기 정민자 고문은 멈추지 않는다

고 서세옥 작가의 아내이자 서도호 작가, 서을호 건축가의 어머니인 아름지기 정민자 고문을 만났다.

기증, 그 나비효과
2020년 11월, 서세옥 작가의 타계 소식은 꽤 갑작스럽게 전해졌다. 장례를 마치고도 한참이 지난 뒤 알려진 탓에 미리 전해 듣지 못한 미술계 사람들에겐 더욱 충격적이었다. 문화적 의식을 지닌 극소수 사람만이 미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절, 사회운동과 같은 신념으로 예술에 임한 서세옥 작가는 미술이 새 시대를 이끌어야 한다는 의지를 사회 전반에 확산한 인물이다. 화선지에 먹의 아름다운 예술성을 여과 없이 표출한 그의 작품은 인간과 동양철학에 대한 침잠의 결과였다. 이는 사람들에게 때론 번뇌를, 때론 감동을 선사했기에 그의 빈자리는 곳곳에서 더 크게 느껴졌다.
보다 본격적인 이슈는 그다음이었다. 2021년 5월 정민자 고문과 서도호 작가, 서을호 건축가 등 작가의 유족이 고인의 뜻에 따라 평생 모은 미술 컬렉션과 고인의 작품을 성북구립미술관을 비롯해 대구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무상으로 기증한 것이다. 그런데 작품 수가 사뭇 놀랍다. 대구미술관 90점 그리고 성북구립미술관에 기증한 작품이 3290여 점에 이르기 때문이다. 3290여 점에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장생’, ‘행인’을 비롯해 춤추는 군상을 은유한 ‘춤추는 사람들’까지 주요 작품 450점과 드로잉·전각 등 2300여 점 그리고 인사동 화랑 등에서 당시 서울대 미대 교수의 박봉을 털어 모은 컬렉션 990여 점이 포함되어 있다. 놀라울 정도로 많은 양이지만 정민자 고문은 서세옥 작가의 뜻대로 행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선생님은 생전에도 자신의 작품과 당신이 모은 컬렉션을 우리만 보면 안 된다고, 여러 사람이 함께 봐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기증을 결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고인의 뜻이니까요. 물론 주변 사람들은 ‘아깝지 않느냐’고, ‘그래도 집에 작품 몇 점은 보관하고 있지 않느냐’고 하는데, 솔직히 남겨둔 건 없어요. 중요한 작품과 컬렉션을 개인이 관리할 수는 없잖아요. 모두 공공기관에 보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서세옥 작가는 2014년에도 자신의 시대별 대표작 등 주요 작품 100여 점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개관에 맞춰 기증했다. 1부에서 3부까지 이어진 전시를 기념해 에디터가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다. 당시에도 서세옥 작가는 정민자 고문의 의견과 같은 맥락의 답변을 내놓았다. “작가는 작품의 완성을 알리는 의미로 사인을 합니다. 나는 사인을 하는 순간부터 그 작품은 작가의 것이 아니고 사회의 것이라고 생각해왔어요. 사회에 돌려보내는 거죠.”
여러 미술관 중 성북구립미술관에 특별히 3000점 이상을 기증한 건 60년 이상 거주한 성북동과의 각별한 인연 때문이다. 정 고문과 서 작가는 1970년대 한옥을 짓기 전부터 성북동에 거주해왔다. 그러다 아이들이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될 무렵 한옥을 완성하고 약 10년 지나 양옥 작업실을 지은 뒤 지금까지 거주 중이다. “선생님이 소나무가 있는 집을 워낙 좋아했어요. 그러다 보니 낙락장송이 있는 집을 찾아 한옥을 짓게 되었고, 성북동에 오래 머무른 거죠. 생전에도 선생님은 늘 주위 친구들이나 제자들에게 성북동에 터를 잡으라고 권했어요. 그래서 이 주변에 몇몇이 모여 살기도 했죠. 그중 벌써 세 분이 돌아가셨네요.” 서세옥 작가는 성북동에 살며 1978년 성북의 미술인들이 작품을 판매한 기금을 지역 장학금으로 조성한 모임 ‘성북장학회’를 만들었고, 2009년에는 자치구 최초의 등록미술관인 성북구립미술관 건립을 추진해 명예관장을 맡으며 성북구와 오랜 인연을 맺어왔다.
지난 5월 21일에 열린 서세옥 컬렉션 기증식에서 성북구는 앞으로 서세옥 작가의 작품과 컬렉션을 순차적으로 선보이겠다고 발표했고, 작가 타계 1주기를 맞아 첫 추모전 <화가의 사람, 사람들>이 지난 10월부터 12월 초까지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열렸다. “미술관에서 전시를 한다고 했을 때, 한정된 공간에서 어떻게 그 많은 작품을 전시할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어요. 그래도 미술관에서 꼭 전시회를 해야겠다고 해서 진행했는데, 둘째 아들과 가서 보고 깜짝 놀랐어요. 선생님을 중심으로 성북 지역의 주요 근현대 작가의 작품을 함께 전시했는데, 작품이 미술관 공간과 너무 잘 어울리더라고요.”
서세옥 컬렉션에 포함된 추사 김정희의 서간문을 비롯해 영운 김용진, 근원 김용준, 소전 손재형 등 한국 문인화의 전통을 잇는 작품도 함께 선보였다. 특히 최초로 공개한 김용진의 ‘매화’, 산수가 그려진 변관식의 선면도(扇面圖) 등은 서세옥 작가가 작가들에게 직접 받은 작품으로 당시 작가 교류 및 영향 관계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여러 작품 중 정민자 고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작품도 함께 걸렸다.
“61년 전쯤 선생님이 내게 선물한 작은 그림이 하나 있어요. 그 작품을 예전에 정리하면서 액자를 빼서 보관했는데, 이번 기증 작품에 함께 들어갔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미술관에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걸 기억하셨는지, 이번 전시에 그 작품을 걸었더군요. 전시장에서 작품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어요. 느낌이 새롭더라고요.”
많은 기증 작품을 선보이려면 머지않은 시기에 두 번째 전시가 열리겠지만, 사실 작가의 인생 전반을 이해하고 작업의 방향과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선 규모가 작으나마 작가 미술관 즉 ‘서세옥 미술관’을 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서도호 작가도 몇 달 전 인터뷰에서 “지역의 작은 미술관은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작품을 탄생시켰는지 보여주는 전시를 할 수 있다. 앞으로 작은 미술관이 지역 곳곳에 세워졌으면 한다”고 밝히지 않았나. 곳곳에서 서세옥 미술관 건립 이야기가 나오지만, 정민자 고문은 아직 조심스럽다. “도호가 저희 집 바로 앞에 스튜디오로 쓰던 공간이 있어요. 그 공간이 선생님이 쓰던 작업실과 가까워 저희는 거기에 미술관을 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힘을 합쳐야 하는 만큼 시간이 좀 걸리네요. 작은 공간이지만 서세옥 미술관이 생겨 누구라도 편하게 들러 작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아름지기의 ‘안국동한옥’.

한옥, 기분 좋은 충돌
정민자 아름지기 고문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건 바로 ‘한옥’이란 단어다. 특히 1970년대에 서세옥 작가와 함께 지은 성북동 한옥 ‘무송재(소나무를 어루만지는 집)’와 2003년 완공한 아름지기의 안국동한옥은 그녀의 한옥 사랑을 대변하는 공간. 특히 최근 전시장으로도 활용 중인 ‘안국동한옥’은 방문객들에게 ‘생활형 한옥의 모범 답안’이라 불린다.
우리 전통문화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일깨워 현시대의 생활 문화에 올바르게 적용하고, 이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활동하는 비영리 문화단체 아름지기는 2001년 설립한 뒤 지금까지 궁궐과 자연문화유산 안내 매체 디자인 개선 사업, 고택 복원 컨설팅, 한국 문화유산 글로벌 브랜딩 등을 통해 품격 있는 한국 문화유산의 계승과 확산에 힘쓰고 있다. 정민자 고문은 아름지기가 현재 통의동 사옥으로 이전하기 전 사무국으로 사용하던 안국동한옥의 공사 전반을 도맡아 진행했다. 건축의 세세한 과정을 담은 <아름지기의 한옥 짓는 이야기>는 한옥 건축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안국동한옥은 제가 거의 매일 새벽 6시부터 들여다보면서 완성한 집이에요. 아름지기 사옥이었기에 ‘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 집을 지을 때보다 더 신경 쓴 것 같아요. 지금도 워낙 관리를 잘해 새집처럼 보이지만, 한옥에 들어간 모든 나무가 고재예요. 매우 고풍스럽죠. 이런 한옥을 보다가 신재로 지은 한옥을 보면 ‘비교 불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거예요.”
안국동한옥은 거실에 통유리를 달고 화장실, 부엌 등 그동안 사람들이 불편하다고 느끼던 한옥 공간을 현대식으로 개조한 것이 포인트다. 당시 한옥 열풍이 막 시작되던 때라 방송국에서도 취재를 나왔는데, 방송 인터뷰에서 정 고문은 “30년간 한옥에 살며 전문가가 아닌 주부로서 한옥을 쓸 때 동선·편안함을 고려했다”고 밝히며 한동안 일반 방문객을 상대로 한옥 짓기 노하우를 전수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이런 한옥에 살고 싶다”고 감탄하는 안국동한옥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어디일까. “모든 부분이 중요하지만, 요즘 이곳을 방문하는 분이 있다면 도배를 어떻게 했는지 꼭 살펴보면 좋겠어요. 쉬울 것 같지만 한지 도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값도 비싸죠. 이렇게 깨끗하게 도배한 한옥, 정말 몇 안 될 거예요.”
‘전통미와 실용성이 조화를 이룬 우리 시대의 한옥 짓기’를 대표하는 안국동한옥과 달리, 정 고문의 자택인 성북동한옥 무송재는 창덕궁의 연경당 사랑채를 그대로 실측해 본뜬 한옥이다. 대구 출신인 서세옥 작가는 광복 후 상경해 1950년대부터 성북구에 거주했는데, 1970년대 초 정민자 고문과 함께 약 5년에 걸쳐 성북동 언덕에 25평 한옥을 짓고 ‘무송재’라는 이름을 붙였다. “낙락장송이 있는 집을 찾아다니다 성북동 한옥터를 발견하고 무송재를 지었습니다. 거기도 모두 고재예요. 사실 그전에도 저는 늘 한옥에 살았는데, 이 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죠.”
정 고문이 성북동에 연경당 사랑채를 그대로 옮겨온 이유는 연경당이 창덕궁에서 제일 아름다운 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소 알고 지내던 목수에게 이를 설명하자 배희한(1907~1997년) 목수를 추천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전승자로 지정된 기능보유자 배희한 목수는 1921년 총독부 철도국 대령목수로 일하고 열여덟 살 때 대조전 해체 현장에서 전통 목수 수업을 받고 1970년대 한창 활동하던 실력자. 정 고문은 배 목수와 함께 5년에 걸쳐 집을 지었다. “당시 배 목수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어요. 우리 남편이 선생님이라고 부를 정도였어요. 집을 지을 때 배 목수가 창덕궁 연경당에 가서 하나하나 다 실측해 무송재를 지었어요. 무송재는 쉽게 말해 ‘조각’이 없는 집입니다. 기본을 살려 깨끗하게 지었죠.”
무송재 곳곳에 가족의 추억이 배어 있지만, 유난히 특별하게 느껴지는 공간이 있다. “사랑채 손님이 옷을 갈아입는 곁방이 하나 있어요. 그 곁방 사이에 방 하나가 있는데, 그게 두실(斗室, 썩 작은 방)이에요. 정말 조그만 방인데, 선생님이 늘 거기서 엎드려 글을 쓰는 거예요. 똑바로 누울 수도 없을 만큼 좁아 대각선으로 엎드려서 말이죠. 왜 여기서 이러고 계시냐고 물으면 늘 이렇게 대답했어요. 두실에서는 정리가 잘된다고. 머릿속이 잘 정리된다고요. 그래서 지금도 두실을 보면 그 모습이 생각나요.”
전통 정원과 한옥 두 채가 나란히 자리한 무송재에는 정 고문이 추억하는 서도호·서을호 형제의 모습도 담겨 있다. 이곳에서 10대를 보낸 두 형제는 한 인터뷰에서 “알림 시계가 필요 없이 창호 문 사이로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에 깨곤 했다” 고 회상했다. 한창 성장하는 자녀들과 함께한 한옥의 삶. 엄마인 정 고문에게 어떤 추억으로 남아 있을까.
“한옥에선 아침 6시만 되면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깰 수밖에 없어요. 안과 밖이 종이문 하나를 두고 있기 때문에 집 밖의 소리가 다 들릴 수밖에요. 어릴 때 둘째는 늘 일찍 일어났기 때문에 아침밥 짓는 담당이었어요. 저녁에는 손님이 참 많이 왔는데, 그때는 또 첫째 아들이 도왔고요. 아이들을 키우면서 고생스러웠다고 느낀 적은 없어요. 상황이 되는 대로 아이들에게 모든 걸 맡겼고, 다행히 순조롭게 자라줘서 고맙죠.”
오랜 기간 서울대학교 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육자, 작가, 시인, 컬렉터로 살아온 서세옥 작가 또한 자녀 교육에 대해 정 고문과 같은 생각이었다. “선생님은 늘 아이들 공부에 대해 ‘공부는 못하면 또 한 번 시키면 된다. 근데 사회 일원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정교육은 다시 시킬 수 없다’고 말했어요. 아이들 성적표 보자는 소리 한 번 한 적 없지만, 신발을 똑바로 벗어 가지런히 놓으라는 등 생활 교육엔 엄격했죠. 그리고 아이들에게 자주 ‘먹을 갈라’고 시켰는데, 애들이 아버지 말을 잘 들었어요. 아들들도 나이를 먹고 보니 먹을 갈던 그 시간이 참 좋았다고 회상하더라고요. 저녁이면 매일 마당에 나가 아이들이 귀가할 때까지 기다렸다 대문을 열어주던 남편의 모습도 기억에 오래 남아요. 존경스러운 부분이죠.”
정 고문은 한옥이라는 공간, 한옥이라는 집 형태가 자녀의 직업이나 방향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믿는다. 실제로 서도호 작가는 2012년 리움미술관에서 <집 속의 집>이라는 대규모 전시를 열어 무송재 쪽문을 거꾸로 매달아놓은 ‘투영’, 무송재를 그대로 본뜬 비단 설치 작품 ‘서울집/서울집(Seoul Home/Seoul Home)’, 무송재가 미국 집에 날아와 부딪치는 형상을 한 ‘별똥별-1/5’ 등을 선보이며 ‘백남준과 이우환, 그다음 세대로 한국을 대표할 미술가’라는 수식을 얻었다. 서도호 작가 또한 이규현 미술 칼럼니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무송재와 자신의 작업의 관계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970년대, 아버지는 우리 집을 19세기 한옥으로 지으셨어요. 저는 매일 대문을 열고 학교에 갈 때마다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을 경험했고, 밖에서 집으로 들어갈 땐 타임머신을 타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연경당 자체가 순조 대왕 시절 궁궐 안에 선비의 집, 즉 민간인의 집을 지은 거예요. 그러니 19세기 당시에도 현실적이지 않았던 집이죠. 1970년대에 그 한옥을 본떠 지은 우리 집도 현실과 거리가 있지만, 제가 그 집을 섬유로 만들어 미국에 가져온 것도 현실과는 거리가 있어요. 모두 본래 문맥에서 떨어져 나와 엉뚱한 곳에 놓인 공간이죠.” 정 고문은 아들의 말에 한마디 보탰다. “미국에서 한옥을 모티브로 작업한 도호의 작품을 보고 특히 이민자들이 감동받았다고 하더라고요. 도호가 작품을 제작할 때의 마음이 그랬듯,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 또한 떠나온 고향과 가족, 뿌리가 생각난 것이 아닐까요.”
정민자 고문은 아름지기 멤버로 활동하며 ‘아름지기 단상’에 대한 짧은 글을 개인 노트에 적어놓고 가끔 생각날 때마다 들여다본다. 내용은 이렇다. “아름다움이란 영원한 것이다.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는 아름다움과 동일한 선상에 있다. 따라서 과거를 보존하고 승계해 현재를 꽃피워 미래를 가꾸어나가야 한다.(후략)” 정 고문은 ‘도시형 한옥의 모델하우스’라 불리는 아름지기의 안국동한옥 또한 무송재가 그랬듯, 더 많은 사람이 방문해 문화적 충돌을 느끼고 거기서 새로운 영감을 얻기를 바란다. 그렇게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꽃피우고 가꾸어지길 희망한다.





서세옥 작가 타계 1주기를 맞아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열린 <화가의 사람, 사람들> 전시. 사진 제공 성북구립미술관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사진 안지섭(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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