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를 수놓았던 이광희의 과거와 현재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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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2-28

1980년대를 수놓았던 이광희의 과거와 현재

1980년대부터 2000년대를 수놓은 그녀의 패션 이야기와 현재 그녀의 이야기.

앙드레김과 함께 한국의 하이엔드 패션을 선도하던 이광희 디자이너가 한창 활동하던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은 선 자리나 상견례, 약혼식 그리고 결혼식에서 이광희의 옷을 입지 않으면 소위 주류에 끼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녀가 지은 옷을 한 번이라도 입어봤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수준’이 갈렸고, 나아가 예복의 대명사로 자리 잡으며 “선 자리에 이광희의 옷을 입고 나가면 혼사가 잘 이루어진다”는 말까지 돌았다.
영부인 이희호 여사를 비롯한 3김 시대를 연 정치인 아내, 영부인 김윤옥 여사 그리고 국내 굴지의 기업가 안주인까지 이광희 옷을 찾으며 ‘이광희’라는 브랜드는 상류층의 복장을 대신하는 말이 되었다. 하지만 사실 그녀의 이름이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1987년 인기 드라마 <사랑과 야망>에서 원미경이 그녀의 옷을 입고 등장하면서부터다. 당시 셀럽과 시청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고, 사회 유력 인사의 아내까지 그 인기 대열에 합세하며 이광희는 자연스럽게 톱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했다. 그녀의 나이 고작 30대 중반이었다.
이화여자대학교 비서학과에 입학했지만 대학 생활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해 졸업 후 국제복장학원에서 본격적으로 패션을 배운 후 1979년 하얏트호텔 지하에 의상실을 열면서 본격적으로 패션계에 데뷔한 것이 스물여덟 살 때니 누가 봐도 빠른 성공이었다. ‘당신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드립니다’라는 모토로 시작해 한국 대표 디자이너로 88 서울 올림픽과 93 대전엑스포에서 기념 패션쇼까지 담당해 성대하게 치른 것 또한 마흔 즈음이니 이 정도면 천운의 주인공이 따로 없을 정도. 2000년에는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과 부산 파라다이스 호텔의 파라디아 명품관에 진출하며 국내 명품 브랜드의 인지도를 바꾸는 데 크게 일조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디자이너로서 삶은 생각만큼 즐겁지 않았다. “패션 디자이너로 살면서 이 일을 내가 왜 하는지 회의가 들 때가 많았어요. ‘상류층이 찾는 패션 디자이너’라는 타이틀도 조용한 제 성향과 맞지 않았죠.” 퍼스트레이디와 여성 국회의원, 여성 CEO들이 단골이고, 상류층의 예복과 재벌가의 웨딩드레스를 도맡으면서도 그녀는 사적인 자리나 네트워크를 갖지 않았다. 먼저 전화하는 법도, 친한 척하는 법도 없었다. “일반적 기준으로 보면 제가 시대에 맞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제가 사는 방법과 맞지 않았어요. 저는 당시에도 사적인 네트워크보다 그들이 원하는 옷을 잘 만들어내자, 옷으로 승부하자는 생각뿐이었거든요. 실력에 정성을 더하다 보니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매일 고객을 응대하는 것도 노력이 필요했지만, 브랜드 대표로서 사업가적 기질과 영업, 판매 능력이 요구되는 것도 힘든 부분 중 하나였다. 남들은 그녀를 잘나가는 디자이너라고 하지만 정작 자신은 매일 ‘오늘 그만둘까 내일 그만둘까’를 고민하며 살았다고.
일을 그만둔다면 그녀는 해남으로 내려가 부모님의 일을 돕고 싶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1973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으로 교단을 이끌고 7년간 한신대 초대 이사장을 지낸 故 이준묵 목사이며, 어머니는 광주제중병원(현 기독병원) 간호훈련소 출신의 우리나라 1세대 간호사 故 김수덕 여사다. 부모님은 결혼 후 중국 선교 사업, 병원 봉사 등을 통해 약자들을 돌보는 데 힘쓰다 1945년 땅끝마을 해남으로 내려가 해남읍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부모님의 관심은 지역사회를 비롯해 늘 주변 약자들을 향해 있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고아들이 거리 곳곳에 넘쳐나자 해남등대원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마을 주변의 한센인을 비롯한 병자들과 거리의 거지 등 사회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음지를 돌아보고 물심양면으로 챙겼다. 부모님에게 어린 이광희와 형제자매는 늘 고아 다음이었다.
그런 부모님을 보고 자랐기에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구호하는 것은 이광희에게 ‘대단한 일’이 아닌 일상으로 다가왔다. 전남여중 2학년 때 전남 지역 학생 중 한 명만 뽑는 선행상 수상자로 선정될 때도 시상식에 가지 않았다. 남을 돕기는 했지만 마음이 내켜서 했을 뿐, 상을 받는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광희 디자이너가 남수단 톤즈 지역에 심어준 망고나무 묘목. 지금은 수만 그루에 이른다. ©희망고

그런 성향의 이광희가 ‘상류층’의 취향을 넘어 큰 올림픽과 엑스포 기념 패션쇼를 치르며 한국을 대표하는 패션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얻고 성공 가도를 달리면서도 얼마나 내적 갈등이 많았을지 쉬이 짐작된다. “돌이켜보니 35~36세 즈음 남들이 말하는 ‘성공’을 한 셈이었어요. 당시 많은 기자가 ‘성공의 비결이 뭐냐’고 물었는데, 끝까지 답하지 못했어요. 그게 진짜 성공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그 질문에 내가 지금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없다. 예순 살이 되면 그때 대답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일흔이 된 지금도 성공의 진짜 의미를 잘 모르겠네요.”
대신 이광희는 그런 질문 끝에 늘 ‘인내’라는 단어로 마무리한다. “성공보다 인내에 관한 이야기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있나요. 일의 방향을 잘 설정한 후 누가 그것을 참고 끝까지 하느냐,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내 브랜드, 내 옷의 방향을 정하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키포인트 같아요.”
그녀를 평생 지탱해온 ‘인내’라는 단어는 어머니에게 배웠다. 패션 디자이너로서 회의가 들어 해남으로 내려갈까 고민할 때도 어머니 김수덕 여사는 “오늘도 참아봤느냐?”라고 물었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맡기신 일이 있다. 해남등대원을 지키는 일은 우리의 일이고, 너의 일은 네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맡은 바 일을 잘 해나가는 것이다.” 그녀는 그때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고백한다. “디자이너로서 내 일에 충실한 것, 그리고 이것으로 돈을 벌어 부모님이 하는 일을 돕는 것이 내 몫이겠구나 싶었어요. 그때부터 일에 자신감이 생겼고, 더 잘하려고 애썼죠.”
주변과 협력해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도모하는 자세도 부모님에게 배웠다. 그중 하나가 패션 디자이너의 삶을 살며 꾸준히 해온 예술 장르와의 협업과 자선 패션쇼다. 요즘은 패션과 아트의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이광희 디자이너가 성공 가도를 달리던 1980년대에는 대중의 인식 면에서 패션과 아트의 격차가 컸다. 하이엔드 패션과 명품이 사치로 분류되던 시절에 이광희 디자이너는 패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없애고, 그것이 우리 생활 문화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임을 알려 패션의 격을 높이는 데 일조하고 싶었다.
“당시 기자들은 우리 숍에 드나드는 손님이 누구인지 궁금해했어요. ‘그 사모님은 평소 어떠세요?’라고 묻는 기자도 있었죠. 고급 패션을 소비하는 손님을 사치나 과소비의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다분했죠. 패션의 위치를 재정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패션 또한 어느 예술 분야 못지않게 국가의 격을 보여주는 요소가 될 수 있으니까요.”





위쪽 2019년 톤즈 한센인 마을에 지어준 교회.
아래쪽 희망고 13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브로셔.

그 시작은 1986년 ‘이광희 룩스’라는 브랜드를 런칭하며 진행한 대규모 패션쇼에서였다. 이광희는 윤형주 씨에게 패션쇼 총감독을, 김중만 작가에게는 사진 작품을 부탁했다. 의상에 맞는 무대 장식부터 테이블 세팅까지 디테일하게 신경 쓰며 패션쇼를 종합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호암아트홀과 당시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88 올림픽 기념 초청 패션쇼에서는 무대 위 대형 배경막에 이항성 화백의 회화 작품 40여 점을 함께 올려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과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클래식 라이브 음악을 배경으로 쇼를 진행했고, 93 대전엑스포에서는 우제길 화백의 작품 주제 ‘빛과 그림’을 의상과 무대장치에 도입하며 한국 작가들을 전 세계에 알렸다. 2006년에는 김점선 작가와 협업해 <뮤제 드 이광희> 전시와 패션쇼를, 2009년에는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한 미디어 퍼포먼스 ‘봄의 제전III’에 참여해 새로운 스타일의 패션쇼를 선보였다. 2년 전 코엑스 대형 전광판에 ‘웨이브’ 작품으로 이슈를 모은 한 미디어 아트 그룹 ‘디스트릭트’와도 11년 전이던 2011년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함께 쇼를 선보일 정도이니 국내에서 패션과 아트 협업의 트렌드를 이끈 선구자라 일컬어도 손색없을 정도다. “제 쇼를 찾는 사람들은 정재계 인사를 비롯해 오피니언 리더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분들께 패션과 예술이 만나면 하나의 종합 예술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녀는 많은 자선 패션쇼를 진행하며 무의탁 노인, 신장병 어린이 돕기 등 소외된 이웃을 도우며 나눔을 실천했다. “어차피 제 패션쇼에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분들이 모이니 그 기회를 활용해 도네이션 행사를 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행사를 하나씩 치를 때마다 신경 쓸 일은 더 많아지지만, 많은 사람이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데 동참할 수 있다면 감내할 가치가 있는 고생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아프리카 톤즈의 주민을 돕는 NGO ‘희망고(희망의 망고나무)’도 쉽게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계속되는 내전과 홍수로 국가 기근을 선포한 남수단의 톤즈 마을을 처음 찾은 것은 2009년 3월 월드비전 홍보대사인 김혜자 씨를 따라 봉사 활동을 나서면서부터다. 처음 해외 구호 활동을 나선 그녀가 마주한 것은 톤즈 강물을 마신 주민 800여 명이 콜레라에 걸려 사망한 그곳에 탐스럽게 자란 망고나무였다. 망고나무 열매는 현지인의 유일한 먹거리였다. 나무 한 그루가 슈퍼마켓 하나와 비슷한 재산 가치를 지니는 그곳에서 망고나무는 희망의 나무, 생명의 나무였다.
“망고 하나에 온 가족이 붙어 나눠 먹는 모습에 마음이 아파 그 자리에서 망고나무 100그루를 심어주고 왔어요. 망고나무는 한번 열매를 맺기 시작하면 100년 동안 열린다고 해요. 한국에 돌아와 그 이야기를 전하니 많은 분이 동참해주셨어요.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1만5000그루를 심었죠.” 세 번째 방문 이후 남수단 정부는 1만 평의 대지를 무상으로 대여해주었고, 그녀는 2011년 남수단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최초로 국제 NGO 인가 남수단 남톤즈 카운티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뒤 사단법인 희망고 대표로 정식 활동을 시작했다.
2009년부터 2019년까지 열다섯 번 이상 톤즈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10년 전 100그루로 시작한 희망고의 망고나무는 현재 4만 그루가 됐다. 3만 원을 투자하면 100년을 먹고살 수 있는 망고나무 한 그루를 심어줄 수 있는 희망고에 대부분 좋은 마음으로 동참했지만, 인색하게도 “나무가 죽으면 어떡할 거냐?”라고 되묻는 사람부터 사사로운 시비를 거는 이가 많았다. “혹시라도 나무가 죽으면 다시 한 그루 심어주면 안 되나요?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함께 하자고 설득하는 과정이 이렇게 어려운지 미처 몰랐어요.” 묘목이 자라 열매를 맺기까지는 대략 6~7년 걸린다. 열매가 처음 열리기 전까지는 그녀 또한 불안한 마음이 클 수밖에.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자연재해를 보면 마을도 순식간에 없어지는 판이니, 톤즈의 기후나 자연재해 걱정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어요. 거의 불면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희망고를 설립한 후 지금껏 톤즈 지역의 주민들의 자립자족을 위해 힘쓰는 이광희 디자이너는 톤즈에서 ‘마마 리’라고 불린다. ©희망고

2011년에는 증여받은 1만 평 대지에 톤즈 주민의 교육과 자립을 위해 복합교육문화센터인 ‘희망고 빌리지’를 준공해 남성에겐 목공 기술을, 여성에겐 재봉 기술을 가르쳤다.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을 위해서는 희망고 유치원을 설립해 교육시켰다. 10년이 지난 지금, 유치원은 초등학교 5학년 교실까지 있는 교육기관이 되었다.
2019년에는 후원금에 자비를 보태 톤즈 한센인 마을에 평일엔 아이들을 위한 학교와 환자를 위한 진료 센터로, 일요일엔 예배당으로 사용할 수 있는 복합교육문화센터를 설립했다. “지금도 한센인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나요. 남수단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고, 그중에서도 상황이 심각한 톤즈에서 재차 버림받은 사람들이 바로 한센인이에요. 한센인과 그들의 가족이 모여 사는 100여 가구의 관자마을 아이들은 대부분 건강하거든요. 멋진 건물을 지어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2019년은 1979년 하얏트 호텔에 의상실을 낸 지 햇수로 40년이 되던 해였다. 희망고 활동 또한 10년이 되던 해. 패션 디자이너로서도, 희망고 대표로서도 한 번은 뒤돌아봐야 할 때였다. “톤즈는 최빈국인 데다 위험 지역으로 분류된 터라 한국인 직원을 현지에 두고 마음껏 일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어요. 사단법인 설립 이후 10년 가까이 현지인과 일하다 보니 1년 정도 톤즈에 머물며 마을과 학교 운영 등을 살피고 건물 보수도 진행하고 싶었죠.” 일흔이 되기 전 1년간 안식년을 정해 삶을 되돌아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 톤즈에 다녀오면 본업인 패션에 대한 영감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9년부터 안식년을 준비해 2020년 3월 톤즈로 떠나려는데, 갑자기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쳤다.
“톤즈로 가는 길이 막혔지만, 제 삶의 방향을 어떻게 재정비해야 할지 계속 고민했어요. 그때 마침 그동안 모아둔 메모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30대부터 지금까지 생각날 때마다 적어둔 메모인데, 안식년 동안 그걸 정리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메모를 글쓰기로 발전시키는 데 꼬박 1년이 걸렸고, 드디어 지난해 말 <아마도 사랑은 블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어머니 김수덕 여사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 형식의 글이 가득한 이 책은 가만히 읽다 보면 단순히 편지가 아닌 매일의 삶을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하소연과 투정, 그 와중에 스스로 발견하는 지혜와 깨달음으로 점철된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그녀의 겉모습을 보고 화려한 삶을 살았을 거라 짐작하지만, 인생은 그리 녹록지 않다. 그녀는 70평생 동안 겪은 경험을 함께 나누고 공감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썼고, 특히 30~40대가 이 책을 읽었으면 싶다.
“요즘 유행하는 자기 계발서를 보면 죄다 ‘행복’을 이야기해요. 행복이 지상 목표고,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장하죠. 그런데 ‘어떻게 해야 행복한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그녀는 삶의 본질이 ‘생로병사’에 있다고 본다. 생로병사에는 행복이나 기쁨보다는 많은 부분 고통을 수반한다. 고통의 연속인 생로병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겨내느냐에 따라 행복도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찾아온다.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행복이 되려면 자신의 삶과 일에 대해 긍정적 사고로 임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발전적인 자기 계발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반복될 때 행복이 찾아온다고, 이광희 디자이너는 믿는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인상적인 글이 나온다. 어느 날 이광희 디자이너가 90세 어머니에게 묻는다. “엄마는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사세요?” 노쇠한 어머니는 대답한다. “’너는 지금 어느 선(線)에 서 있느냐?’ 하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지.” 그렇다면 이광희 디자이너는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시간을 쓰는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 지금까지 원 없이 옷을 만들었고, 패션쇼도 많이 해봤고, 일찌감치 예술가들과 협업하며 하고 싶은 건 다 해봤거든요. 지금은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책임과 사명을 다하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요.”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사진 안지섭(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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