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시간이 빚어낸 예술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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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22

자연과 시간이 빚어낸 예술

시칠리아 서부에서 해풍과 시간이 켜켜이 쌓인 마르살라 와인의 발자취를 좇았다.

위쪽 바다에 면하고 있는 플로리오 양조장에서는 화이트 품종인 그릴로를 100% 사용한 마르살라를 양조한다.
아래쪽 플로리오 양조장 내 4개의 셀러 중 하나. 길이가 가장 긴 것은 200m에 달한다.

지중해 최대 섬 시칠리아를 여행해본 적이 있다면, 지금 어떤 장면이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가. 프랑스 소설가 기 드 모파상은 시칠리아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길 위의 짐수레에 눈길을 보냈다. 그 후 1890년에 출간한 산문집 <방랑생활>에서 그는 시칠리아의 첫인상을 “알록달록 칠해진 이 마차들은 낯선 길을 지나가면서 시선을 끌고, 흥미를 유발하며, 우리가 어떻게든 풀어봐야 하는 수수께끼를 하듯 움직인다”고 표현했다.
필자 또한 이 지면을 통해 지난봄 시칠리아 서부 도시 마르살라를 여행하며 마음을 빼앗긴 마르살라 와인과 그 발자취를 좇던 경험을 이야기하려 한다. 마르살라는 해풍과 오크통 숙성을 거쳐 짭조름하고 고소한 맛이 나며, 당분을 얼마나 남기느냐에 따라 드라이·세미 드라이·스위트 등으로 구분한다. 다양한 음식과 잘 어울리는 편이지만, 보통 와인 애호가에게 마르살라는 포트·셰리·마데리아 같은 주정 강화 와인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고소한 풍미 덕에 눅진한 소스를 만들 때 요긴하게 쓰이는 독한 싸구려 와인부터 수십 년간 숙성한 깊고 풍부한 맛의 고급 와인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마르살라 와인은 1773년 리버풀 출신 해상무역업자 존 우드하우스(John Woodhouse)에 의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폭풍우를 만나 예정에 없던 마르살라 항구에 불시착한 우드하우스가 어느 날 저녁 현지 주점에 들렀다 그곳에서 파는 로컬 와인의 품질에 매료돼 자신의 선박에 적재한 것이 그 배경. ‘영원한 와인’을 뜻하는 비노 페르페투오(Vino Perpetuo)라 불리던 로컬 와인은 큰 오크통에서 수십 년간 숙성해 만든 것으로, 산화작용과 수분 증발에 의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맛과 향기가 농축되고 도수가 강해지는 매력을 지녔다. 그런 만큼 이미 포트나 셰리 와인의 풍미를 경험한 우드하우스가 첫눈에 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생산자에게 직접 구매해 가격도 저렴했다. 아마 당시 우드하우스는 이런 기회가 다시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한 듯하다. 그는 먼 뱃길에 와인이 상할 것을 염려해 브랜디를 주입했고, 예상대로 마르살라 와인은 영국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항구에 하역하자마자 완판된 것은 물론, 넬슨 제독 역시 “젠틀맨 클럽에 아주 적합하다”며 마르살라의 맛을 높이 평가한 뒤 무려 200파이프(1파이프당 550리터들이 나무통)를 구입해 해군 장병들과 나눠 마셨다고 한다. 우드하우스는 다시 마르살라로 가서 도시 최초의 양조장 ‘우드하우스’를 탄생시켰고, 1805년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도 이곳에서 마르살라를 구입했다고 전해진다.







플로리오 양조장에서 가장 오래된 1889년산 마르살라 와인.
마르살라 와인 개척자들의 초상화.


이 같은 마르살라 와인의 스토리가 삽시간에 영국에 퍼지자 한 젊은이가 호기롭게 배에 올랐다. 그가 바로 벤저민 잉엄(Benjamin Ingham)이다. 스물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임에도 시칠리아 사무소장 자리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패기가 넘쳤던 잉엄은 1806년 우드하우스 옆에 보란듯이 양조장을 세워 경쟁에 끼어든다. 탁월한 사업가 기질을 바탕으로 유럽과 미국에 마르살라를 수출하며 큰 부를 쌓은 그는 번창하는 사업을 뒷받침해줄 인물을 찾기 위해 영국 본가에 편지를 보내 조카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잉엄을 보좌한 세 명의 조카 중 조지프 휘터커(Joseph Whitaker)가 잉엄의 유일한 후계자가 된다. 지금까지 두 사람의 이름이 함께 시칠리아 명사록에 남은 것으로 보아 이들이 마르살라 와인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휘터커는 그의 이름을 본뜬 박물관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고대 페니키아의 문화유산이 잘 보존된 마르살라 근처의 작은 섬 모치아(Mozia)를 구입해 ‘휘터커 박물관(G. Whitaker Museum)’을 세웠다. 박물관 소장품 중 최고로 손꼽히는 것은 다름 아닌 전신상 ‘Il Giovinetto(청년)’. 대리석으로 빚은 전신상이 이토록 매혹적이고 관능적일 수가 없다. 세밀하고 섬세하게 빚은, 보존 상태마저 훌륭한 이 조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곳에 가볼 만하다.
당시 영국인의 독무대 같던 마르살라에 이탈리아 현지 기업가들도 가세하기 시작했다. 증기선 제조업자 빈첸초 플로리오(Vincenzo Florio)가 1833년 우드하우스 옆에 양조장 ‘플로리오(Florio)’를 설립했고, 후일에 우드하우스까지 인수하며 오늘날 마르살라 와인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현재 해변도로 맞은편에 자리해 눈앞에 모래사장과 바다가 펼쳐지는 플로리오 양조장은 한 블록 전체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거대하다. 4개의 대형 오크통 숙성실 중 긴 것은 200m에 달할 뿐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3000개가 넘는 오크통이 모두 바다를 향해 4열 종대로 늘어선 진귀한 장면을 펼쳐낸다. 하지만 플로리오의 특징은 규모가 아닌, 셀러의 메커니즘에 있다. 플로리오 책임자 로베르토 마니시(Roberto Magnisi)는 “이 지역은 기온이 높고, 습도가 낮으며 바람이 많이 불어요. 우리 선조들은 이런 자연환경을 이용해 탁월한 마르살라 와인을 유산으로 남겼습니다”라고 말하며 “우리의 셀러 역시 테루아의 일부”라고 덧붙였다. “바다와 가까운 지역은 토양에 수분이 많고, 바다에서 멀어질수록 건조해집니다. 그리하여 바다에 가까운 곳은 실내 온도 변화가 덜하며, 멀어질수록 온도가 쉽게 변하죠. 그러니 바다 인근에 놓인 오크통은 높은 습도와 더딘 온도 변화에 힘입어 와인 품질 변화가 적고, 알코올 증발을 의미하는 에인절스 셰어(Angel’s Share)도 적습니다. 멀어질수록 산화가 더 촉진되고요. 물론 증발도 더 많습니다. 그 결과 와인에 고소함이 더해지며 색도 짙어지죠. 오랜 숙성을 통해 고소하고 집중된 복합적인 맛을 필요로 할 경우 먼 곳에 오크통을 쌓고, 그렇지 않으면 가까운 곳에 쌓습니다.” 플로리오의 마르살라는 자연주의 철학의 내추럴 와인 양조법과 매우 유사하다. 자연 효모로 발효하며, 침전물을 거르는 필터링이나 필터링으로 걸러지지 않는 단백질 분자를 제거하는 파이닝 작업을 전혀 거치지 않는다. 양조장에는 에어컨이나 기계식 온도 장치도 마련돼 있지 않다. 로베르토가 설명한 ‘셀러 테루아’라는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니 마르살라를 아직도 저급한 요리용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하고 싶다. 마르살라는 그야말로 바다와 시간이 빚어내는 포도의 예술품이라고.

 

에디터 손지수(jisuson@noblesse.com)
글 & 사진 조정용(키안티 클라시코 명예대사, 올댓와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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