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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 2024-10-18
경계없음
라이프스타일 분야로 과감하게 뛰어든 패션 브랜드 아홉 곳의 인상적인 흐름.

왼쪽 ‘구찌 디자인 앙코라 컬렉션’ 중 토비아 스카르파의 화병 ‘오파치(Opachi)’
오른쪽 지승공예가 이영순이 밀라노 디자인 위크 2024에서 ‘로에베 램프’ 프로젝트를 통해 선보인 조명.

르코르뷔지에의 LC14 타부레 카바농 스툴을 산처럼 쌓은 보테가 베네타의 설치 작품 ‘온더록스(On the Rocks)’
BOTTEGA VENETA 패션쇼 속 르코르뷔지에
타는 듯한 태양과 사막을 떠올리게 한 보테가 베네타의 2024년 겨울 쇼 베뉴. 거친 자연의 무드를 극대화한 건 나뭇결이 두드러지는 스툴이었다. 보테가 베네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티유 블라지는 컬렉션 전반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이 스툴 제작을 카시나에 직접 의뢰했다. 목재를 그을려 자연스럽게 내구성을 높이고 나뭇결을 진하게 드러내는 일본 전통 기법을 차용한 방식. 카시나 목공방은 마티유 블라지의 디렉션에 따라 전설적인 르코르뷔지에의 LC14 타부레 카바농(Tabouret Cabanon) 스툴을 새롭게 만들었다. LC14 타부레 스툴은 프랑스 동남부 코트다쥐르 지역의 로크브륀카프마르탱 마을에 있는 르코르뷔지에의 개인용 오두막 ‘카바농’을 위해 태어났다. 단순하면서도 실용적인 타부레 스툴은 르코르뷔지에가 카바농 인근 해변에서 발견한 나무 위스키 박스에서 착안해 디자인한 것. 패션쇼 이후 마티유 블라지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이 상징적 스툴을 다시 한번 선보였다. 이번엔 쇼에 활용한 우드 에디션과 새롭게 제작한 레더 에디션을 산처럼 쌓아 대규모 설치 작품으로 연출하고 ’온더록스(On the Rocks)’라고 이름 붙였다. 레드, 옐로, 블루, 레인트리 그린 네 가지 색을 입은 레더 에디션은 비첸차 근처 몬테벨로에 있는 하우스 아틀리에 장인들이 보테가 베네타의 풀라드 인트레치오 기법으로 일일이 손으로 완성한 것이다. 가죽에 컬러 페인트를 칠한 다음 블랙 페인트를 덧칠하고 일부를 벗겨내 독특한 질감으로 마무리한 가죽 스툴. 패션 공방의 가구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바로 이런 디테일 때문 아닐까?

2022년 로에베 재단 공예상 수상자인 정다혜 작가가 말총을 엮어 완성한 구 형태의 조명.
LOEWE 공예가의 조명 쇼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만큼 직함에 충실한 디자이너가 또 있을까? 그는 컬렉션과 시즌 캠페인뿐 아니라 브랜드의 모든 부분을 리뉴얼했다. 확고한 이미지와 명성을 지닌 패션 하우스의 틀 안에서 꿈을 펼치는 디자이너 말고, 전통 패션 하우스를 현대적 감각으로 뾰족하게 다듬거나 확장하며 새로운 모양으로 재구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가 주도해 2016년 출범한 로에베 재단 공예상이 대표적 예다. 브랜드의 오랜 전통과 장인정신을 강조하면서 현재 가장 독창적이고 탁월한 공예가를 직접 발굴하고 지원하는 영민한 프로젝트. 이러한 작업을 통해 그는 로에베란 브랜드를 더욱 입체적이고 깊이감 있게 만들었다. 지난봄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는 그 연장선으로 멋진 ‘조명 쇼’를 선보였다. 로에베 하우스와 오랜 인연을 맺어온 24인의 공예 아티스트와 함께 24개의 조명을 만들어 한 곳에 전시한 것이다. ‘로에베 램프’라고 이름 붙인 이 프로젝트를 통해 각각의 아티스트는 자신만의 작업 방식으로 빛을 수용하고 표현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조명 작업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작품이 더 참신하고 흥미롭다. 2019년 로에베 재단 공예상 수상자인 옻칠공예가 이시즈카 겐타(Kenta Ishizuka)는 여러 겹으로 옻칠한 덩어리 형태의 펜던트 조명을, 도예가 막달레나 오둔도(Magdalene Odundo)는 부드러운 가죽 소재를 오리가미 형식으로 접어 뾰족하게 표현한 행잉 조명을 선보였다. 2022년 로에베 재단 공예상 수상자인 정다혜 작가도 참여해 말총공예로 완성한 구 형태의 조명을 소개했다. 종이 노끈으로 작업하는 지승공예 작가 이영순도 조롱박 모양의 행잉 조명을 선보였다. 각각 하나뿐인 24개의 조명은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에 대부분 주인을 찾았다고 한다.

망치로 두드린 자국이 그대로 드러난 알루미늄 프레임이 인상적인 디아파종 데르메스 라운지 체어.
HERMÈS 마구를 닮은 홈 컬렉션
라이프스타일 섹션에 가장 공을 들이는 패션 하우스 하면 에르메스를 다섯 손가락 안에 꼽아야 한다. 소재와 색감에 대한 깊은 이해는 물론, 예술을 삶 그 자체로 즐기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정확하게 꿰뚫어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에르메스에서 만드는 집기는 늘 클래식하지만 고루하지 않다. 이번 시즌 에르메스 홈 컬렉션은 하우스의 뿌리와 유산에 관한 것으로 채웠다. 망치로 두드린 알루미늄 프레임과 가죽 시트를 사용해 심플하게 만든 디아파종 데르메스(Diapason d’Hermès) 라운지 체어는 2002년 출시한 실버 소재의 티무르(Timoure) 네크리스에서 영감을 얻었다. 당시에도 에르메스의 장인은 실버 소재를 일일이 망치로 다듬어 얇고 간결하게 마무리했다. 볼티주 데르메스(Voltige d’Hermès) 램프는 하우스의 정체성인 ‘승마’를 명확하고도 단순하게 드러낸다. 채찍에 주로 쓰인 투톤 브레이드 가죽 소재를 조명의 스템에 적용한 것. 에르메스의 마구 제작, 가죽 작업 노하우를 직접적으로 활용한 오브제 라인 ‘더비(Derby)’ 역시 흥미롭다. 바스켓, 버킷, 가죽 트레이 등으로 구성한 이 라인에는 유연한 가죽을 견고한 오브제로 변환하는 에르메스의 오랜 노하우가 담겨 있다. 마구를 만들 때 주로 쓰는 파스망트리와 브레이딩 기법으로 섬세하게 그려 넣은 트레사주 에퀘스트르(Tressages Équestres) 식기 세트는 올해 에르메스 홈 컬렉션의 백미.

디자이너 치니 보에리의 대표작인 모듈형 가구 스트립스.
LORO PIANA 최고급 소재를 입은 치니 보에리의 가구
‘조용한 럭셔리’ 패션 트렌드에 힘입어 다시 주목받고 있는 로로피아나. 소재로 명성을 떨친 만큼 울 담요나 쿠션, 러그 같은 소소한 아이템 위주로 이미 홈 컬렉션을 소개해왔지만 올해의 행보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시작은 밀라노 디자인 위크. 밀라노 태생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치니 보에리(Cini Boeri)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를 선보였다(로로피아나 역시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치니 보에리에게 바치는 헌사’란 이름의 이 프로젝트는 로로피아나 인테리어 사업부와 치니 보에리 기록보관소 그리고 가구 브랜드 알플렉스(Arflex)가 협업해 완성했다. 심플하게 말하면, 알플렉스가 제작한 치니 보에리의 가구에 로로피아나의 패브릭을 입힌 것. 치니 보에리의 대표작으로 1979년 황금컴퍼스상을 수상한 모듈식 스트립스(Strips) 시스템, 스트립스 침대, 페코렐레(Pecorelle) 소파와 암체어, 보보(Bobo)와 보보릴랙스 암체어, 보톨로(Botolo) 하이 체어와 로 체어 등이 이 프로젝트의 주인공이 되었다. 특히 캐시미어와 실크가 섞인 부드러운 캐시퍼(cashfur) 소재로 마무리한 보톨로 체어는 100개의 스페셜 컬러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소개했다. 한편, 로로피아나와 치니 보에리 기록보관소의 협업은 2026년 밀라노 트리엔날레에서 열리는 치니 보에리의 첫 번째 주요 회고전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라마르조코와 협업, 리모와 특유의 그루브 알루미늄 소재로 마무리한 리니아 미니 에스프레소 머신.
RIMOWA 그루브 알루미늄을 장착한 커피 머신
패션과 라이프스타일의 결합이 반가운 이유 중 하나는 그저 아름답기 때문이다. 대표적 예가 리모와와 라마르조코(La Marzocco)가 함께 만든 리니아 미니 에스프레소 머신이다. 리모와의 뿌리는 기능성 러기지지만, 2017년 LVMH 산하로 들어간 후 젊고 트렌디한 패션 브랜드로 진화하고 있다. 또한 리모와의 그루브 알루미늄 소재는 그 자체로 아이코닉한 디자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리모와와 라마르조코는 각자의 장기를 이 작은 머신에 쏟아부었다. 외관은 리모와의 시그너처인 그루브 알루미늄 소재로 마무리했다. 피렌체를 기반으로 하는 라마르조코는 최고의 성능을 위해 수작업으로 커피 머신을 생산한다. 리니아 미니 에스프레소 머신 역시 피렌체의 공방에서 한 피스당 약 40시간을 투자해 완성한다. 여기엔 쾰른의 리모와 공장에서 공수한 그루브 패널을 조립하고 장착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아름답고 다부진 사각의 기계. 밀라노 디자인 위크엔 이 머신을 선보이는 작은 카페가 열리기도 했다. 머신은 주문 제작으로 살 수 있다.

생 로랑 리브 드와에서 재출시한 조 폰티의 빌라 플란차르트 세냐포스토 컬렉션 플레이트.
SAINT LAURENT 안토니 바카렐로가 고른 접시
생 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토니 바카렐로만큼 문화유산에 조예가 깊은 인물도 드물다. 문화 예술을 사랑하고, 나아가 그 흐름을 이끌어가는 힘은 이브 생 로랑 시절부터 이어온 브랜드 DNA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안토니 바카렐로는 ‘생 로랑 리브 드와(Saint Laurent Rive Droite)’라는 이름의 복합 문화 공간을 만들었다. 브랜드 매장과는 별개로 그가 큐레이팅한 문화 전반에 걸친 콘텐츠, 그 안에서 표현과 교류, 라이프스타일을 위한 새로운 개념의 공간을 창조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곳은 안토니 바카렐로와 현재의 생 로랑을 관통하는 라이프스타일과 취향 그 자체인 셈. 최근 생 로랑 리브 드와에서 소개한 건 조 폰티 아카이브 및 아날라 & 아르만도 플란차르트 파운데이션과 독점 컬래버레이션한 피스다. 지노리 1735와 손잡고 1957년 조 폰티가 디자인한 빌라 플란차르트 세냐포스토(Villa Planchart Segnaposto) 컬렉션의 오리지널 플레이트 12개를 재출시한 것. 건축가 조 폰티는 당시 아날라와 아르만도 플란차르트의 의뢰로 베네수엘라에 빌라를 설계했는데, 실내장식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지노리 1735와 식기 세트를 디자인했다. 안토니 바카렐로는 그중에서 문자 ‘A’와 태양, 초승달, 북극성 등의 모티브를 새긴 접시를 택해 재출시했다. 원래 이 프로젝트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위해 기획한 것으로, 디자인 위크 기간에는 산 심플리차노 회랑에서 전시회 형식으로 소개했다.

‘구찌 디자인 앙코라 컬렉션’. 구찌의 DNA와 맞닿은 20세기 가구 중 5피스를 선택해 ‘로소 앙코라’ 컬러를 입혔다.
GUCCI 로소 앙코라로 물든 오브제
2023년, 전임자의 짙은 그림자 속에서 구찌 하우스에 발을 들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바토 데 사르노. 그는 첫 컬렉션부터 구찌의 아카이브를 파고들었다. 브랜드 DNA에 새겨진 진정한 이탤리언 스타일을 그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려 했다. 구찌 유산에 대한 그의 탐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지난 4월에 데 사르노는 그의 첫 가구 프로젝트도 선보였다. 이름하여 ‘구찌 디자인 앙코라 컬렉션’. 데 사르노는 완전히 새로운 가구를 디자인하기보다 아카이브 피스에 구찌의 색을 입히는 방식을 택했다. 이탤리언 스타일을 뚜렷이 드러내며 구찌의 DNA와도 맞닿아 있는 20세기 가구 중 5피스를 선택해 깊고 붉은 ’로소 앙코라(Rosso Ancora)’ 색 버전으로 재출시한 것. 마리오 벨리니의 소파 레 무라(Le Mura), 난다 비고가 디자인한 캐비닛 스토렛(Storet), 토비아 스카르파의 화병 오파치(Opachi), 가에 아울렌티와 피에르 카스틸리오니가 만든 테이블 조명 파롤라(Parola)가 그것이다. 나머지 한 피스는 밀라노 건축 거장 피에로 포르탈루피가 주로 쓰던 모자이크와 기하학 패턴을 재해석한 씨씨 타피스의 러그 클레시드라(Clessidra). 이 러그는 이번에 새롭게 탄생한 오브제다. 새로운 구찌를 상징하는 붉은 와인색 로소 앙코라 컬러의 오브제 컬렉션. 구찌는 이 컬렉션을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에 공개했다.

미스터 로렌이 소유한 맥라렌 F1 경주용 차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RL-CF1 체어.
RALPH LAUREN 가구로 변신한 자동차
랄프 로렌의 홈 컬렉션은 이미 방대한 수준이다. 미스터 로렌은 자신의 삶에 맞춰 브랜드를 변화시켰다. 아이를 키우며 아동복 라인을 추가하고, 마음에 드는 인테리어를 완성하기 위해 홈 컬렉션을 만들었다. 이번 시즌 주제는 그의 오랜 취미이자 열정의 대상인 자동차, 이름하여 ‘모던 드라이버’다. 미스터 로렌은 평생 자동차를 수집했고, 그 물건의 기능적 아름다움을 숭배했다. 1938년식 부가티 타입 57SC 아틀란틱 쿠페, 1929년식 벤틀리 블로어(Blower), 1955년식 메르세데스-벤츠 300 SL 걸윙 쿠페 등이 바로 그것. 이번 시즌 핵심 아이템은 아이코닉 RL-CF1 체어다. 2003년 처음 소개한 RL-CF1 체어는 미스터 로렌이 소유한 맥라렌 F1 경주용 차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것이다. 이번 시즌 리뉴얼한 RL-CF1 체어는 F1 경주용 차와 같은 하이테크 섬유 소재로 제작했다. 그래서 가볍고 튼튼하며 탄성이 좋다. 클래식한 벡포드 테이블 램프는 미스터 로렌이 소장한 1929년식 벤틀리 블로어의 그릴처럼 금속 와이어를 촘촘히 감은 메시 형태로 마무리했다. 이번 컬렉션은 랄프 로렌이 가구 디자인과 제조 전문 기업 하워스(Haworth)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함께 선보이는 첫 번째 작품이다.

톰 브라운이 텍스타일 전문 브랜드 프레테와 협업해 만든 침구 세트를 활용,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선보인 퍼포먼스.
THOM BROWNE 유니폼이 된 침구
중간 톤 회색과 4선 장식, 몸에 꼭 맞는 실루엣. 톰 브라운은 자기 색이 뚜렷한 디자이너다. 시즌별로 큰 차이가 없을 만큼 일관된 스타일을 고수한다. 그 자신도 거의 같은 옷만 입는다. 잘 다린 흰색 옥스퍼드 셔츠에 라펠이 좁고 소매와 바지 기장이 모두 짤뚱한 회색 슈트 혹은 반바지 슈트. 마치 1960년대 미국 TV 시리즈에서 튀어나온 인물 같다. 그런 그가 라이프스타일 섹션에 손을 뻗었다. 물론 처음은 아니다. 삼성 갤럭시와 휴대폰 Z 시리즈를 몇 년간 함께 만들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분야가 좀 다르다. 홈 텍스타일 전문 브랜드 프레테(Frette)와 협업해 침구 세트와 수건, 가운 등을 선보인 것. 톰 브라운은 이 협업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주제에 어울리는 퍼포먼스도 기획했다. 똑같이 생긴 빈티지 야전침대 6개를 침구로 반듯하게 감싸고 속옷만 입은 모델을 등장시켜 ‘잠’이란 주제를 흥미롭게 보여줬다. 이쯤 되면 꽤나 본격적인 행보다. 홈 컬렉션 영역에 좀 더 적극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프레테와 함께 만든 컬렉션은 침구 세트와 담요, 테리 타월과 캐시미어 가운, 목욕 타월 등으로 구성했다. 담요를 제외하곤 모두 말끔한 화이트. 당연히 네 줄 장식이 있다.
글 안주현(프리랜서)
에디터 정규영(ky.chung@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