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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10

힙합 디오니소스

토미야스 라당은 춤추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

Chavire’, Soukouss, Liberation, Oil on Linen with Hand-carved Wooden Artist Frames and Hand-carved Painted Wooden Elements, 125×255×5.2cm(Overall), 2024. Courtesy of Artist and Esther Schipper, Berlin/Paris/Seoul. © Chroma

검색 말고 사색. 요 몇 년 전부터 잘 지키고 있는 결심이다. 검색 즉시 온데간데없는 기억 때문에 나이 탓을 하고 싶지 않아서다. 전시를 볼 때도 가능하면 사전 정보 없이 간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무제’ 행렬 속에 작품 제목이라도 발견하면 어찌나 반가운지. 하지만 암호 수준의 제목을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그저 작품 앞에 한참을 서 있을 수밖에.
‘힙합 디오니소스’. 날개 달린 이면화의 제목 ‘Chavire´, Soukouss, Liberation’의 해독을 포기하자 떠오른 말이다. 춤의 황홀경에 빠진 두 사람이 일으킨 작은 회오리바람이 그림 밖 관람객의 얼굴에도 휙 불어온다. 빠른 리듬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오는 하얀 가면, 미처 땅을 딛기도 전에 떠오르는 두 발, 먼 나라에서 온 게 분명한 낯선 색채 팔레트, 시공간을 초월한 초현실적 배경까지. 이 작품이 아니었다면 세계지도에서 작가 토미야스 라당(Thomias Radin)의 고향 과들루프를 찾아보지도, 그곳의 전통 핸드 드럼인 그워 카(Gwo Ka) 연주도 찾아 듣지 않았으리라.
양 날개를 펼친 채 카리브해에 사뿐히 내려앉은 나비 모양 섬은 그 시적(詩的) 모습과 달리 거친 운명을 겪었다. 스페인·프랑스·영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고, 지금은 프랑스의 해외 레지옹(우리나라 도(道)에 해당)이다. 원주민과 서유럽인, 게다가 17세기 서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까지 뒤섞여 오늘날의 과달루프를 이루었으니 혈통은 무의미하다.
“크리올어로 셰비레(Chavire´)는 ‘뒤집히다’, 수쿠스(Soukouss)는 지진 같은 ‘갑작스러운 흔들림’, 리베라시옹(Liberation)은 억압에서 벗어나는 ‘해방’을 뜻합니다. 작품 ‘전복, 전율, 해방’을 통해 혁명적 사회운동의 다양한 단계를 몸의 움직임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과들루프와 프랑스의 신식민지적 관계를 다룬 작품이기도 하고요. 자유의 느낌을 강화하기 위해 손으로 조각한 나무 날개를 달았는데요, 이는 제 가족의 목공예 전통과 연결됩니다. 작품의 일부인 프레임도 직접 만들어요.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이 모두 목수였거든요. 특히 삼촌은 그워 카 제작의 대가입니다. ‘카(Ka)’는 북을 의미하는데, 원래 생명력을 가리키는 고대 이집트어죠.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요소로 우리가 음악을 연주할 때 사용하는 것이 바로 카입니다. 활력의 주파수, 삶의 에너지가 진동 형태로 전달되는 게 음악이니, 카로 연주하는 음악은 신성한 것입니다.”
한편 그워 카 춤은 비틀거리며 곧 넘어질 것 같은 춤사위다. 팔다리가 따로 노는 막춤에 가깝다. 꼭 음악에 맞춰 추는 것이 아니라 댄서에게 맞춰 음악이 연주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저마다 고유의 리듬과 패턴이 드러나고, 자유로움이 극치에 달할 때 춤은 끝난다. ‘춤추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그의 작업도 마찬가지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듯, 춤에 맞춰 악기를 연주하듯 그림이 요구하는 리듬에 맞춰 작업한다. 처음에는 추상적 풍경으로 캔버스를 채우고, 그 위에서 즉흥적으로 구도를 정한다. 스스로가 연주자이자 댄서가 된다. 이러한 즉흥성은 ‘신성’과 ‘자유’를 부른다. 그림이 풀리지 않을 때도 춤 연습을 하면서 답을 찾고, 움직임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한다.
라당은 네 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10년간 축구를 했다. 본격적인 춤 훈련은 열여섯살 때 시작했고, 열정과 피나는 연습으로 늦은 나이를 극복했다. 춤과 회화를 동시에 발전시켜 온 그의 퍼포먼스 현장은 언제나 발 디딜 틈이 없다. 관객 역시 ‘지금’이라는 리듬에 맞춰 춤추는 디오니소스가 된다. 내 안의 디오니소스는 어떤 모습일까. 그워 카에 맞춰 막춤을 춰보기로 한다. 스텝이 꼬여 고꾸라지면 또 어떤가. ‘봄 탓’이라 말하면 되는 지금은 3월 아닌가.

 

김지은(아나운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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