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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17 LIFESTYLE

Dear. My Hero

  • 2017-04-26

영웅을 그리는 사람 그리고 영웅을 빚는 사람. 두 남자 작가의 지금, 내 영웅 이야기.

너무나 인간적인 나의 슈퍼히어로
영웅은 오랜 세월 아티스트에게 사랑받은 주제다. 찬탄할 만큼 아름답거나 또는 늠름하고 전지전능한 신화적 인물과 영웅의 모습은 예술의 초기 흔적에도 등장한다. 특히 인간중심적이고 합리적인 이성과 실용적 사고가 태동하던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인간의 모습을 한 신과 초인적 역량을 지닌 인간을 소재로 한 ‘신화’에 탐닉했다. 이전에 없던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수많은 문화와 인종이 섞여 새로운 ‘가능성’이 폭발하던 시기였다. 문화, 예술, 철학, 법률, 수학, 과학 등 인류의 학문이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지만 급진적 변화에 따른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대한 불확실성과 위험이 공존했다. 그 속에서 인간이 ‘희망’을 품고 긍정적 사고를 하며 눈부신 문화적 성과를 창출할 수 있었던 데에는 미래를 향한 용기를 심어주는 영웅의 존재가 한몫했다. 신과 영웅의 수호를 기대하면서도 인간적이고 익숙한 모습으로 표현된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새로운 용기를 충전했다. 이후 수천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때와 비슷한 위기와 기회에 놓여 있다. 4차 산업혁명과 고도로 발달한 기술이 가보지 않은 완전히 다른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만든다. 이에 현대인에게도 용기를 불어넣어줄 새로운 영웅이 필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이 역대 최장 기간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시대에는 과거처럼 완벽한 영웅, 거대한 용기가 필요하지 않은 듯하다. 일상적이면서도 새롭고 이색적인 영웅의 모습을 소개하는 2명의 작가를 만났다. 이탈리아의 시각예술가 마시모 자콘(Massimo Giacon)과 대한민국의 조각가 곽철. 국적과 연배, 경력과 활동 분야 또한 상이한 이들이 각기 다른 경험과 독특한 시각으로 구현한 ‘현대의 영웅상’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꺼지지 않는 용기의 불씨를 지펴줄 개인적이고 상대적인, 동시에 아주 인간적인 영웅을 스스로 찾고 키워나가길 기대하면서 두 작가의 영웅 이야기를 소개한다.

마시모 자콘

“에토레 소트사스, 슈퍼히어로가 된 디자이너

”만화, 일러스트, 산업디자인, 작곡, 공연, 비디오 제작, 개념미술 등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종횡무진하고 있는 마시모 자콘은 종합 디자인의 개념이 발달한 이탈리아에서도 매우 독특한 프로필을 보유한 개성 넘치는 아티스트다. 5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그의 만화처럼 재기 발랄하고 다이내믹한 삶을 살고 있다. 특히 근현대 이탈리아 디자인의 전성기인 1980년대, 20대 중반인 그가 건축계 거장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를 비롯해 알레시, 스와로브스키, 스와치 등과 협업하며 건축, 디자인 영역에서 활약한 것은 다른 만화가나 시각예술가도 부러워하는 독보적인 커리어다. 2D로 구현한 가상현실을 벗어나 ‘실제의 무엇’을 만들게 될 줄은 그 스스로도 상상조차 못했다고 말할 정도. 하지만 그가 가장 애착을 보이는 분야는 유년기의 뿌리와 닿아 있는 ‘만화’다. “어린 시절부터 소위 사연(?) 있는 영웅 만화 속 주인공을 좋아했어요. 신격화된 고전의 영웅 이야기는 오히려 크게 와 닿지 않았죠. 대단하지만 한편으론 잔인하고 편협한 인물이랄까. 평가에 따라 위인이 되기도 하고 독재자나 학살자가 될 수도 있는데, 그런 양면성을 두고 선뜻 한쪽에만 집중해 그들을 옹호하기가 어린 내겐 쉽지 않았어요. 대신 성장기에 부모의 죽음으로 상처받은 배트맨, 소심하고 나약한 성격의 소유자인 스파이더맨, 크립토나이트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슈퍼맨에게 끌렸어요. 거창하고 구조적인 비극의 주인공보다 개인적 가정사, 혹은 남에게 밝히기 부끄러운 자신의 단점과 약점을 극복하면서 아주 겸손한 태도로 이해관계가 없는 타인과 약자를 돕는 상상 속 인물이 더 위대하게 느껴졌죠.”




1 자신이 그리는 만화에 대해 마치 ‘심장’처럼 소중하며 대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만화라고 꼭 우습지만은 않다라는 것을 표현했다.
2 그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탄생한 만화 캐릭터 미니어처
3 <에토레, 소트사스 주니어 씨와 사물의 미스터리> 책 초반에 등장하는 마시모 자콘의 자전적 이야기. 지방 청년인 그가 소트사스 사무실에서 본 디자이너가 분주히 일하는 풍경을 담았다.
4 마시모 자콘이 만화적 기법으로 그린 에토레 소트사스의 초상

히어로물을 통해 이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그는 줄곧 ‘반영웅주의(anti-heroism)’를 주창해왔다. 10대 시절 펑크와 뉴웨이브 음악에 심취하면서 사회적 주제에 관심을 보이며 보다 자유롭게 독창적 사고를 하는 대담하고 솔직한 캐릭터를 갖게 된 것. 현재의 우리가 우주와 지구의 평화보다 집세와 건강 등 현실의 소소한 문제를 더 걱정하는 만큼, 이들 히어로는 통감할 만한 희망을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가치관을 반영해 커리어를 시작한 이후 히어로물을 그린 적이 없던 그가 2년 전 히어로물을 연상시키는 <에토레, 소트사스 주니어 씨와 사물의 미스터리(Ettore, Mr. Sottsass Jr. e Il Mistero Degli Oggetti)>라는 책을 출간해 베스트셀러 작가 대열에 올랐다.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의 창시자이자 이탈리아 디자인계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토레 소트사스를 영웅으로 묘사한 이 만화책으로 그는 올해 황금컴퍼스상 후보로 선정되었다. 주로 혁신적 디자인 제품과 프로젝트에 주어지는 이 상의 유구한 역사를 통해 추론하면 이 책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새로운 디자인과 창의성의 가치를 담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사실 소트사스의 작품을 다루는 이른바 ‘정보 소개’는 자콘의 표현을 빌려 엄밀히 말하면 한 페이지 정도. 나머지는 꿈꾸는 만화가였으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있던 청년 마시모 자콘을 디자인업계로 인도한 소트사스와의 특별한 추억과 감동을 그만의 창의성을 발현한 만화적 기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내 개인적 경험에서 느낀 감동에 대한 이야기고, 내게 용기와 희망을 준 인물에 대한 책이에요. 제목과 화법 등에서 히어로물을 연상시키지만 주인공의 직업인 건축가와 디자이너는 일반적 영웅상은 아니죠. 공항을 건설하고 디자인사에 남을 입지적 제품을 디자인했지만 세상을 구했다고 할 순 없으니까요. 아티스트에게는 용기가 필요해요. 특히 비대중적이며 인기 없는 분야의 예술을 하는, 나처럼 만화에 빠진 사람은 더욱 척박한 환경에 처해 있죠. 다른 영역의 예술가보다 클라이언트에게 더많은 ‘No’를 듣게 되지만 포기하지 않을 용기, 소신 있게 길을 이어나갈 용기가 있어야 해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예술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입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재능을 하고 싶은 일에 아낌없이 쏟아부은 인물이죠. 주변의 시선에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하며 그 안에서 위대한 업적을 탄생시킨 그 집념과 용기가 놀라워요. 에토레 소트사스는 그와 유사한, 내가 만난 유일한 실존 인물이었죠. 그를 통해 엿본 열정과 도전정신이 나의 꿈을 지탱해주는 따뜻한 용기가 되어줍니다.”











양평 스튜디오에서 만난 곽철 작가. 2017 도쿄 걸스 컬렉션을 장식한 작품이 맨 왼쪽에 자리한다. 검은 드레스는 한지로 제작한 것.

“여성 히어로, 가녀린 신체에서 발산하는 초인적 힘”

봄의 길목에서 양평에 위치한 조각가 곽철의 작업실을 찾은 날, 운 좋게도 2017 도쿄 걸스 컬렉션의 주제 작품으로 선정된 그의 최신작을 만날 수 있었다. 넘실대는 긴 웨이브 머리에 선글라스, 섹시한 검은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자신감 넘치는 포즈를 취한 여인의 모습은 올해 이 행사의 테마인 ‘여성 히어로(female hero)’의 모습 그 자체였다. 다소 폐쇄적이고 내수 화랑에 집중하는 도쿄 예술계에서 한국 작가인 그가 협업을 진행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통섭의 영역이 확대되는 예술계에서 아트와 패션의 조화, 또 시대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페미니즘 혹은 당당한 여성이라는 패션쇼의 주제가 그의 작품 성격과 맞아떨어지면서 이 특별한 기회가 성사되었다. 마치 마블의 히어로처럼 역동적이면서 르네상스의 인체 조각같이 섬세하게 표현한 여인의 조각상이 작업실의 벽 중앙에 사뿐히 내려앉아 있었다.
이제 30대 중반이 된 곽철 작가는 2013년 청담동 유진갤러리에서 ‘플라스틱 신(Plastic Scene)’을 타이틀로 첫 개인전을 연 이후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며 빠르게 성장한 전도유망한 조각가다. 그의 핵심 주제는 여성 히어로. 셀레브러티를 연상시키는 완벽한 외모에 화려하게 치장한 이들은 히어로물 만화의 주인공처럼 날아오르고, 공중에 매달리고, 건물의 외벽을 연상시키는 거울에 기대어 초월적 힘을 드러낸다. 언뜻 유희적으로 느껴지지만 현대인에 대한 작가의 성찰을 엿볼 수 있다. 작가 노트에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멋진 초능력과 아름다움, 화려한 겉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내면에는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어둠이 가득한 존재가 바로 작품의 주인공이다. 내면의 고통과 슬픔을 가면 속에 감추고 살아가며, 내면과 외면의 끝없는 갈등을 보여주는 그녀는 피메일 히어로(female hero)다.”




플렉시글라스에 부착한 작품은 유리 건물 외벽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히어로의 역동적 모습을 연상시키는 한편 정교하게 표현한 인체 디테일을 보여주는 훌륭한 장치다. 에비앙 등 일상적 소비재의 로고 포장지를 의상으로 부착했다.

공업도시 창원에서 유년기와 대학 시절을 보낸 건장한 청년인 작가가 완벽하게 관리된 몸매에 최신식 패션을 걸친 여성 셀레브러티의 모습을 영웅으로 표현한 것은 꽤 의외다. 하지원, 손나은, 강소라 등 흔히 ‘여신’이라 불리며 많은 팬덤을 거느리고 있고, 젊은 여성들이 닮고 싶어 하는 워너비 스타와 그들이 입은 의상이 그의 작품 소재가 되곤 한다. 남성이 원하는 여성상이 아니라 여성이 원하는 여성상을 표현하기 위한 ‘연출’이라고 말하는 그. “슈퍼맨이 바위를 든다면 당연하고 뻔해 보이지만, 공항 패션을 입은 강소라가 슈퍼맨을 대신한다면 역설적 장치의 효과로 같은 힘도 더 강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사실 전 여성이 겉으론 연약해 보이지만 남성보다 더 똑똑하고 강인하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미학적인 부분을 여성이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조각가로서 남성보다 여성을 선호하기도 하죠.” 이러한 사고를 기반으로 그의 작품은 꾸준히 더욱 여성스럽게 진화해왔다. 초기작이 스파이더맨 같은 코스튬을 입고 있는 데 비해 일반 의복으로, 가면 대신 손과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는 설정으로 주변에서 친근하게 만날 수 있는 여성의 ‘익명성’을 보여준다. 해외 유학 경험은 없지만 해부학을 진지하게 학습하는 러시아와 중국의 조소 예술을 흠모하는 작가의 성향이 작품에 배어들어 더욱 실제 사람같이 느껴진다. 치밀한 스터디를 거쳐 르네상스 시대의 인체 조각상처럼 구현한 보디는 작은 힘줄 하나까지 놓치지 않았으며, 아슬아슬하게 비치는 시스루 블라우스와 하늘하늘 달린 태슬 장식, 반짝이는 젤 네일의 광택 같은 아주 작은 디테일도 실제 소재 이상으로 섬세하게 표현했다.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그의 하루 일과는 오로지 작업에 맞춰져 있다. 이번 도쿄 걸스 컬렉션 쇼장을 장식한 실제 인체 크기의 작품은 작년 6월에 작업을 시작해 올해 2월에야 마무리되었다. 순수 작업 시간만 놓고 본다면 꼬박 한 달이 소요되었다.
진지한 태도로 예술 작업에 매진하고 있지만 그는 동시에 예술의 태생적 한계 또한 전면적으로, 동시에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작품의 의상에 각 브랜드의 상업적 로고를 입히니 ‘협업’하기 좋은 작가로 여기기도 한다. “예술은 사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의식주 같은 요소는 아니에요. 오히려 편의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담배, 초콜릿 같은 기호식품에 가깝죠. 누군가에겐 하나의 ‘중독’ 같은 것일지라도 그것을 즐기지 않는 이에겐 쓸모가 없어요. 예술도 마찬가지로 사람의 기호와 선택에 따라 가치가 좌우돼요. 좋아해서 찾지 않는다면 필요 없는 것이 되고 말 거예요. 장인적 성격이 강한 인체 작업에 대조적 이미지를 지닌 이런 상업적 속성을 입히면 새로운 이미지가 탄생할 것 같았어요. 앤디 워홀의 작업 스타일을 차용한 것이기도 하고요.” 그의 작품 속에서 반짝이며 마치 진짜 옷인 양 보이지만 사실 이는 기호식품에서 버려진 빈 껍질을 이어 붙인 가짜다. 상표를 두르고 있지만 그것은 더 이상 그 상표의 제품이 아니다. 진짜가 아니면서 진짜인 척한다. 연약하면서 초인적 강인함을 내재한 인물, 화려하지만 껍데기로 치장한 실존 같은 허구. 반복적 반어법과 모순적 장치로 구현한 그만의 영웅상. “모든 현대인은 다 영웅처럼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자기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면서 하루하루 버티듯 살아가니까요.” 그가 만드는 오늘날 영웅의 모습은 미디어에서 또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 창에서 허구와 본질이 혼재된 채 쉴 새 없이 등장한다. 소비 사회의 명암에 가려진 현대인의 모습을 작가는 영민하게 끄집어내 지적하면서도 유쾌하고 긍정적으로 비틀어 관람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올해 말 유진갤러리에서 4년 만에 단독 개인전을 열 예정이라는 그가 이번에는 또 우리에게 어떤 위트와 놀라움을 선사할 지 기대된다.

 

에디터 이재연(jyeon@noblesse.com)
여미영(D3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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