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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6

생활의 예술

실용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도자 작품을 만드는 작가 이정미. 일상에 자연스레 스며드는 그녀의 작품은 생활의 예술이 된다.

차로 1시간 30분을 달려 경기도 안성에 있는 그녀의 작업실에 도착했다. 작업실 주변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교외의 시골 풍경이지만, 작업실 안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오래된 한옥을 개조한 작업실은 전통과 현대의 경계 어딘가에 위치해 있는데, 전통 기법을 답습하지 않고 현대적 미감을 더한 그녀의 도자 작품과도 닮은 공간이다. 마당 곳곳에 접시와 조명, 스툴이 놓여 있고, 가마가 있는 실내에는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는, 작업 중인 작품이 빼곡했다. 바깥 세계와 단절된 휴식처 같은 이곳에서 이정미 작가를 만났다.

작업실이 멋집니다. 안성에 자리 잡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예전에는 분당의 집 근처에 작업실이 있었어요. 지하 1층이라 좁고 답답한 게 불만이었죠. 그래서 새 작업실을 알아보던 중 이곳을 소개받았어요. 큰 가마를 놓을 수 있을 만큼 공간이 넓고 차로 출퇴근하기도 편해 보였죠. 무엇보다 한옥의 서까래가 마음에 들었어요. 하지만 워낙 오래된 건물이라 마루가 주저앉고 지붕에서 물이 새더라고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조금씩 개조하다 보니 지금의 모습이 됐습니다. 이곳에서 작업한지도 벌써 15년째예요.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했습니다. 언제부터 흙이라는 재료에 매력을 느낀 건가요? 고등학교 시절 미술 선생님에게 도예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생겼어요. 직접 다뤄보니 정말 매력적이더군요. 우선 자유로운 제작 방식이 마음에 들었어요. 흙은 큰 덩어리로 뭉친 다음 살을 떼어내는 식으로 작업할 수도, 반대로 작은 덩어리를 붙여가며 형체를 만들 수도 있거든요. 또 그것이 불을 만나 돌처럼 단단해지고, 유리처럼 매끈하게 성질이 변하는 것도 흥미로웠죠.

20년 넘게 도예 작업에 매진했습니다. 그간 작업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1996년 대학원을 졸업할 때만 해도 순수 미술에 가까운 작업을 했어요. 한데 제 작품을 본 많은 사람이 그걸 어떻게 ‘사용’하는지 물었어요. 당시만 해도 도예 작품엔 응당 쓰임새가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죠. 마침 신혼이라 살림에 관심이 많았고, 한동안 실용적인 공예품을 만들었어요. 그러다 2005년 통인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예술성에 집중한 ‘우물’ 시리즈와 ‘선’ 시리즈를 선보였는데 평이 좋았어요. 특히 공예비엔날레 심사위원으로 온 외국인 교수가 제 작품을 사는 걸 보고 용기를 얻었죠. 지금은 실용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작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정미 물·바람·돌>전에서 선보인 ‘바람’.




1 도자로 인물을 형상화한 ‘Man’.  2 옻칠을 통해 균일한 색을 낸 ‘Square and Apple’.   3 건축적 조형미와 실용성이 돋보이는 ‘우물’.

작품 제작 과정이 궁금합니다. 백토를 반죽하고 물레질 또는 판성형을 통해 모양을 만듭니다. 그리고 800℃로 1차 소성하고, 유약을 발라 1250℃로 2차 소성하죠. 여기까진 일반 도자기를 만드는 방법과 같아요. 하지만 제 작품엔 옻칠 과정이 추가됩니다. 우선 옻으로 기본 칠을 하고 300℃ 이하에서 한 번 더 굽습니다. 그다음 옻을 칠해 건조시키고 사포로 갈아내는 과정을 반복하죠. 원하는 색과 질감이 나올 때까지요.

도자기에 옻칠을 한다는 게 생소하게 느껴져요. 유약으로는 균일한 색을 내기 힘들어요. 어떤 색을 얻기 위해 유약의 칠 두께나 시유 상태를 조절할 수 있지만, 일정 부분은 가마에서 불이 주는 우연의 효과에 기대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종종 의도치 않은 결과물이 나오는데, 이는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 되기도 해요. 저는 포스터 물감으로 칠한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색을 내고 싶었고, 옻칠에서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그 결과는 보시는 바와 같아요. 도자에 옻을 많이 올릴수록 두께감이 생기고 단단해 보이죠. 세균 증식을 막는 효과도 있고요.

작년에 조은숙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봄·달·새>에선 우물에 비친 달그림자와 달빛의 이미지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주로 자연에서 영감을 얻나요? 자연뿐 아니라 여행을 다니고 음악을 듣고 친구와 대화하면서도 영감을 얻습니다. 이를테면 ‘우물’시리즈는 여행 중 마주한 사각형 우물에서 비롯한 작품입니다. 우물의 건축적 조형미가 아름다웠고, 가족의 행복과 건강, 화목함을 바라는 속뜻도 인상적이었어요. 또 작년 전시에선 원주형·정방형 합(盒)에 골계미를 지닌 새 모형을 올린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작업실로 날아드는 새의 모습을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린 작품이죠. 이렇게 보면 작업의 영감은 제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볼 수 있어요.

작가님의 작품은 공예와 순수 미술의 경계에 위치하는 듯합니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오브제 같다가도 쓰임새가 돋보이거든요. 실용성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만드니까요. 예컨대 ‘선’ 시리즈 중 몇몇 작품엔 구멍이 뚫려 있는데, 여기에 초를 올릴 수도, 꽃을 꽂을 수도 있어요. 얼음을 채우면 식사 내내 차가움을 유지하는 접시로 쓸 수도 있죠. 한편으로 ‘실용성’이란 작품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어떤 작품이 공간에 놓여 주변을 환기한다면, 이 역시 실용적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죠. 그래서 저는 공예와 순수 미술을 따로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저 제 작품이 사람들의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길 바라죠. 일상에서 채우지 못한 감성적인 부분을 보완하고, 그들이 생활이라는 예술을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요.

6월 29일까지 제주시에 위치한 김만덕기념관에서 개관 3주년 기획전으로 <이정미 물·바람·돌>이 열립니다. 전시명부터 제주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냅니다. 제주도를 상징하는 대표적 자연물인 돌, 바람, 물 그리고 그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전시입니다. 그중 ‘Woman’이나 ‘Man’ 같은 작품은 도자기 3~4피스를 연결해 인물의 형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거예요. 조선백자나 물항아리를 논할 때 어깨, 허리, 엉덩이 등 신체 관련 단어로 묘사하는 것에서 영감을 얻었죠. 인물 군상을 구성하는 각 피스는 분리해 따로 쓸 수 있어요. 작품 안에 조명을 넣을 수 있는 등 실용성도 고려했죠.

전시를 본 관람객이 무엇을 느끼길 바라나요? 제 작품을 본 사람들이 “이게 도자야? 철재야? 아님 가죽인가?” 하며 깜짝 놀라요. 이렇듯 흙이란 재료로 다양한 질감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또 제 작품이 제주도의 자연환경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새로이 구상 중인 작업이 있다면요? 인간 군상 작업을 어떻게 발전시킬지 생각하고 있어요.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로 진지하게 파고들 수도, 작년 전시에서 선보인 새 모형처럼 좀 더 유머러스하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시간을 두고 차차 고민해봐야죠. 

 

에디터 황제웅(hjw1070@noblesse.com)
사진 김제원(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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