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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23

교양의 미래

도서관과 기록관, 박물관 기능을 하는 라키비움이 미래 정보기관으로 꼽히고 있다. 아직은 생소한 라키비움, 어떻게 이용해야 할까?

더 게티는 소장 자료를 디지털 데이터로 저장해 디지털 아카이브를 운영한다.

소설가이자 문학 평론가인 존 버거는 저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알고 있는 것 또는 믿고 있는 것의 영향을 받는다”라고 썼다. 그는 독자들이 어떤 정보를 체득하는 과정에서 각 개인이 수동적 관객이 아닌 적극적 해석자가 되길 원했다. 즉 사소한 정보일지라도 그에 얽힌 다양한 입장을 알아야 온전히 자신만의 지식과 취향, 의견을 바로 세울 수 있다는 의미. 하지만 양질의 정보를, 그것도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듣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 이를 다방면으로 수집하는 방법을 위해 예술과 문헌 정보기관이 힘을 합치고 있다. 바로 ‘라키비움(Larchiveum)’이다.
먼저 라키비움의 탄생 배경을 살펴보자. 2008년, 미국 텍사스 주립대 메건 윈짓 교수가 인포메이션 엔지니어링과 학생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 삼아 컴퓨터 게임을 만들라는 과제를 내줬다. 마감날, 학생들은 과제를 제출하며 하나같이 불만을 터뜨렸다. “자료가 전부 흩어져 있어 찾느라 너무 힘들었어요.”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도서관, 전쟁기념관, 국가기록원 등을 누비고 다녔다. 발바닥 아프다는 학생들의 장난 섞인 투정으로 넘길 수도 있었지만, 윈짓 교수는 그러지 않았다. 문헌정보학계에 도서관(library), 기록관(archive) 그리고 박물관(museum)을 합쳐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고, 라키비움이 등장했다.
다른 서비스를 제공하는 도서관, 기록관 그리고 박물관이 복합적으로 기능해 이용자가 하나의 정보를 다양한 방식으로 접하도록 큐레이팅하는 게 라키비움의 본질이다. 이 공간이 주목받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앞선 사례처럼, 뭐든 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발품 파는 일은 어울리지 않는다. 시대의 변화도 한몫한다. 예전에는 문서와 미술 작품의 보존 방식에 차이가 있었다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고문서는 전자책으로, 미술 작품은 디지털 이미지로 변환되는 등 모든 정보가 디지털 데이터로 저장된다. 정보 관리 방법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세 기관을 합치는 일이 한결 수월해진 것. 토론하는 사람이 없는 광장을 ‘아고라’라 부를 수 없듯이, 정보기관은 사용자의 요구와 시대를 반영해야 한다. 그러기에 세계적 기관은 일찍이 이 사실을 알고 라키비움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1 국립무형유산원의 책마루.
2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의 라키비움은 오픈 전이지만, 개방형 수장고와 미술 은행에서 라키비움을 미리 체험할 수 있다.

유로피아나(Europeana)는 프랑스, 독일, 스웨덴 등 유럽 33개국 2200개 이상 문화 기관이 참여하는 디지털 도서관 프로젝트다. 문화유산, 예술품, 고문서, 논문 자료 등을 디지털화한 뒤 갤러리, 도서관, 아카이브, 박물관의 이니셜을 딴 글램(GLAM) 섹션으로 분류해 공개한다. 비슷한 맥락으로, 세계적 웹 기반 아카이브 위키피디아도 2015년부터 ‘글램-위키(GLAMWiki)’서비스를 오픈했다. 사진 아카이빙 웹사이트 게티(Getty)는 미술관 더 게티(The Getty)의 소장품과 서면 자료, 관련 서적을 디지털화해 일반에게 공개했다. 국내도 마찬가지. 방대한 자료를 갖춘 국공립기관도 라키비움을 운영하고 있거나 준비 중이다.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라키비움을 운영하는 기관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다. 이름에 걸맞게 다양한 종교, 정치, 역사 배경을 지닌 아시아의 문화 자원을 지속적으로 수집하기 위해 라키비움을 택했다. 3400평 규모의 공간에 전시실, 디지털 도서관, 기록관 등이 자리한다. 특히 서적, 영상, 디지털 음악 등 각종 자료를 구비한 라이브러리는 라키비움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2016년 국립중앙도서관은 라키비움으로 탈바꿈했고, 국립무형유산원도 ‘책마루’를 개관해 이 대열에 합류했다. 이 흐름은 미술관으로 이어진다. 최근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는 올해 11월, 2021년에는 서울시립미술관이 운영하는 평창동 미술문화복합공간(가칭)이 라키비움으로 개장할 예정이다.
한편으로는 염려되기도 한다. 도서관, 기록관 그리고 박물관은 방문객에게 제각각 다른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도서관은 예상치 못한 정보 또는 영감과 만나는 것이 근간이고, 기록관은 어떤 키워드에 대해 정확하고 밀집된 고급 정보를 제공한다. 박물관은 전시콘텐츠를 기획하고 아티스트를 연계해 관객의 경험을 확장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물론 세 기관이 가장 많이 이용되는 자료를 나누는 공공 장소라는 점에서 반드시 함께 발전하며 유지되어야 하는 공간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한데 다른 정보를 공유하던 세 기관이 합쳐지면 너무 많은 정보 사이에서 되레 길을 잃진 않을까? 단지 일상을 환기하고자 들어간 지식 공간에서 예상치 못한 방대한 정보를 만나 복잡함만 배가된다면?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최정화 아카이브 팀장은 이런 우려를 불식시켰다. “라키비움은 정보를 한정하지 않고 모든 걸 누릴 수 있기에 되레 지식을 더 쉽게 소화할 수 있다. 우리 기관을 예로 들면, 음악을 즐기고 싶다면 주제 전문관에서 음악 관련 전시를 보고 관심이 가는 음악에 대한 도서를 라이브러리에서 읽을 수 있다. 반대로 건축 서적을 읽다가 <아시아의 근현대 건축>전을 보고 전시와 연계된 워크숍에 참여할 수도 있다”라며 정보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이라고 덧붙였다. 국립무형유산원의 도레미 사무관 역시 비슷한 얘기를 했다. “지난해 라키비움 방문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40% 이상이 라키비움을 통해 국립무형 유산원을 알게 됐고 무형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고 답했다. 라키비움이란 다양한 설명으로 어려운 정보를 쉽게 풀어내 시민과 더 깊이 소통하는 공간을 지향했으니, 성공한 셈이다.” 그녀는 라키비움의 또 다른 역할을 짚어주었다. “이곳은 앉아 있기만 해도 리프레시된다. 편히 기대 누워 책을 보다 영상을 관람할 수 도 있다.”
앞서 인용한 존 버거의 문장처럼, 우리는 사전 지식 또는 믿는 것의 영향을 받아 무언가를 받아들인다. 기왕 정보를 쌓는 거, 짧은 시간에 다양한 양질의 정보를 손쉽게 얻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면에서 라키비움은 정보의 범람 속에서 궁극적인 ‘앎’의 상태에 한 발 다가서게 하는 미래 정보기관으로서 가치가 있다. 내가 소화하지 못한 정보, 단편적 정보로 미처 해소하지 못한 궁금증으로 머릿속이 복잡할 때, 어쩌면 라키비움은 두뇌에 안식을 주는 공간일지 모른다.




문화 예술 지식 전반을 폭넓게 습득할 수 있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에디터 이효정(hyojeong@noblesse.com)
박민정(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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