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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24

입지 말고 읽으세요

책장을 넘기며 만나는 패션.

지난 10월 릭 오웬스 도산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열린 북 사이닝 이벤트 현장에 놓인 릭 오웬스의 책 <레가스피>.

세상이 참 편해졌다. 백화점에 가지 않고도 가상 피팅 서비스를 통해 자유롭게 여러 브랜드의 옷을 입어볼 수 있고, 침대에 누워 휴대폰으로 베스트셀러를 읽을 수 있다. ‘편리함’을 누리는 가운데 현대인은 점차 ‘불편함’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분야를 막론한 레트로 열풍이 증명하듯, 대중은 옛 정취에 흠뻑 빠졌다. 몇 해 전부터 매 시즌 런웨이에 과거 인기를 끌던 스타일을 재현하며 복고적 감성을 불러일으킨 패션 하우스만 봐도 그렇다. 각 브랜드를 이끄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추억을 되살렸고, 하우스 아이덴티티와 역사가 담긴 서적으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최근에는 패션계의 신간 소식이 부쩍 자주 들려온다.




1 디젤의 오랜 역사를 기록한 브랜드 북 < 5D: Diesel Dream Disruption Deviation Denim >.
2 2020년 새로 추가한 루이 비통의 <시티 가이드> 서울 편.
3 네 권으로 된 루이 비통의 사진집 <패션 아이> 신간 중 하나인 포토그래퍼 슬림 에런스의 <프렌치 리비에라>.

그렇다고 해서 패션 하우스가 만든 책이 ‘아날로그 감성’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한층 다채로운 주제의 각종 패션 서적은 이전부터 줄곧 브랜드는 물론 독자에게도 뜻깊은 역할을 했다. 전위적 의상으로 마니아층이 두터운 디자이너 릭 오웬스는 얼마 전 패션 디자이너 래리 레가스피의 생애를 다룬 책 <레가스피(Legaspi)>와 포토그래퍼 대니얼 레빗의 시각으로 그간 자신의 컬렉션을 되돌아본 사진집 < Rick Owens Photographed by Danielle Levitt >을 출간해 화제를 모았다. 지난 10월에는 직접 한국을 찾아 북 사이닝 이벤트를 개최했는데, 이날 행사장은 그가 디자인한 옷을 입고 신간을 손에 든 독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읽는 행위로서 경험하는 패션이 이미 곳곳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 30개 도시를 소개한 <시티 가이드> 컬렉션, 패션 포토그래퍼 특유의 시선으로 아름다운 도시의 풍경을 포착한 사진집 <패션 아이>를 꾸준히 선보인 루이 비통도 마찬가지다. 네 권의 새로운 <패션 아이> 에디션을 출간한 데 이어, 대대적 개편을 거쳐 서울 편을 추가한 2020년 <시티 가이드> 컬렉션은 출판물 형태는 물론 모바일 앱으로도 런칭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다.




4 디올에서 포토그래퍼 피터 린드버그에게 헌장하기 위해 발간한 책 <디올/린드버그>.
5 <디올/린드버그>에 담긴 피터 린드버그의 사진 작품.

하우스가 이어온 철학을 특정 인물에 투영한 디올의 책 <디올/린드버그> 역시 흥미롭다. 2019년 9월 세상을 떠난 포토그래퍼 피터 린드버그에게 헌정한 이 책은 총 두 권으로 구성해 그가 바라본 디올의 역사와 창조성, 디올 레이디 특유의 우아함을 표현한 사진 등이 담겨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독자는 피터 린드버그의 작품을 매개로 메종이 추구하는 예술적 가치를 면밀히 탐구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한편, 브랜드의 오랜 헤리티지를 전하는 ‘이야기꾼’ 역할을 하는 책 또한 눈길을 끈다. 지난 11월 디젤이 출판사 리졸리와 협업해 출간한 < 5D: Diesel Dream Disruption Deviation Denim >은 브랜드 설립자 렌초 로소가 어릴 적 어머니의 미싱으로 제작한 데님 의상부터 현재 디젤이 탄생하기까지 이야기를 한눈에 보여준다.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법한 긴 스토리는 생생히 기록된 문장과 사진으로 모두에게 친절한 설명을 건넨다. 덕분에 독자들은 어느 전시에 초대받아 프라이빗 큐레이팅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렇듯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존하는 ‘디지로그(Digilog)’ 시대, 다시금 책을 펼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다. 책 속에 깃든 패션 하우스의 아름다운 유산을 찬찬히 둘러보고 이해하는 것. 일일이 페이지를 넘겨야 하는 수고로움 정도는 별것 아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들리는 정겨운 ‘사각사각’ 소리에 금세 잊고 말 테니.

 

에디터 박소현(angelapark@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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