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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 2021-11-11
건축가 이타미 준이 남기고 간 것
이타미 준 건축가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다. 그가 세상에 남긴 것은 무엇일까.

아버지인 건축가 이타미 준과 함께 설계한 방배동 건축사사무소 1층에서 만난 유이화 대표.
사무소 1층에서는 이타미 준의 회화 작품과 건축 스케치, 모형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올해는 건축가 이타미 준(유동룡, 1937~2011)의 10주기다. 땅의 물성으로 자연의 이치를 기록하고자 한 이 시대의 건축가 이타미 준은 재일 교포지만 평생 귀화를 거부했음에도 일본 최고 권위의 건축상 ‘무라노 도고상’을 비롯해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를 받았다. 생전 제2의 고향으로 제주를 꼽을 만큼 제주를 사랑했으며, 포도호텔과 수·풍·석뮤지엄, 방주교회 등 장소성과 역사에서 본질을 찾은 건축을 선보인 그가 2011년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세상을 등지자 사람들은 이타미 준의 건축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생각에 허망감을 느꼈다. 아버지이기 전에 친구이자 스승이었고, 동지였던 장녀 유이화 건축가에게 그 충격은 더욱 컸다. 하지만 자신이 죽으면 건축문화재단을 세우고 기념관을 만들어 신진 건축가의 등용문이자 후배 건축가들이 꿈을 키울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라던 아버지의 유언은 그녀를 슬픔에서 일어나게 했다. 유이화 건축가는 현재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하던 제주에 이타미준기념관을 짓고 있다. 지금 계획대로라면 내년 여름 즈음엔 제주 저지리 예술인마을에 기념관이 오픈할 것이다. 생전에 가까이 지낸 김창열 작가의 미술관이 세워진 곳에서 도보 2~3분 거리에 위치할 이타미준기념관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타미준건축문화재단 이사장이자 ITM유이화건축사사무소 대표인 유이화 건축가를 만나 이타미 준의 건축이 어떤 문화적 철학을 갖는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건축가로서 자세는 어떤 것인지 물었다.

제주 저지리 예술인마을에 건축 중인 이타미준기념관의 스케치와 모형 작업. 사진 제공 이타미준건축문화재단
이타미준기념관 마스터플랜을 구상한 것은 꽤 오래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10년 전 이타미 준 선생님이 타계한 뒤 바로 시작된 프로젝트인가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건축문화재단에 관한 생각을 나누긴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자택이나 지금 이 건축사사무소 사옥에 작은 기념관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정도였죠. 본격적으로 뮤지엄 구상을 한 건 아버지가 타계한 뒤의 일이에요. 이타미준건축문화재단과 건축상, 기념관 건립에 대한 이야기를 유언처럼 남기셨습니다. 진행에 관한 모든 책임이 “내 딸 유이화에게 있다”고도 하셨고요. 큰 숙제를 주고 가신 거죠.
저지리 예술인마을에 대지를 구입하고 착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첫 삽을 뜨기까지 과정이 궁금합니다. 기념관의 위치와 운영에 대해 많은 리서치를 했어요. 무엇보다 위치가 외딴곳에 떨어져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지리 예술인마을을 택한 건 아버지가 생전에 연례행사처럼 한림의 해수욕장에서 꼭 한번 해수욕을 하셨는데, 저지리가 그곳에서 가까웠기 때문이에요. ‘예술인마을’이라는 이름도 좋았고, 아버지와 가까이 지낸 김창열 작가님의 미술관도 그곳에 있어 더욱 마음이 갔죠. 그렇게 저지리의 도유지를 구입했습니다.
건립 비용 마련이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대지 구입은 사비로 할 수밖에 없었지만, 재단 후원자들 덕분에 착공할 수 있었습니다. 1차 공사 비용의 80% 정도 예산을 마련한 후 시작했고, 지금도 비용을 마련하며 공사를 이어가고 있어요.
비용이 완벽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사를 하려면 어려움이 많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영원히 지을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체력도 그렇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저질러야겠다고 생각했죠. 건립을 결정하기까지 고민과 부담이 컸는데, 시작하니 오히려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1차 공사까지 완료하고 비용을 더 마련해 부분 개관이라도 하면 되지 하는 마음이에요. 오히려 개관한 뒤 이 공간을 어떻게 운영할지가 더 고민이죠.
기념관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 예정인가요? 2층 구조로 노출 콘크리트와 제주의 돌, 나무 등을 사용하고요. 무엇보다 노출 콘크리트는 거푸집을 떼는 순간 그대로 완성이기에 현지 시공업체와 치열하게 사전 협의를 하고 있어요. 조경은 제주의 자연을 그대로 살리려 합니다. 아버지는 제주의 야생적 자연을 좋아하셨거든요. 내년 6월 개관이 목표죠.
한 인터뷰에서 “기념관은 이타미 준의 언어로 사회에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건립 후 어떤 공간으로 활용하고 싶으신지요. 아버지는 늘 후배 건축가들을 생각하셨어요. 건축계에 이바지하기 위해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셨죠. 일례로 우리나라의 건축 설계비는 여전히 턱없이 적은 금액인데요, 아버지는 당신이 계약하는 프로젝트는 가급적 국제적 설계비에 맞춰 책정하셨어요. “내가 싸게 받으면 후배들이 더 힘들어진다”고요. 특히 고급 분양 프로젝트를 그렇게 진행하셨는데, 그런 부분이 업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기념관 공간은 아버지의 이 같은 정신과 철학을 드러내는 장소가 될 거예요. 신인 건축가의 등용문이 될 전시 기획 등 여러 건축가를 위해 공간을 쓰고 싶어요. 건축 도서를 접할 수 있는 도서관이나 카페도 들어설 예정입니다.
추후 기념관 운영에 대한 마스터플랜이 있나요? 우선은 아버지의 건축 철학과 세계관을 가장 잘 아는 제가 주축이 되어 운영할 생각입니다. 제가 있는 동안 심포지엄이나 연구 논문 등을 통해 아버지의 철학을 알릴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어요. 아직도 아버지가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어떤 철학을 지녔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걸 알리는 데까지는 제가 힘을 다하고, 기념관이 자생할 수 있게 되면 그때는 다른 전문가가 뮤지엄을 운영할 수도 있겠죠.
뮤지엄에선 아이들을 위해 어린이 건축학교(이타미 준 마스터클래스)도 진행하신다고요. 현재 코로나19 때문에 온라인으로 운영하는 어린이 건축학교를 제주에서는 오프라인으로 열 생각이에요. 클래스를 위해 교실과 세미나실로 사용 가능한 다목적실을 설계했죠.
이타미 준 선생님은 생전에 어린아이들의 건축 교육에도 관심이 있으셨나요? ‘아이들’이라고 특정하진 않았지만, 현대사회의 흐름을 많이 걱정하셨어요. 건축가들이 자연과의 조화를 배제하거나 건축가들이 손의 철학 대신 컴퓨터 기술에 의존하는 부분을 우려하셨죠. 저는 그 이유를 어릴 적 입시 위주의 삶을 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때만 해도 뒷동산에서 친구들과 두꺼비집놀이를 하며 뛰어놀았으니까요. 시골 할머니 댁에 놀러 가서 캔 도라지로 할머니가 나물을 무쳐주시던 추억이 있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런 경험이 없잖아요. 당연히 누려야 할 그런 경험이 아이들에게 부족하다는 생각에 어떤 경험을 선사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이 자연과의 대화, 소통이었죠. 아버지도 “건축은 인간과 자연이 소통하는 매개체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그 철학을 토대로 건축 수업을 만들었습니다. 어린이뿐 아니라 청소년과 장년층을 위한 클래스도 마련했어요.

ITM유이화건축사사무소의 유이화 대표.
유이화(1974~)
ITM건축연구소와 ITM유이화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 2002년 이타미준건축연구소 서울사무소를 설립한 후 아버지 이타미 준의 파트너로 건축 작업을 했다. 한국건축가협회상 BEST 7(2010), 한국건축문화대상 준공건축물부문 본상(2013), IF 디자인 어워드 건축 부문 본상(2016·2018) 등을 수상했다. 이타미 준과 함께한 작품 외에도 와인타임 사옥, 발트하우스, 이노이즈 사옥, 아주좋은꿈터 등이 있다. 특히 아주좋은 꿈터는 ‘German Design Award 2019’를 수상했다.

위쪽 1982년 세운 ‘온양미술관(현 구정아트센터)’. 이타미 준이 설계한 첫 번째 한국 건축물이다. 사진 제공 이타미준건축문화재단
아래쪽 제주 서귀포에 위치한 방주교회. 이타미 준은 건축물 주변에 인공 수조를 조성해 물 위에 떠 있는 방주 느낌을 표현했다. 사진 Sato Shinichi
지난 4월에 열린 어린이 건축 수업에서는 나무에 대해 탐구했습니다. 나무의 물리적 성질을 이해하고 나무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드는 시간을 가졌는데, 수업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재료를 박스에 담아 보내주면 아이들은 건축 재료의 물성을 탐구하고 각자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창작물을 만듭니다. 우리 주변에 흙과 나무, 돌이 널려 있지만 깊이 들여다보고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 같아 뿌듯해요.
지난 6월 26일은 이타미 준 선생님의 10주기였습니다. 혹시 특별한 기념행사가 있었나요? 3년 전쯤, 제가 아버지 기일 대신 생신을 추모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어요. 그 뒤부터 매년 5월 12일 건축사무소와 재단 식구들이 아버지와 함께 지은 이 사무실에 모여 간단히 예배를 드리고 추모 영상을 감상하며 이타미 준의 건축 철학과 정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재단의 연간 계획 등을 공유하기도 하고요.
2011년, 이타미 준 선생님이 뇌출혈로 갑자기 타계하셨을 때 가족들의 충격이 컸을 것 같아요. 벌써 10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혹시 대표님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늘 옆에 계신 것 같죠. 제가 매일 출근하는 이 건축사무소가 아버지와 함께 지은 공간이라 더 그런 것 같습니다.
말씀처럼, 2007년 지어진 이 방배동 사무소는 이타미 준 선생님과 대표님의 합작품입니다. 아무래도 아버지의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날 것 같아요. 맞아요. 그래서 개발업자들이 가끔 이 동네를 보러 다니는 모습을 보면 한편으로 심란합니다. 제 입장에선 개발되면 안 되니까요. 제게 아버지는 정신적으로 큰 존재였어요. 지금도 어려운 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땐 이곳에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눕니다. 앞이 막막할 때 눈을 감고 아버지 생각을 하다 보면 그 안에 언제나 답이 있죠.
대표님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매우 가까운 딸이었습니다. 이타미 준 선생님이 많은 노력을 하셨을 것 같아요. 저도 딸을 키우다 보니 ‘아버지는 어떻게 내 눈높이에서 그 많은 이야기를 다 들어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와 저는 둘도 없는 술친구였어요. 친구에게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아버지와는 나눌 수 있었죠. 그렇다고 한없이 너그럽기만 한 분은 아니셨어요. 무척 엄하셨는데, 제가 불만을 가질 수 없었던 이유는 당신 자신에게는 더 엄격하셨기 때문이에요. 일뿐 아니라 개인 생활에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이타미 준을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대표님이 아버지와 본격적으로 파트너가 된 것은 2001년경 프랑스 국립 기메 미술관 전시 기획을 준비하면서부터였습니다. 그 외에도 포도호텔, 핀크스 비오토피아, 오펠 골프 클럽 하우스, 수·풍·석뮤지엄, 두손미술관, 방주교회 등 꼬박 10년을 아버지 옆에서 함께하셨습니다. 기념비적 작품이 이때 쏟아졌는데요, 옆에서 함께하며 대표님은 주로 어떤 역할을 하셨나요? 아버지는 “60세가 넘어 건축이 무엇인지 알았고, 70세가 넘으니 비로소 건축이 재미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제주 포도호텔 건축 이후 제주에 많은 걸작이 생겼는데, 그 시기 제가 옆에서 실무를 진행하며 대부분의 프로젝트를 컨트롤했습니다. 아버지의 로컬 파트너로 일하며 아버지가 오직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드렸어요. 그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했죠. 아버지는 건축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가 남다른 분이셨기에 저 또한 그걸 따라가다 보면 힘에 부치기도 했는데, 그만큼 보람이 있었죠.
아버지와 함께한 시기를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건축사사무소를 개소한 지 20년이 지나니 이제야 건축이 무엇인지 보이는 부분이 있어요. ‘아, 내가 이 정도 경력과 눈을 가졌을 때 아버지와 함께했으면 좀 더 보탬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부분도 많았을 텐데 싶고요.
이타미 준 선생님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단어는 겸손, 절제, 소박함 등입니다. 대표님은 아버지의 성향 중 어떤 부분을 닮으셨나요? 잘 타협하지 않고 고집스러운 성격이 있는데, 그 부분을 닮았어요. 그리고 세상 물정에 대한 셈법이 일반 사람과 다른 것도 비슷해요. 아무리 억만금을 준다 해도 내 건축 철학과 맞지 않으면 하지 않는 부분이요.
큰돈이 되지만 하지 않는 프로젝트라··· 어떤 것이 있나요? 주로 개발 위주의 아파트 프로젝트죠. 건축가의 철학과 영혼이 크게 투영되지 않고, 오직 머니메이킹을 위한 일이요. 건축이라는 게 한 달짜리 용역은 없어요. 수개월에서 수년을 끌고 가야 하는데, 그런 프로젝트를 맡으면 정작 중요한 다른 프로젝트를 할 수 없기에 그런 개발 사업을 진행하기는 어렵습니다. 돈은 부족할지언정 품위를 지킨 아버지의 이름을 지켜야 하는 것이 제 몫이기에 저 또한 그 부분에 대해 엄격한 편이에요. 스스로 그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켜줄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요.
이타미 준 선생님은 유이화 대표님이 건축가의 길을 선택한 걸 처음에는 많이 반대하셨습니다. 곱게 키워 이화여대에 보내 좋은 남자와 결혼시켜 평탄한 주부가 되길 바라셨다고요. 제 이름도 이화여자대학교의 이름을 본떠 유이화라고 지을 정도로 의지가 강하셨어요. 그 와중에 제 나름대로 반항한 것이 제 이름의 영문을 이화여대의 이화(Ewha)가 아닌 ‘Ehwa’로 쓴 거죠.(웃음)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건축 현장에 많이 다니면서 일찌감치 건축과로 마음을 결정했는데 아버지 뜻에 따라 이화여대로 진학해야 했고, 거기엔 건축과가 없어 장식미술학과 실내 환경 디자인을 전공했어요. 아버지도 실내 디자인 전공엔 찬성하셨어요. 그 후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 건축과에 진학할 때 반대하신 거죠. 여자가 하기엔 힘들다는 게 이유였고요. 하지만 제가 뉴욕으로 유학을 가자 유학 기간 동안 누구보다 저를 응원해 주셨습니다.

왼쪽 이타미 준이 설계한 제주의 풍 박물관. 사진 Sato Shinichi
오른쪽 아주그룹 설립자인 고 문태식 명예회장의 뜻에 따라 지역 사회의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아주좋은꿈터’. 유이화 대표의 작품. 사진 김재윤
이화여대 졸업 후 다시 건축을 전공해야겠다고 생각하신 이유는요? 인테리어 공부를 할수록 역시 건축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계와 벽이 느껴졌거든요. 갇혀 있는 느낌이 들었죠.
건축과 인테리어를 함께 전공한 점이 여느 건축가에 비해 장점으로 작용할 것 같아요. 그런 점이 부각된 작품이 있을까요? 아주복지재단에서 아주그룹 초대 회장님의 생가 자리에 결손가정 어린이들을 위해 공부방을 만드는 ‘아주좋은꿈터’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그 안에서 법적으로 지정된 계단의 폭을 지키다 보니 계단 면적의 비중이 꽤 높았어요. 저희는 그 설계를 ‘잘 짠 가구 안에 들어간다’는 생각으로 풀었어요. 인테리어적 사고로 건축을 푼 경우인데, 작은 공간에 책을 한 권이라도 더 꽂기 위해 계단을 주변으로 돌리면서 계단 자체를 서재로 만들었죠. 접근의 시작은 인테리어였지만, 아주 미세하게 가구를 보는 스케일을 통해 결과적으로 건축을 이끌어낸 셈이죠. 그 과정을 인정받아 독일에서 상도 받았습니다. 포도호텔 또한 아버지가 인테리어적으로 시작해서 건축으로 확장된 경우예요. 거시적 뷰에서는 포도 모양 건축이 나왔지만, 마이크로한 인테리어적 뷰에서의 포도호텔은 각 클러스터 사이에 작은 창을 두면서 안에서 밖으로 확장되는 프레임이죠. 틈새 공간 연출까지 치밀하게 생각하며 설계한 거였어요. 인테리어와 건축의 경계가 없는 아버지와 일한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평창동에 설계한 타운하우스 오보에힐스 경우 테이블, 벽지, 문고리, 조명 등의 소품을 대표님이 직접 디자인하셨습니다. 이타미 준 선생님도 생전에 가구를 디자인하셨다고 들었어요. 아버지도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데뷔하셨어요. 지금 이 의자도 아버지가 디자인하신 거죠. 아버지뿐 아니라 프랭크 게리나 안도 다다오 등 세계적 건축가들이 자신만의 공간에 자기 디자인을 채우고 싶은 건 당연한 욕구입니다. 건축이라는 것은 밖에서부터 안으로, 때론 안에서부터 밖으로 확장되어야 하기에 소품과 연결되지 않을 수가 없죠.
건축은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것이 숙명입니다. 대부분 사유재산이라 건축가가 건물의 사후 관리나 레노베이션에 참여하기 어렵다는 점도 건축가 입장에선 안타까울 것 같아요. 좋은 건축 작품일수록 건축에 담긴 정신을 이어가고자 하는 클라이언트의 노력이 필요한데, 이 부분은 어떤가요?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클라이언트가 철학을 가지고 관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많이 봅니다. ‘레노베이션했다’는 연락을 받고 가서 보니 원목 위에 시트지를 붙여놓은 일도 있었죠.
이타미 준 선생님은 이우환·김창열 작가와 교류하며 여러 페인팅 작품을 남기셨고, 서예·음악 그리고 골동품 수집까지 늘 예술과 함께하셨습니다. 대표님도 이런 영향을 받으셨나요? 저는 아버지만큼 여러 예술 분야에 뛰어나지 않아요. 아버지에 비해 건축이나 공간에 대한 흥미에 더 집중된 것 같습니다. 아버지를 닮은 건 술과 음악,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정도? 하지만 그 또한 아버지처럼 직접 곡을 쓰거나 시를 짓는 능력은 없죠. 아버지는 건축가라기보다 뼛속까지 예술가에 가까운 분이셨습니다.
시대가 인정하는 예술가 앞에는 대부분 ‘국적을 떠나 세계적 예술성을 지닌’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프랑스 정부가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를 수여하면서 이타미 준 선생님을 지칭한 말이기도 하고요. 이 ‘세계적 예술성’을 지니기 위해 갖춰야 할 능력은 뭐라고 보세요? 아버지는 세계적 건축가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분이세요. 프로젝트가 작든 크든, 임하는 자세가 남다르셨거든요. 항상 죽을 각오로 일하셨죠. “현장에서 쓰러져도 나는 괜찮다” 하시며 당신의 모든 걸 쏟았어요. 작은 주택 하나를 지어도 모두 당신 자식이라고 생각하며 혼을 담으셨죠. 타협이라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가끔 시공 회사와 극한의 충돌로 가는 경우도 있었죠.
극한의 충돌이란 뭘 의미하나요? 설계대로 시공되지 않으면 부숴야 하잖아요. 아버지는 시공한 건물 일부를 부순 경우도 많았어요. 가끔 시공 회사에서 설계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매번 싸워서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셨죠. 작품을 두고 절대 포기와 타협이라는 것이 없던 분이에요.
이타미 준 선생님은 ‘마지막 남은 손의 건축가’라고 스스로를 칭하며 컴퓨터 설계를 배제하고 아날로그 드로잉에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셨습니다. 저서를 통해 드로잉의 중요성에 관해 끊임없이 강조하셨고요.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는 건축가로서, 손의 건축이 갖는 힘은 무엇이라고 보세요? 저는 ‘믿음’이라고 생각해요. 드로잉, 모델링 등 손으로 하는 건축은 혼을 담는 과정인 것 같아요. 손에 의해 창작된 스케치가 발전해 모형이 되고 그게 결과물로 이어지잖아요. 손으로 만지고 다듬고 빚는 과정 없이 좋은 건축물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건축은 기성품이 아니잖아요. 건축 하나하나에 혼을 담기 위해선 과정에서의 치열한 고민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손을 통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받아본 최고 칭찬은 무엇인가요? 아버지와 함께 일할 때 가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 딸 맞다.” 아버지가 보시기에 저 또한 이타미 준의 언어를 가지고 건축하는 모습을 보신 것 같아요. 그럴 때면 늘 “넌 어쩔 수 없이 내 딸이다!”라고 하셨죠.

1985년 이타미 준이 시코쿠 가가와현에 설계한 ‘조각가의 스튜디오’.

2011년 타계한 건축가 이타미 준. 사진 제공 이타미준건축문화재단
이타미 준(1937~2011)
재일 교포지만 귀화하지 않고 평생 한국인으로 산 이 시대의 건축가이자 예술가. 조형의 순수성과 물성의 본질을 탐구해온 그는, 대부분 일본인에게 수여되던 일본 최고 권위의 ‘무라노 도고상’ 수상, 2005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를 수상했다. 온양미술관, 학고재 화랑, 포도호텔, 핀크스 비오토피아, 수·풍·석뮤지엄, 방주교회 등을 설계했고 2003년 파리 기메 미술관 개인전과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회고전에서 그의 예술 세계가 깊이 있게 조명되었다.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사진 안지섭(인물)
사진 제공 ITM유이화건축사사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