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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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03

소리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

그레이코드 지인이 제안하는 '듣는 미술'의 매력.

그레이코드(왼쪽)와 지인(오른쪽).

그레이코드 지인
그레이코드(조태복)와 지인(정진희)은 각각 전자음악 작곡가로 사운드-미디어 아티스트 그룹으로도 활동한다. 2016년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첫 공동 작품 ‘#include red’를 발표한 후 스페인 마다탁 페스티벌, 체코 런치밋 페스티벌, 프라하 국립미술관, 베를린 한국문화원, 세종문화회관 등에서 전시와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2018년 한국인 최초로 독일 예술과 매체기술센터(ZKM)와 남서독일방송(SWR)이 주관한 ‘기가헤르츠 어워드’ 작품상을 받은 이들은 최근 젠틀몬스터와 함께한 아트 컬래버레이션을 마쳤고, 월간 음악 발표 프로젝트 ‘musing forest’를 통해 작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3x10^8m/s, beyond the light velocity’ (2017~2018)의 비주얼. 우주의 질량 구름을 연상시킨다.)

몽클레르의 아이코닉 아이템을 각자의 개성으로 무장한 디자이너들이 재탄생시키는 지니어스 프로젝트. 올해는 아이웨어 브랜드 젠틀몬스터가 한국 대표로 참여, 지난 9월 온라인으로 진행한 ‘몽클레르 지니어스-젠틀몬스터 쇼’에서 ‘스와이프(Swipe)’라는 주제로 제작한 선글라스와 의류를 선보였다. 그런데 웬걸, 에디터의 눈에는 제품보다 그것을 소개하는 방식이 더 흥미로웠다. 거대한 설치 작품이 등장했는데, 현실과 디지털 세계를 오가는 모션을 표현한 스크린의 움직임에 전자음을 곁들였다. 아니, 오히려 사운드가 주인공이었다. 가스버너를 켜는 듯한 소리, UFO가 비행하는 것 같은 소리 등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사운드는 브랜드의 철학을 전하는 생생한 목소리가 됐다. 단순한 패션쇼를 넘어 미디어 아트로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주인공은 전자음악 작곡가 그레이코드(GRAYCODE), 지인(jiiiiin). 장르 간 경계를 넘어 ‘듣는 미술’의 매력을 알려준 두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최근 이슈인 몽클레르 지니어스-젠틀몬스터 쇼에 대해 먼저 묻고 싶습니다. 그간 아트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한 브랜드와 작가는 많지만, 이렇게 성공적이라 느낀 프로젝트는 몇 없거든요. 그레이코드 지인의 첫 아트 컬래버레이션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인상적입니다.
그레이코드: 보통 1년에 하나의 작업을 발표하는데, 지난 1월 15일부터 3월 5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Data Composition]전을 위해 작년 여름부터 온 힘을 쏟았습니다. 전시가 끝나고도 바쁜 시간을 보냈죠. 전시 기간에 모은 관람객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운드 작품과 책자를 만드는 후반 작업을 7월에야 마무리했거든요. 재정비 시간을 가지려던 차에 젠틀몬스터가 협업을 제안했습니다. 그간 브랜드의 협업 제안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홍보 목적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진행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젠틀몬스터는 진짜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지인: 젠틀몬스터 팀과 기반부터 쌓아 올린다는 생각으로 작업했어요. 컬래버레이션의 특성상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음에도 저희가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해줬고, 오롯이 작품을 만든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쇼를 위해 정말 많은 사람의 시간이 투입된다는 사실을 체감하면서 그 노력을 부각하고자 했습니다. 쇼에서 선보인 사운드-미디어 설치 작품 ‘Swipe’는 구조물 위에 달린 스크린 16개가 터치스크린을 쓸어 넘기듯 움직이는데, 이것을 조명처럼 활용해 제품이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했죠. 패션이 또 하나의 예술임을 새삼스레 깨닫는, 또 그간의 작업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흥미로운 작업이었습니다.
비주얼도 좋았지만 사운드 경험이 압도적이어서 이전 작품을 다시 살피게 됐어요. 한데 작품을 보고 들을수록 제가 아는 전자음악이 맞나 의문이 들더라고요. 디스코, 테크노 등을 전자음악으로 생각해와서 그런지 그레이코드 지인의 음악은 ‘소리’에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지인: 저희가 전자음악에 매력을 느낀 이유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피아노를 보면 ‘도’와 다음 ‘도’ 사이 한 옥타브가 12개 음으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에선 연주자의 역량에 따라 미분 음정으로 좀 더 세세하게 소리를 컨트롤할 수 있고요. 그런데 전자음악에서는 음과 음 사이를 몇백만 분의 일 단위로 쪼갤 수 있습니다. 이런 유연함은 저희로 하여금 음악이란 카테고리를 조금 더 넓은 개념으로 바라보고 접근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레이코드: 디스코나 테크노 같은 장르는 심장박동 같은 비트가 있어 본능적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클래식처럼 멜로디가 있는 장르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접해온 것이고요. 그에 비하면 저희 전자음악은 단번에 캐치하긴 어렵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음악은 소리의 긴장과 이완으로 이루어지거든요. 베토벤을 비롯한 작곡가들이 화성학이라는 규칙을 가지고 교향곡을 썼다면, 저희는 소리 자체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풀어주는 방식으로 음악을 만듭니다. 결국 익숙함의 차이인데, 최근 <인터스텔라>나 <덩케르크>의 영화음악이 연상된다는 피드백을 받고 있어 인식이 조금씩 바뀐다는 걸 느낍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Data Composition]전에서 선보인 동명의 작품. ⓒ GRAYCODE, jiiiiin
Photo by Junyong Cho





‘Data Composition’ 작품의 일부로 발간한 책자. ⓒ GRAYCODE, jiiiiin

이런 전자음악을 어떻게 만드는지도 궁금합니다. 오선지 악보에는 그레이코드 지인의 음악을 담을 수 없을 것 같아서요.
그레이코드: 피아노로 곡을 쓰진 않습니다. 대신 피아노 같은 ‘악기’를 제작하죠. 여기서 악기는 ‘Swipe’처럼 물리적 형태를 띤 것일 수도 있고, 특정 데이터값에 따라 소리가 나도록 만든 프로그램일 수도 있어요. 이렇게 만든 곡을 오선지에 옮기긴 어렵죠. 하지만 악보(작곡법)는 작업의 개념에서 아주 중요해요. 실제로 신작 ‘Data Composition’(2021)의 일부로 발간한 책자엔 작곡법을 기재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연주하긴 어렵지만, 저희가 만든 음악을 기록하는 게 작곡가로서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능으로서 악보가 아니라, 기록으로서 악보인 거죠.
지인: 작곡법을 정하면 변용은 비교적 자유로운 편입니다. ‘빨간색은 무슨 소리일까?’라는 궁금증에서 출발한 첫 작품 ‘#include red’(2016~2018)의 경우 처음엔 전시 형태로 선보였어요. 2017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선보인 동명의 작품은 건물 외부에서 공연 형식으로 소개했죠. 작품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리서치를 거쳐 작곡의 컨셉과 규칙을 정하고, 음악적 시스템을 확립한 후 이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순서로 작업합니다.
‘10^-33cm’(2018~2019)는 양자 중력이 나타날 수 있는 최소 공간인 플랑크 길이에서 들리는 사운드를 상상하며 만든 작품입니다. ‘Time in Ignorance’(2020)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던 시간을 상기시켰고요. 작품별로 아이디어가 독특해서 어디서 영감을 얻는지 궁금했습니다.
지인: 작업을 위한 아이디어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include red’가 ‘우리가 사는 이 땅, 이 중력에 사는 우리가 뭘 감각하는 거야?’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면, 이듬해에 선보인 ‘+3x10^8m/s, beyond the light velocity’(2017~2018)는 그 물음을 지구 너머로 확산했죠. 여기서 작품명의 공식은 빛의 속도를 나타냅니다. 이어진 작품이 ‘10^-33cm’인데, 앞서 거시적 세계를 탐구했으니 미시적 영역에 주목한 겁니다.
그레이코드: 음악이 현상적인 것이다 보니 리서치를 진행하며 과학 이론을 마주하는 경우가 많아요. 작품에서 이런 개념을 직접 설명하진 않지만, 영감을 얻는 부분이 분명히 있죠. 라이브 퍼포먼스 작품 ‘e^ix, it’s necessary’(2019)의 제목은 임의의 한 점을 가리키는 오일러 공식에서 가져왔습니다. ZKM 커미션 작품으로 당시 주제가 인공지능(AI)이었는데, 찰나의 순간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일을 처리하는 AI를 보고 ‘그들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다르구나. 그렇다면 짧은 시간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지혜를 찾아내는 과정을 작품으로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겁니다.
설명을 들으니 작품명이 어려운 게 이해가 됩니다. 한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 어려운 것 아닌가요?(웃음)
그레이코드: 일부러 어렵게 보이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말이죠.(웃음) 다만 저희가 생각하는 현상을 규정하는 표현이 있는데, 굳이 그걸 피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디서 들은 얘기로 한 과학자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과학 강연을 다닌 적이 있는데, 가는 곳마다 쉽게 설명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처음엔 쉽게만 풀어내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공식을 칠판에 쓰고 강연을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게 그가 아는 진리고 사실이니까요. 작업에 몰입할수록 하나의 공식에 시처럼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걸 느꼈고, 그래서 읽기 어려운 제목이 붙는 경우가 많았어요.
지인: 한편으로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맞춰 작업하면서 관람객과의 소통에 대해 고민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후엔 ‘Love’처럼 직관적으로 와 닿는 제목을 붙이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비단 작품명뿐 아니라 작품을 경험하는 측면에서도 새로운 방식을 찾고 있어요.





2017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선보인 ‘#include red’의 공연 버전. ⓒ GRAYCODE, jiiiiin





몽클레르 지니어스-젠틀몬스터 쇼를 장식한 사운드-미디어 설치 작품 ‘Swipe’. 사진 제공 젠틀몬스터

지난 6월부터 매달 그레이코드 지인 유튜브 채널에 ‘musing forest’(2021~)라는 곡을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이게 변화의 시작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목처럼 사색에 어울리는 전자음악이 흘러나오는데, 기존 작품보다 감상하기도 한결 편하더라고요.
지인: 맞아요. 그 작업을 시작한 이유를 말씀드리면, 먼 과거에는 아름다운 감정을 유발하는 조합으로만 작곡하게 했어요. 불협화음, 예를 들어 ‘도’와 ‘파#’의 조합(증4도)은 사용을 금지했죠. 반면 저희가 작곡을 배울 때에는 정반대 분위기였습니다. ‘옛날에는 증4도를 못 쓰게 했대. 웃기지 않니? 증4도만 써!’ 같은. 저희도 비슷한 생각으로 음악을 만들었고, 현재의 작업으로 이어졌지만, 어느 순간 감상으로서의 음악을 도외시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레이코드: 한 달에 한 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주제에 맞춰 곡을 만들고 있습니다. 큰 의미를 두기보다는 저희와 주변 사람들이 편하게 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1년 정도 지속하는 것이 목표인데, 어떤 형태로 발전할지는 더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공연 형식으로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앞으로 작업도 기대됩니다. 그레이코드 지인의 작품을 보러 온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감상하길 바라나요?
지인: 기자님은 몽클레르 지니어스-젠틀몬스터 쇼를 보고 어떠셨어요?
글쎄요, 몸을 감싸는 사운드 경험이 황홀했습니다. 고조되는 음악에 따라 심장이 뛰는 느낌도 받았고요.
지인: 그것이 추구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평소 대화를 나누며 듣는 소리가 아니라, 몸을 둘러싼 공기를 통해 감각적으로 소리를 경험하는 첫 번째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처음부터 어떤 이론이나 개념적인 것으로 관람객을 현혹하고 싶지는 않아요. 작품을 느끼고 흥미가 생겼다면, 그다음에 자세한 내용을 찾아보면 충분합니다. 아마 이 인터뷰를 보실 수도 있겠죠?
작가로서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 물으며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그레이코드: ‘목표한다’라는 동사형이 적절할 것 같아요.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상태에 놓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꼭 근사한 곳에서 전시할 필요는 없어요. 작업을 이어간 자리에 나름의 성과가 놓여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에디터 황제웅(jewoong@noblesse.com)
사진 안지섭(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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