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마에스트로 유현준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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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5-26

공간의 마에스트로 유현준

유현준은 말한다. 공간의 가치는 사용자의 의식 속에서 결정된다고.

“공간은 실질적 물리량이 아닌 기억의 총합이다.” 건축가이자 홍익대학교 교수인 유현준의 어록(?) 중 하나다. 작은 방일지라도 동선을 여러 갈래로 구성한다든지, 창문 너머 풍경이 빛의 움직임에 따라 바뀐다든지, 누군가와의 추억이 많으면 우리의 인식 체계는 공간을 실제보다 더 크게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곰곰이 지난날을 생각해본다. 두 평 남짓한 공간에 네 명이 옹기종기 모여 매일 밤을 지새울 때와 열 평짜리 방에서 혼자 지낼 때를 비교해보니 전자의 기억이 가슴을 간지럽힌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려본다. 여건상 항상 블라인드를 내려야 하는 이곳 환경이 아쉽기만 하다. 건너편 아파트 외벽이 아닌,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머리와 가슴에 쉼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위쪽 유현준이 설계한 발코니가 있는 아파트 ‘아페르 한강’ 야경 투시도. ⓒHyunjoon Yoo Architects
아래쪽 건축사사무소 5층에 만든 유현준의 개인 공간. 일종의 ‘맨 케이브(man cave. 남자들이 자신만을 위해 만든 공간)’다.

나를 표현하는 한 단어, 건축
이렇게 단순한 진리를 이제야 깨닫다니, 공간을 지배하는 유현준 어록에 유레카를 외쳐본다. 쉬운 단어로 사유의 시간을 제공하는 그의 말에선 오랜 공력이 느껴져 타고난 건축가일 것 같지만, 의외로 건축은 여러 선택지 중 가장 마지막 순위였다. 유현준은 유년 시절부터 정확한 답이 존재하는 수학이 아닌, 물리·미술·지구과학·지리처럼 스스로 생각한 내용을 자유로운 시각으로 제시하는 과목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성격상 시간에 쫓기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수학은 60분 안에 25문제를 풀어야 하는 압박감이 있는데, 미술은 마감이 몇 달에 한 번밖에 없잖아요? 제가 시간 제한이 있는 입시 미술을 해본 적이 없어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 대학에 지원할 때만 해도 건축공학과가 무엇을 배우는 곳인지 몰랐어요. 외우는 걸 싫어하니까 고시와는 거리가 멀 테니 문과 제외, 수학을 싫어하니까 의대도 제외. 그러던 중 제가 좋아하는 물리와 미술의 교집합을 고민해보니 건축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렇다고 건축에 바로 매료된 것도 아니었다. 공업 수학, 화학 등을 배우는 1학년 때는 흥미를 못 느끼다 전공과목을 공부하기 시작한 2학년이 돼서야 열심히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졸업 작품을 준비할 때는 2주 넘게 씻지 못할 정도로 건축과 동고동락했다. 이때 탄생한 ‘배움과 사색의 공간(Analog v. Digital)’은 1991년 ‘제10회 건축대전’에서 특선을 받았다. 노력에 즐김이 더해져 탄생한 결과물이었다. 건축가도 본인 작품 제목을 따라가는 것일까? 평소 배움과 사색을 즐기는 듯한 유현준을 보노라면 어떤 질문을 던져도 유려하게 답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현재 그는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경제·문화·사회·정치적 식견을 거침없이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 기울인다.
“건축의 가장 큰 장점은 나를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타 전공에선 학생들이 선생님 말씀을 들어야만 하잖아요. 건축은 정반대예요. 내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선 나름의 논리를 만들어야 하거든요. 건축 수업을 참관하게 된다면 놀라실걸요? 학생들은 떠들고, 선생님은 그 말을 듣고 있으니까요. 대학교 때 물리학자 프리초프 카프라가 쓴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을 읽고 충격을 받은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책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물리학과 동양철학은 비슷하다’가 될 거예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22개 과목을 배웠는데, 이들의 뿌리가 같다고 하니 고정관념이 깨질 수밖에요. 그날 이후 특정 상황과 마주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가지치기를 하는 편입니다. 다른 분야와의 연관성을 찾아보려고요. 마지막으로 배움과 사색을 즐겨 한다기보다는, 제가 비전문가가 이해하는 수준으로 글을 쓰고 강연을 해서 많은 분이 저를 좋아해주는 것 같습니다. 요즘 세상은 어려운 걸 그리 선호하지 않으니까요.”
유현준을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게 있으니, MIT와 하버드다. 한 곳에 들어가는 것도 힘든 일인데, 두 학교의 석사 졸업장을 갖고 있으니 대단할밖에. 한 인터뷰에서 그는 학벌 때문에 회사에서 가슴앓이가 심했던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유학을 결심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웃픈’ 사연이 있다. 유학을 준비하던 시절 MIT와 하버드에 동시에 지원했건만 MIT에서만 합격 통지서를 받은 것이다. 알고 보니 하버드에 지원하면서 토플과 GRE 점수를 건축(architecture)이 아닌 예술(art) 부서로 보낸 탓이었다. 원래는 하버드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당시 그는 MIT에 간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MIT에서 공부할 때 하버드에서 온 친구들이 있었어요. 같이 지내다 보니 제가 더 낫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영어는 조금 부족하더라도 그림 그리고 모형 만드는 일은 꿀릴 게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죠.(웃음) 그래서 하버드에 다시 도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만약 하버드에 합격하지 못했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입니다. 미국 건축계의 성골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보니 모두 하버드-MIT를 거쳤더라고요. 그런데 저 길을 따라가지 못한다? 확신이 들지 않았을 거예요. 하버드에 합격하니까 그제야 제게 건축을 할 만한 재능이 있다고 믿게 되더군요.”





건축사사무소 2층에 만든 갤러리 ‘Plate2Place’. 개관전으로 큐레이터의 아뜰리에가 기획한 <페넬로페의 직조>전이 6월 4일까지 진행 중이다.

소통, 관계, 공감
하버드 졸업 후 유현준은 세계적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Richard Meier) 스튜디오에서 일하게 된다. 본디 안도 다다오(Ando Tadao)를 좋아해서 마이어를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친한 형이 본인 작업과 스튜디오의 방향성이 잘 맞을 것 같다고 추천해 지원하게 됐다. 리처드 마이어와 일하면서 그는 ‘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사회의 관계, 사람과 자연의 관계 등을 건축에 어떻게 녹여낼지 고민했다. 그래서일까. 그가 설계한 아페르 한강, 툇마루 하우스 같은 건축물을 보면 소통과 순환을 중요시한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더불어 공간과 공간 ‘사이’를 강조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가벽 대신 슬라이딩 도어를 설치해 순환식 공간을 만든다든지, 발코니에서 가족들이 서로 쳐다볼 수 있도록 사방을 트이게 만든다든지 등.
“어릴 때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어요. 고모가 자주 놀러 왔고, 언젠가는 외삼촌이 와서 산 적도 있습니다. 고부 갈등을 직접 보기도 했어요. 어린 나이에 사람들 간 관계가 미묘하다는 걸 깨달았죠. 이러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건축에 녹아든 것 같습니다. 설계할 때마다 이 공간에 살면 사람들이 어떤 마음일지 항상 상상해봅니다.”
하지만 단절이 일상화된 현대인의 삶에서 유현준의 건축이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타워형이든 판상형이든 아파트는 단절 그 자체고, 최근엔 발코니 확장이 필수인지라 공간 사용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집에 네 명이 살아도 각자 방문을 닫고 지내는 것이 현실 아니던가. 심지어 그의 말마따나 코로나19는 모여야 살 수 있던 인간 사회를 모이면 위험한 사회로 만들었다.
“크게 와닿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원하는 것과 좋은 것은 분명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창문 없는 방에선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가 스마트폰과 컴퓨터 모니터뿐이에요. 이를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제가 소통의 중요성을 계속 언급하는 이유예요. 맛있다고 계속 단짠만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소수의 목소리라도 할 말은 해야죠.(웃음) 발코니 확장은 나만의 공간이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점점 사용자의 선택권이 없는 건축으로 가고 있어요. 건축가의 폭력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확장해야 할 때는 자유롭게 창문을 여닫거나, 커튼을 치고 걷는 선택권을 제공해야 합니다. 건축은 한번 지으면 바꾸기 힘든 것이잖아요.”
오늘날 소통과 공간을 이야기할 때 핫이슈는 메타버스(가상공간)다. 코로나19 이후 만나는 행위가 온라인·비대면 방식으로 변화하면서 메타버스는 대안 공간으로 등장했다. 전문가 대다수는 아바타와 익명성을 거론하며 메타버스의 장점으로 경계와 제약을 허문 자유로운 소통을 꼽는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면 메타버스의 장점이 되레 사람들을 단절시킬 가능성도 있다. 결국 아바타라는 것은 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메타버스는 제한적 공간입니다. 메타버스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감각은 오감 중 고작 시각과 청각 정도예요. 물리적 공간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우리는 상대를 인격적으로 대하지만, 아바타 세상에선 과연 인격적으로 대할 수 있을까요? 그게 가능했다면 인터넷 댓글 문제가 대두되지 않았겠지요. 우리는 수천 년의 문명을 지나오면서 알게 모르게 예의범절을 학습했습니다. 그런데 메타버스 안에는 아직 사회적·윤리적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지 않아요. 길게 볼 때 메타버스는 실명제로 가야 합니다. 최소한 아바타의 주인이 누구인지, 이곳에서 무슨 활동을 했는지는 공개돼야죠. 책임 없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얼마 전 유현준은 건축사사무소 2층에 갤러리 ‘Plate2Place’를 오픈했다. 그동안 그가 건축주를 위해 공간을 구성했다면, 이번에는 자신과 사무실 직원들을 위해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곳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채워야 할 공간’이다. 전시로 시작했으나 향후 북 토크를 진행할 수도, 온전히 쉬는 공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한 점 한 가지는, 유현준은 이곳이 소통의 장이 되길 바란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건축사사무소 직원들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만나 대화를 나누며 다가올 삶에 건강한 자극이 되길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다. 이렇게 모두의 멋진 미래를 바라보는 유현준이 그리는 진정한 공간이란 무엇일까. 그의 대답은 동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강렬한 공명을 남긴다.
“우리가 경험하고 사유한 것이 곧 공간이 됩니다. 공간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각자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봤으면 해요. 사람도 가려 사귀고, 음식도 가려 먹으면서 공간은 왜 등한시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공간에 제약을 받는 존재잖아요. 나를 행복하게 하는 공간을 찾았으면 해요. 꼭 트렌디하고 고가일 필요는 없습니다. 공간은 건축가가 만들지만, 그 가치는 사용하는 사람들이 결정하거든요.”

 

에디터 박이현(hyonism@noblesse.com)
사진 김제원(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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