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 이후의 판타지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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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13

쉼표 이후의 판타지

잠정적 휴업에 돌입한 덕분에 청정 자연을 되찾은 전 세계 휴양지. 여행과 관계가 깊은 이들에게 색다른 휴양지 네 곳의 이야기를 들었다.

쾌락의 땅, 푼타카나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먹고, 마시고, 쉬고, 놀며 도파민에 흠뻑 취했던 시절이 있다. 도미니카공화국 동쪽 끝 푼타카나 해안에서 보낸 며칠이었다. 그 여행의 목적은 원래 ‘취재’였다. 우리를 초청한 하드록 호텔의 올인클루시브 서비스를 24시간 경험한 후, 계속 놀자니 마음이 불편해 가이드를 재촉했다. “리조트는 다 돌아봤으니 다른 데에도 가보고 싶어요. 혼자 시내를 돌아다녀도 돼요? 시티 투어 버스 있나?” 베네수엘라 출신의 비키는 바득바득 밖으로 나가려는 나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당신 앞엔 지금 카리브해가 있어요. 풀 바에선 마가리타를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고. 뭘 더 원하는 거죠?”





그 말을 들은 나는 카메라와 가책을 완전히 내려놨다. 거기서 보낸 나흘은 꽤 규칙적이었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 아침과 낮 사이 어중간한 시간에 배를 채우고, 프라이빗 비치로 불리는 해변으로 나간다. 코앞에 펼쳐진 카리브해, 짙푸른 태평양에 우유를 들이부은 것 같은 아름다운 물색과 빛무리를 눈에 실컷 담은 후 풀 바로 간다. 항아리만 한 잔에 꾹꾹 눌러 담은 마가리타를 들고 선베드에 자리를 잡은 뒤 책을 읽다 알코올 한 모금, 중미 청춘의 뜨겁고 아름다운 몸을 구경하다 두 모금, 그러다 깜박 낮잠에 빠지는 것이 해가 떠 있을 때 보낸 일과다. 게으름이 지겨워질 땐 요트를 탔다. 캅카나의 마리나로 가면 카리브해를 가르며 달리는 요트가 뜬다. 크루들이 따라주는 샴페인에 적당히 취할 즈음 라틴 댄스의 한 장르인 메렝게 음악이 배 안을 휘감고, 사람들이 갑자기 격정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구경은 허용되지 않으며 배 위의 누구나 다 같이 춰야 끝나는 춤. 땀에 흠뻑 젖은 몸은 수심이 허리께밖에 안 되는 바다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식힌다. 하루쯤 시내로 나가도 좋다. 관광객은 대부분 파라마운트픽처사의 세트 디자이너 찰스 블루돈이 만든 중세 마을 알토스데차본으로 향한다. 마이클 잭슨과 리사 마리 프레슬리가 결혼식을 올린 세인트 스타니슬라우스 성당도 볼만하지만, 그 앞에서 손바느질로 만든 인형을 파는 현지 여인의 작은 노점을 구경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 질 좋기로 소문난 도미니카산 시가를 합리적 가격에 살 수 있는 시가 팩토리 투어도 인기 있다. 해가 기울고 밤이 깊어지면 가져온 옷 중 가장 근사한 것을 꺼내 입고 외출 준비를 한다. 하루는 하드록 호텔 클럽, 하루는 천연 석회석 동굴 안에 만든 클럽 이매진에서 메렝게와 바차타로 단련된 이들 사이에 슬쩍 끼어 무아지경으로 몸을 흔든다. 그 와중에도 근면이 미덕인 나라에서 나고 자란 동양인은 ‘이래도 되나?’ 멈칫하지만, 앞에 있는 얼굴들이 머뭇거리는 이방인을 행복한 표정으로 다그친다. ‘그래도 돼!’
_ 류진(<모닝캄> 수석 기자)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 네팔 히말라야



결혼하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나는 네팔 히말라야산맥에서 아내의 가장 추레한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나 역시 극히 초라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나부터 살아야 했으니까. 그래서일까. 가장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시기에 비루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하는 순간 어느새 우리는 더 끈끈한 부부가 되어 있었다. 아직도 해발 3400m 구간에서 그녀가 내뱉은 육두문자가 생생히 기억나는 걸 보면, 그날의 잔상이 꽤 진하게 남은 듯하다.





7박8일의 여정은 딱 두 가지 감정으로 나뉜다. ‘죽을 것 같다’와 ‘죽을 만큼 아름답다.’ 그 두 가지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도착한다. 죽을 것 같다가도 죽을 만큼 아름다운 마약 같은 순간에 취해, 천근만근 무거운 다리는 나도 모르게 상하 운동을 반복한다. 이게 내 다리인지, 등에 짐을 가득 실은 당나귀 다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즈음 비로소 가장 힘든 구간은 지나간다.





그럼에도 나는 최고 여행지 중 하나로 네팔 히말라야를 추천한다. 이유는 바로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 바로 인간에게 죽음이 다가왔을 때 느끼는 본능적 복종심 때문이다. 자연의 위대함에 압도되어 무한히 작아지는 나의 존재를 깨닫고 (물론 자꾸만 10도 정도 휘어지는 허리로 인해 살짝 자존심이 상한다) “제발 나를 살려주세요”라고 속삭이는 순간, 이유 모를 눈물이 벌컥 쏟아지면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조차 부끄럽지 않게 느껴진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은 한낱 먼지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을, 이 한계와 나약함을 오롯이 알게 될 때 한없이 겸손해진다. 하지만 이내 극도의 뿌듯함과 행복감을 맛본다. 이 맛에 히말라야에 오른다.
_ 홍석남(작가, 온라인 콘텐츠 창작자)





숨은 낙원, 인도 팔로렘



인도라는 나라를 떠올릴 때 눈부신 해변과 휴양지를 상상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흔히 독특한 문화와 역사 유적이 먼저 연상될 테니까. 하지만 인도 남부로 내려가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인도양의 해안선을 따라가다 보면 아름다운 해변 도시가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보수적인 북부에 비해 개방적인 서부 지역에선 힌두교에서 금기시하는 소고기부터 주류까지 모두 즐길 수 있다. 중서부 고아(Goa)주에는 유독 인상적인 해변이 많아 여행자의 숨은 낙원으로 불리는 가운데 카나코나시에 위치한 팔로렘 해변은 그중 최고로 꼽힌다. 1년 내내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것은 물론 긴 모래사장을 따라 초록색 야자수가 신기할 만큼 무성하게 들어서 있다. 야자수 주위에는 여행자를 위한 아담한 숙소와 각종 편의 시설도 밀집해 있다. 제법 먼 바다로 나가도 수심이 깊지 않아 자유로운 물놀이가 가능하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에 몸을 맡기고 인도양 위를 부유하다 보면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기 마련. 원한다면 언제든 카누와 보트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팔로렘 해변의 또 다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바닷가 여기저기서 힘차게 그물을 던지는 현지 어부들을 쫓아다니며 어떤 생선이 잡혔는지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해 질 무렵 바다 위로 쏟아지는 환상적인 노을은 덤이다.









물가도 저렴한 이곳에선 마음에 드는 해변 레스토랑에 앉아 스테이크에 음료를 곁들여도 6000원 남짓. 한 병에 단돈 1000원짜리 맥주를 손에 쥐고 선베드에 누워만 있어도 행복한 날숨이 폴폴 새어나온다. 해변 뒤로는 장기 여행자와 히피들을 위한 거리가 있다. 요가와 명상 센터, 펍과 클럽, 방갈로와 식료품점 모두 넉넉히 들어서 있다. 발품만 열심히 팔면 하루 1만 원에 근사한 숙소를 찾아 몇 날 며칠을 이 낙원에서 머물 수 있다.
_ 태원준(여행 작가)





세렝게티의 서클 오브 라이프



우리는 왜 치열하게 살까. 혹은 이런 생각. 자연에서 무위도식하며 살고 싶다. 한때 한량을 꿈꿨으나 현재 비루한 몸을 탈탈 털어가며 살고 있다. 아니 생존하고 있다. ‘내 삶의 순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생을 누리는 기쁨을 즐기고 있다. 그러니 살아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자’라는 깨달음을 세렝게티에서 얻었다.
때는 코로나19가 창궐하기 몇 해 전이다. 결혼식을 올리고 킬리만자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도시 대신 만년설로 뒤덮인 산이 보인다. 킬리만자로의 봉우리는 대부분 구름에 가려져 있는데, 전생에 덕을 쌓아야 구름이 걷히는 만년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만년설을 힐끗 보았다. 결혼생활을 축복이라도 하듯. 세렝게티 국립공원 내 호텔에서는 ‘게임 드라이브’라는 사파리 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투어는 사방이 트인 사륜구동 자동차를 타고 초원을 누빈다. 가이드는 우리에게 보고 싶은 동물이 있는지 물었다. 사자를 보여달라고 하자 운전대를 돌리며 세렝게티의 삶에 대해 설명했다. 여느 생태계가 그렇듯, 세렝게티에서도 생명은 태어나고 죽는다. 초원의 모든 종족이 종을 이어가기 위해선 먹고 먹히는 생명의 순환이라는 위대한 여정에 동참해야 한다. 이 여행 안에 삶이 있다.





동물이 살아가는 모습은 흡사 인간사와 닮았다. 초식동물은 풀이 있는 곳을 좇아 무리 지어 이동한다. 이 행렬에는 누, 얼룩말, 기린, 버펄로 등이 함께한다. 서로 다른 종족이지만 초식동물은 안다. 큰 무리에 속해야 사냥당할 확률이 줄어든다는 것을. 종족을 남기고 새끼를 키우려면 무리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새끼를 먹여 살리기 위해 사냥해야 하는 맹수의 삶도 쉽지 않아 보였다. 사자는 하루 세 번 사냥을 시도해도 한 번 성공할까 말까다. 운 좋게 잡은 사냥감마저 새끼에게 양보한다. 암컷과 새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수컷 사자의 경계는 종일 이어진다. 우리는 며칠 뒤 언덕에서 암사자 한 마리를 발견했다. 남편을 잃은 어미 사자는 새끼들을 데리고 초원의 언덕 위에 숨어 지냈다. 새로운 왕은 자신과 자신의 종족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를 제거해야 한다. 새끼 사자의 죽음은 대부분 다른 사자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것 또한 세렝게티의 숙명이다.





새끼를 키우고, 가족을 보호하고,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것. 세렝게티의 삶은 도시보다 치열하다. 초식동물은 무리에 속하기 위해, 수컷은 종을 남기기 위해, 맹수는 죽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죽음은 순리고, 살아남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나는 순리를 벗어나기 위한 힘겨운 몸짓을 하는 거라고, 야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빌딩 숲을 지나면서.
_ 조진혁(<비버콘텐츠> 대표)

 

에디터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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