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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17

그 꽃은 따뜻한지

김희경의 한지 작업에는 자연의 무한한 생명력과 현실 너머 초월의 세계가 깃들어 있다.

가을 문턱을 넘어가던 오래전 그날, 인사동 길을 걷다가 한 전시장에 들른 적이 있다. 찰나가 영원으로 깊어지는 순간은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다고 했던가. 우연히 들어간 그곳에서 잠시 마주한 조형물이 지금까지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니. 당시 양옆으로 갈라진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은, 구심력과 원심력이 조화를 이룬 꽃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은 분명 신묘했다. 이러한 첫인상의 주인공은 김희경 작가의 한지 작업이다.
김희경의 한지 작업은 맑고, 밝고, 따뜻하다. 명도와 채도가 높은 색이 주로 등장하는 것이 큰 이유겠으나, 어두운색을 칠했음에도 나타나는 은은한 먹의 농담과 번짐의 미학도 한몫한다. 덕분에 정신이 정화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을 작품에 가까이하고 호흡하면 소란스러운 공기의 움직임도 이내 고요해진다. “제 인생의 모토 역시 ‘맑게, 밝게, 따뜻하게’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물에는 영혼이 있고, 서로 교감하면 평화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음을 가슴에 새기고 있어요. 이를 바탕으로 작업에 임합니다. 한지에 일일이 풀을 먹인 다음, 줄을 만들어 이어 붙이는 행위를 여러 번 거쳐야 하나의 작품이 완성돼요. 수양과 다를 바 없죠. 무념무상 상태로 한지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오감이 맑아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아일체에 이르고자 하는 제 마음가짐이 작품에 녹아들었으니, 보는 분들도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요.”
지금은 보드라운 한지가 김희경의 시그너처라지만, 본디 그는 돌과 금속을 다루는 작가였다. 처음 김희경의 이름을 알린 작품은 ‘Soul-Tree(영혼의 나무)’. 돌과 금속을 나무 형상으로 조각한 이 작업은 인간과 자연과 신이 합일되는 모습을 그려내는 데 의의가 있다. 나무를 형상화한 건 꿋꿋한 나무가 조물주의 뜻대로 살아가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보였기 때문. 이후 작가는 꽃 이미지를 통해 자연의 생명력을 표현한 ‘Bloom(피어오르다)’을 기점으로 한지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는 현실 너머 초월의 세계를 바라보는 ‘Contemplation(관조)’으로 이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세 연작의 조형적 부분이 일맥상통한다는 것. “어릴 때 자연 속에서 뛰어놀며 생명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에 매료돼 그런 것 같아요. 학부 시절 여러 매체를 다루면서 웰딩(welding, 용접)에 달란트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자연스레 돌과 금속이 영적인 내용을 섬세하게 풀어내는 재료가 됐죠. ‘Soul-Tree’는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쉴 틈 없이 해외 전시장을 돌아다닐 정도로요. 그러다 커다란 한계에 봉착했어요. 작품이 크고 무거우니 매번 운송 문제가 발생하더라고요. 가벼운 소재를 고민하던 차 한지를 만났습니다. 그야말로 날개를 단 거죠. 2개월 동안 15점을 제작할 만큼 ‘Bloom’ 작품에 대한 의뢰가 끊이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작업하던 중 ‘제어하라’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깜짝 놀라 근처 호숫가로 나갔는데, 잔잔한 물결이 생경하게 다가왔어요. 위태로운 현실 너머 세계를 보는 것처럼. 절제해야겠다는 다짐을 절로 하게 되더군요. 이때 탄생한 작업이 ‘Contemplation’입니다. 촌각의 자극이 지금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Bloom 180925’, 한지, 81x81x12.5cm, 2018.
‘Bloom NO.55-1’, 한지, 101x101x8cm, 2012.
‘Contemplation NO. 8’, 한지, 197x90x10cm, 2015.


매체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자연을 향한 작가의 태도는 견지됐지만, 달라진 것도 있다. 바로 형식이다. 김희경의 작업을 살펴보면, 구상에서 추상으로의 이동이 눈에 띈다. 직관적 성격의 ‘Soul-Tree’와 달리 ‘Contemplation’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해석이 필요하다고 할까. “‘Soul-Tree’ 시기의 작업을 예로 들면, 관람객 관점에선 굉장히 친절할 거예요. 눈에 보이는 대로 읽으면 되니까요. 여담인데, 사실 재료 덕을 본 것도 있어요. 재료의 본색을 물감으로 똑같이 재현하는 건 불가능하니 돌만 잘 고르면 됐던 거죠. 육체적으로는 피곤했지만, 작업 자체는 괴롭지 않았어요. 다만, 구상 작품을 오래 하다 보면 점점 작가성이 강해져요. 개념이 중요시되면서 형태가 왜곡되기도 하고요. 결국 마지막에 남는 건 본질과 의미입니다. 저는 단순함 속에 다양한 이야기를 함축하는 편이에요. 꽃 형상 이면에는 자연의 무한한 에너지, 생명 잉태 등의 내용이 담겨 있어요. 여기에 보는 이의 사유가 더해지면 작업이 무한대로 확장되죠.”
한지가 바탕인 ‘Bloom’과 ‘Contemplation’ 작품을 마주하면, 작업이 인간사의 축약본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작업 방식에서 기인할 터. 한지는 예민한 종이인지라, 색을 잘못 물들이면 아크릴물감으로도 덮을 수 없어 새로운 종이에 다시 채색해야 한다. 가리고 가려도 고유한 특성은 그대로 남아 있는 셈. 사람도 비슷하다. 아무리 치장한들 결정적 순간에는 본성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한지에 퍼지는 그러데이션도 마찬가지. ‘첫’이라는 음절이 내뿜는 짙은 향기도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희미해지지 않던가. 어쩌면 오래전 그날 잠시 마주한 김희경 작가의 작업이 머릿속에 깊숙이 새겨진 건 우리네 삶과 닮아서일지 모른다. “한지도 저마다 개성이 있습니다. 사람 이목구비가 빚어내는 인상이 제각각인 것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한지 또한 천차만별이라 어떤 색이 어울릴지 계속 고민하게 되거든요. 그러데이션은 에너지 확산을 속도감 있게 묘사하는 방법의 하나고요. 그래서 일상의 대소사와 제 작업이 겹쳐 보이는 게 아닐까요.”
현재 김희경은 9월에 예정된 오페라갤러리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선 그동안 한지로 선보여온 작업을 하나로 합치는 시도를 계획 중이라고. 뒤이어 작가는 꽃 속으로 들어가 초월의 세계를 관조하는 작업이 될 것 같다는 힌트를 덧붙였다. 영험하면서도 어쩌면 세속적일 수 있는 한지 작업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김희경은 말한다. “작가와 작업이 일치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이를 위해 작업에 임할 때 온도와 작업실 밖에서 사람과 자연과 신을 대할 때 온도를 늘 유지하려 합니다. 제가 감동으로 이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관람객도 제 작업을 보고 마음이 동하면 좋겠어요”라고.

 

에디터 박이현(hyonism@noblesse.com)
사진 서승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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