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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08

시간을 달리는 빛

국대호 작가의 두 가지 기법의 회화 작품 속에는 '빛의 속도'가 담겨 있다.

올봄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작가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작업실로 가는 차 안에서 테크노 음악을 들려주셨죠. 전자 음율과 함께 고속도로를 달리니 창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이 스트라이프처럼 보이더군요. 작가님 작업의 출발점을 생각해보게 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테크노 음악 축제에 다녀왔습니다. 코로나19 여파로 3년 만에 열리게 되어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였죠. 심장을 울리는 베이스 소리를 좋아합니다. 테크노는 4분의 4박자인데, 반복되는 리듬을 통해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도 매력적이고요. 제 작업에서 반복되는 색의 연결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에너지를 테크노 음악에서 얻을 때가 많아요.
작가님은 ‘색’을 오랜 기간 탐구하셨지요. 한편으로 작가님의 구상과 추상 작품에선 ‘빛’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색보다는 빛에 더욱 끌리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다섯 살 때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동네 철공소에서 철근을 용접하며 빨갛게 달구고 있었는데, 그 색이 너무 예뻐서 손으로 덥석 잡았죠. 온 동네가 난리가 났습니다. 병원이며 민간요법이며 온갖 치료를 다 받아 다행히 낫긴 했는데, 부모님이 엄청 고생하셨죠. 그때 저를 매료시킨 그 불빛이 제 기억 속에 각인된 가장 오래된 색의 이미지입니다. 저는 자연의 색감보다 인공적인 빛의 색감에 더 끌리지만, 결국 두 개념은 같은 겁니다. 빛이 있어야 색이 존재하니까요.
이번 전시에선 과거에 작업하신 구상 작품과 근래의 추상 작품을 함께 선보입니다. 두 작품을 보고 있으면 각기 다른 속도로 시간이 흐른다는 느낌을 받는데, 우선 전시 의도에 관해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구상 작품 ‘도시’는 한 장소의 정지된 화면을 포착해 정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스트라이프’는 50여 년간 제가 보고 느낀 감정의 색을 화면에 쏟아내 중첩한 추상 작품입니다. 구상 화면보다 추상 색면에서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그건 화면의 색에 담긴 시간의 양이 다르기 때문일 겁니다. 제 작업을 속도의 측면에서 조명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전시를 보러 오실 분들의 반응이 무척 기대됩니다.





방이동, 97×146cm, Oil on Canvas, 2012.
Paris-06, 97×146cm, Oil on Canvas, 2009.
Market street-01(SF), 97×146cm, Oil on Canvas, 2013.


구상 작품 ‘도시’ 시리즈는 어떻게 탄생했나요? 영화에서는 도시의 밤을 비추는 불빛으로 고독을 표현하기도 하잖아요. 작가님도 도시 풍경에 담고자 한 감정이 있나요? 2000년대 초반에 DSLR이 일반 사람들에게 보급되었습니다. 저도 한 대 가지고 있었는데, 여행을 떠나면서 그것으로 경험한 장소들이 간직한 색채를 재현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카메라 렌즈를 아웃포커스해 형태를 흐리면 색이 추출되는데, 이렇게 얻은 사진을 회화로 옮긴 것이 ‘도시’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의 특징을 꼽으라면, 일단 사람이 없죠. 화면에 인물이 들어가면 거기에 초점을 둔 새로운 서사가 탄생하는데, 장소의 순수한 색 자체를 탐구하고 싶었기에 의도적으로 배제했습니다. 제 그림에서 외로움이 느껴진다면 그 때문일 겁니다.
스트라이프로 표현한 추상 작품은 구상 작품보다 좀 더 극단적으로 형태를 버리고 색의 느낌을 구현한 걸까요? ‘스트라이프’ 추상 작업은 구상 작업 전후로 나뉩니다. 초기의 추상은 색에 대한 탐구 자체, 즉 본질적 측면이 강했습니다. 그때는 색면이 만나는 경계를 부드럽게 그러데이션으로 처리했지요. 이 작업을 발전시켜 구상 작업에서 아웃포커스 기법으로 풍경을 묘사했고요. 다시 추상으로 회귀한 지금은 단절된 경계를 가진 색면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축적된, 색의 경험치가 발현된 밀도 있는 스트라이프입니다. 기억 속 색을 다시 꺼내는 것이기에 지금의 추상 작업을 ‘마음의 풍경화’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구상 작업이 없었다면 지금의 색은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작가님은 색을 통해 공간을 표현하고 싶으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코딩 언어로 웹 공간을 이해하듯, 작가님은 색이라는 코드로 공간을 읽어내는 것이지요. 인간의 눈이 식별할 수 있는 색의 가짓수는 800만에 달한다고 해요. 그러나 색을 지정하는 언어는 한정적이죠. 예전에 환기미술관에서 ‘컬러필드’ 작품을 선보이며 238개의 색 스펙트럼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 같은 명칭의 색이지만 그 깊이와 농도의 변화에 따라 수십, 수백 가지가 존재합니다. 명명되지 않은 색을 발견하고, 색에서 느낀 감정을 재현하고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 제 작업입니다. ‘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하니 조금 거창하게 느껴지는데, 그보다는 미술 장르 안에서 제가 표현할 수 있는 조형 언어라고 한정해 말할 수는 있겠죠.





S2022D1002, 100cm diameter, Acrylic and Oil on Canvas, 2022.
S20221001, 168×112cm, Acrylic and Oil on Canvas, 2022.


작가님의 작품에는 평면에 보이는 수직적 색의 만남 외에도 겹겹이 쌓아 만드는 수평적 만남이 공존합니다. 시공간이 압축된 화면을 보여주려는 것처럼요. 화면에 특정한 색이 나오게 된 원인을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니, 어릴 적 시각 경험이 그대로 재현되는 게 아니라 현재 감정의 필터링을 거쳐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지점이 시간성과도 연관되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서울에 처음 올라온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입니다. 당시 가장 인상 깊은 건 서울역 돔의 색상이었어요. 청동이 부식되면 초록빛을 띠잖아요. 그 색은 그 전까지 제가 보지 못한 색이자 세계였습니다. 그리고 부식된 표면은 한 가지 색이 아니라 다양한 질감과 레이어를 만들며 자연스럽게 변색되죠. 그 느낌을 재현하고 싶어 스퀴즈로 물감을 밀어서 화면 위에 기포를 형성해 질감을 만드는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화면에 담아내는 것이지요.
혹자는 색면 추상을 회화적 나르시시즘이 반영된 결과라고 말합니다. 회화가 어떤 대상을 묘사하는 도구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의미죠. 작가님의 작업도 이러한 담론과 결을 같이하나요? 어떤 작가는 사회현상을 다루기도 하고, 정치적 이슈나 환경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도 하죠. 반면 저는 어릴 적부터 색 자체에 끌렸어요. 색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패치워크’, ‘색면’ 시리즈를 시도했고, 이어서 자연스레 ‘도시’ 시리즈와 ‘스트라이프’ 시리즈가 나왔죠. 회화란 계획성과 즉흥성이 적절히 섞인 조화로운 상태라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어 색의 선택은 경험에 의한 것도 있지만, 캔버스 화면에 그리는 획과 색은 즉흥적 표현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회화는 만남의 연속이고, 그래서 프로세스가 중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색과 색이 충돌하거나 질감이 충돌하기도 하죠. 또 기억 속 압축된 경험들이 충돌하면서 나오는 회화적 현상이 저를 자극합니다.
작가님이 다작하는 원동력은 화면 위 실험의 충돌에서 오는 짜릿함인 것 같습니다. 이번 전시 이후에도 그러한 실험을 지속하실 예정인가요? 최근에 작업실을 자연과 가까운 곳으로 옮겼습니다. 이곳에 오니 그동안 보지 못한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요즘은 식물의 독특한 형태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영감이라고 부르는 현실 속 경험을 통해 관념 속 나를 작품으로 표현하는 존재입니다. 제 작품에는 다양한 색이 있고, 굵기와 질감이 다양한 선도 있습니다. 이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장면은 복잡한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 모습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에 제 경험이 녹아들면서 저만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환경의 변화가 앞으로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사실 그건 스스로 제일 기대되고 궁금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S2022802-4, 97×438cm, Acrylic and Oil on Canvas, 2022.

한 장소의 정지된 화면을 포착해 정적으로 표현한 ‘도시’ 시리즈와 작가가 보고 느낀 감정의 색을 화면에 쏟아내 중첩한 ‘스트라이프’ 시리즈를 감상할 수 있는 국대호 작가의 개인전은 8월 26일부터 10월 7일까지 노블레스 컬렉션에서 열립니다.

 

에디터 황제웅(jewoong@noblesse.com)
박수전(노블레스 컬렉션)
사진 안지섭(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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