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나의 힘 - 마놀로 발데스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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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04

미술은 나의 힘 - 마놀로 발데스

오페라 갤러리에서 열리는 마놀로 발데스 개인전.

뉴욕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인 마놀로 발데스.
1942년 스페인 발렌시아 출생. 1964년 라파엘 솔베스(Rafael Solbes), 후안 톨레도(Juan Toledo)와 에퀴포 크로니카를 결성해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의 행태를 유머와 아이러니를 결합해 비평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1981년부터 개인 작업을 시작해 세계 미술사 속 거장에게 영감을 얻은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스페인 국립박물관, 중국 국립박물관에서 치른 개인전을 비롯해 뉴욕 보태니컬 가든,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 등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파리 퐁피두 센터, 베를린 국립미술관 등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 중이다.

2020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작가님의 대형 조각 ‘La Pamela’를 만나고는 기뻐한 기억이 있습니다. 다만 코로나19가 확산하던 시기여서 더 많은 사람이 이 작품을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만큼 올가을 서울 전시는 작가님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들뜬 마음으로 전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 작품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전시를 하는 것만큼 흥분되는 일은 없죠. 처음 보는 작가의 작품을 볼 때는 편견 없이 감상할 수 있으니까요. 전시에선 인간 형상(human figure)을 주제로 지난 몇 달간 제작한 신작을 선보일 계획입니다. 관람객이 제 작품 세계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구작도 소개하려 하고요.
작가님은 젊은 시절 스페인에서 에퀴포 크로니카(Equipo Crónica)라는 그룹을 결성해 대중문화와 피카소 등 거장의 작품을 결합한 팝아트를 선보이셨습니다. 그러고는 어느덧 30년 가까이 뉴욕에 머물며 개인 작업에 몰두하고 계시죠. 뉴욕에서 일과가 궁금합니다. 이전과 많은 차이가 있을까요? 어디서든 제 일상은 비슷해요. 차이점이 있다면 도시의 풍광과 이동 거리 정도죠. 아침 9시에 스튜디오에 출근해 오후 5~6시까지 종일 작업합니다. 그 외 시간이나 주말에는 뉴욕 곳곳에서 열리는 전시를 보러 다니고요. 뉴욕에는 정말 볼 게 많답니다.(웃음)
서양미술 대표작을 전유(專有)한다는 점에서 에퀴포 크로니카 활동과 이후 작가님의 개인 작업은 긴밀한 연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에퀴포 크로니카는 제 경력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1960~1970년대 미국 팝아트가 스페인에 소개되면서 영향을 받았죠. 미국 작가들은 일상 이미지에서 힘을 얻었고, 에퀴포 크로니카도 같은 작업을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제 작업은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미술사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관심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예컨대 17세기 회화를 마주했을 때 저는 그 작품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역사가 있었는지 떠올립니다. 제 작품에서 미술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지요. 제 조각의 두상이 대체로 큰 편인 것은 팝아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겁니다. 한 얼굴에 눈을 여러 개 그린 회화는 피카소에게 배운 것이고요. 작업 중 물감이 우연히 표면을 타고 흐른다면, 잭슨 폴록처럼 그대로 살려 작품의 일부로 만들 수도 있을 겁니다.
작가님은 벨라스케스가 그린 마리아나 왕비 초상화 실루엣과 꼭 닮은 조각 ‘Reina Mariana’ 같은 미술사 이미지를 작업에 직접 활용하시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 미술사 이미지를 탐구하고, 또 그런 작업을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궁금합니다. 제 작업에 그런 이미지가 반복해 나타나는 건, 한두 작품으로는 말하고 싶은 바를 모두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에요. 하나의 이미지로 회화와 소묘 작품, 조각을 만드는 것도 대체로 같은 이유입니다. 나무로 조각을 만들었다가 문득 ‘청동이나 시멘트, 알루미늄, 레진으로 만들면 좀 더 나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데?’ 생각하는 거죠. 작업을 이어가는 데 특별한 제한은 없습니다. 새로운 재료·형태·아이디어를 찾을 때마다 이전 이미지로 돌아가 못다 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2019년 파리 방돔 광장을 장식한 ‘La Doble Imagen’ (2015-2016).

작업에 활용할 이미지는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시나요? 이유가 어떻든 저를 매혹하는 이미지를 선택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을 발견하면 그걸 보러 최소 두 번은 미술관을 방문해요. 미술관에 직접 도구를 들고 가 작업하긴 어려우니 기억이나 감각에 의존해야 하죠. 제가 과거에 활용한 이미지는 지금도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그간 많은 변주를 해왔지만, 여전히 할 얘기가 남아 있다고 생각해요.
실내 공간을 장식할 만한 사이즈의 ‘Cabeza con Orquideas’(2018)부터 프랑스 방돔 광장을 수놓았던 대형 조각 ‘La Doble Imagen’(2015-2016)에 이르기까지 자연에서 온 이미지를 활용한 작품도 흥미롭습니다. 난초나 나비 이미지를 작품에 활용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과거 다른 작가들이 이를 어떻게 표현했는지부터 짚었습니다. 또 얼마 전에는 몇 달에 걸쳐 비를 그린 회화 연작을 제작했는데요, 작업 도중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고 문득 비 내리는 걸 한 번도 보지 않은 채 작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자연 이미지 역시 ‘미술사’라는 필터를 거쳐 나오는 것이지요.
못, 모래, 골판지, 거울 조각 등 비미술 재료까지 거침없이 활용하시죠. 재료에 관한 작가님의 철학을 묻고 싶습니다. 색채나 모양이 있는 모든 재료를 주의 깊게 살핍니다. 마치 사냥꾼처럼요. 표현력이 있는 재료라면 저와 잘 맞을뿐더러 그 자체로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최근 유리에 관심이 많은데, 제 의도대로 재료를 다루고자 큰 오븐을 들이기도 했습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미술을 배우던 시절 파리로 여행을 떠나 박제된 독수리가 인상적인 로버트 라우션버그의 작품 ‘Canyon’과 매트리스에 그림을 그린 또 다른 작품 ‘Bed’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브러시가 아닌 스패출러로 검은 물감을 뿌려놓은 피에르 술라주의 작품도요. 그 경험을 통해 작업에 한계를 둘 필요가 없다는 걸 확신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화이트 큐브를 넘어 야외에 작품을 설치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야외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거대한 스케일, 또 작품이 설치된 주변 환경과 나누게 될 대화에 도전 의식을 느낍니다. 지난 2005년 파리의 팔레 루아얄 가든에서 작품을 선보인 것이 계기였죠. 정원을 거닐던 관람객이 우연히 조각 작품을 마주했을 때 보이는 다양한 반응을 지켜보는 것은 개인적으로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화이트 브론즈로 제작한 ‘Mariposas Plateadas IV’ (2018).

그 외에도 싱가포르 가든스 바이 더 베이, 뉴욕 보태니컬 가든 등 세계 곳곳의 명소에서 작품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다면요? 작품이 놓인 장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느꼈어요. 같은 조각이라도 차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보는 것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 중에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작품 표면에 파티나가 생기는 등 날씨에 따라 시간의 흔적이 새겨지는 것도 흥미롭고요. 주변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작품이 저에겐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좋은 작업을 위해선 적절한 휴식도 필요한 법이죠. 작가님의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바다낚시를 즐깁니다. 바다낚시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낚시와 관련한 작품을 하나쯤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특별한 영감이 떠오르진 않네요. 물론 휴식하는 와중에도 스튜디오를 떠올리고, 미래의 프로젝트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합니다.
현재 어떤 부분에 집중하고 있나요? 야외 조각에 색채를 입히는 일요. 그러기 위해 여러 재료를 조사하고 있는데, 많은 가능성이 보입니다. 후안 미로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스튜디오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요, 곧 그림이 그려질 6m짜리 캔버스가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아마도 미로가 그 캔버스를 전부 채울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겁니다. 마침 인터뷰하기 이틀 전에 트럭 두 대 분량의 설화석고와 목재를 구매했어요. 그 재료가 도착했을 때 ‘나도 미로와 똑같은 일을 했구나’ 생각했죠.(웃음) 창조의 열망을 다스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 재료로 만든 멋진 작품을 기대하겠습니다. 훗날 사람들이 작가님을 어떻게 기억하면 좋을까요? 미래는 생각하지 않아요. 현재에 충실하려고 하죠. 그림 그리는 일, 현재 작업하는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스스로 계속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작품의 형상이 풍부해졌고, 복잡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도 다양해지고 있죠. 얼마 전 누군가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느냐고 물었는데, 앞으로 80년 동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프로젝트가 준비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아직 할 일이 많아요.

 

에디터 황제웅(jewoong@noblesse.com)
사진 제공 오페라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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