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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10

모던 한식의 진화

한식의 현주소, 그 안에 담긴 스토리와 문화를 인문학적 시선으로 통찰했다

왼쪽부터 드라이에이징한 한치포·새우포·한우 안심 육포·가리비 관자포, 오븐에 구운 은행과 마 씨앗으로 구성한 한 입 거리.

현재 한식은 ‘K-푸드’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외식 무대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놀랍게도 ‘2022 미슐랭 가이드 뉴욕’의 추천 음식점 64곳 중 아홉 곳이 한식 레스토랑이었다. 그동안 주로 밥과 국, 반찬으로 이루어진 일상식 이미지 혹은 양념 치킨 정도로 각인된 한식은 이제 모던함이라는 옷을 입고 진화 중이다. 이렇듯 모던 한식이 약진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필자는 작은 한식당 ‘윤서울’에서 그 실마리를 발견했다. 정식으로 요리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김도윤 셰프의 음식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놀랍게 변화했다. 그는 많은 한식 관련 서적을 읽고 공부하며 새로운 한식을 재창조하는 셰프다. 이는 비단 김도윤 셰프만의 변화는 아니다. 이전 세대와 달리 요즘 젊은 한식 셰프들은 끊임없는 연구 및 실행을 통해 새로운 한식 글로벌 스탠더드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이는 K-푸드의 핵심인 모던 한식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원동력이 되었다.
서교동 홍대 뒷골목에 자리한 윤서울은 언뜻 허름해 보이지만, 음식 맛만큼은 뛰어난 곳이다. 딱 아홉 명까지 수용 가능한 윤서울이 2021년과 2022년 연이어 미슐랭 1스타를 받았을 땐 많은 사람이 의아해했다. 하지만 실제로 가보면 그러한 의문이 단숨에 해소된다. 카운터 좌석에 앉아 셰프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열 가지 이상의 다채로운 코스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것. 지면에 일일이 소개하며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만큼 섬세한 미식을 선보인다. 게다가 고기·생선·채소 등 온갖 식재료를 말리고 발효, 숙성시키는 현장과 세 나라에서 생산한 통밀을 섞고 직접 제면하기 위한 기계를 접할 수 있어 ‘한식 랩(실험실)’이라 불러도 손색없다. 그중 김도윤 셰프의 실험정신이 담긴 세 가지 음식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한 입 거리, 드라이에이징한 어포와 육포
한 입 거리라는 이름의 이 음식은 서양의 전채 요리에 해당한다. 본격적인 식사를 하기 전 입을 즐겁게 해주는 요리라는 뜻이다. 한식에서는 반주를 위한 마중 요리라고 할 수 있다. 윤서울에서는 은행, 오븐에 구운 마 씨앗, 드라이에이징한 새우포·한치포·한우 안심 육포·가리비 관자포 등을 한 접시에 담아 제공한다. 각각 작고 앙증맞은 사이즈이면서도 색감의 조화나 맛을 고려한 아름다운 요리다. 생명의 잉태를 상징하는 씨앗인 마 씨앗과 결실의 열매인 은행이 나오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즐겨 먹던 식재료다. 또 새우·한치·가리비 같은 어패류 포는 소금으로 염장한 후 40일 이상 드라이에이징을 거친 것이다. 육포는 피를 빼지 않은 한우 안심을 간장 소스에 이틀 정도 숙성한 후 200일간 드라이에이징한다.
과거 우리 민족이 가장 즐겨 먹던 고기 요리법은 바로 어포와 육포다. 삼국시대에는 왕의 결혼 예물로, 조선시대에는 왕실 잔칫상에 오르기도 했다. 냉장이 되지 않던 시절 가장 효과적인 저장 요리법으로, 저장 기간 동안 숙성과 발효를 거치면 감칠맛은 최고조에 달한다. 윤서울은 이 드라이에이징 방법을 어패류와 육고기에 적용하고 있다. 단순히 소금이나 간장에 양념해 건조하던 방법에서 탈피, 온장고와 건조기를 활용한 세심한 온도 조절을 통해 최상의 감칠맛을 품은 육포와 어포를 만든다.





방어, 가리비, 문어, 미니 당근, 단호박, 감자, 아스파라거스 등을 넣은 각색어회.
토핑 없이 면발의 쫄깃함과 고소함을 그대로 살린 통밀 들기름국수.


각색어회(各色漁會)의 재해석
각색어회는 여러 가지(각색) 생선으로 만든 회 음식을 뜻한다. 김도윤 셰프는 이 음식을 고조리서로 공부해 선보였다고 한다. 보통 생선회를 일본 음식으로 알고 있으나, 우리 민족이 생선회를 먹은 역사는 문헌으로도 2000년이 넘는다. 특히 조선 왕실에서는 중요한 손님에게 생선회를 접대할 정도로 값비싸고 귀한 음식이었다.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 내용을 정리한 기록인 <의궤>의 ‘찬품조’에 많이 등장한다. 주로 민어, 조기, 대합, 전복 등을 생선회 재료로 썼다. 또 최초의 전통적 상차림에 대한 기록을 담은 1800년대 말의 <시의전서>에는 어회에 대해 “민어는 껍질을 벗기고 살을 얇게 저며 가로 결로 가늘게 썰어서 기름을 발라 접시에 담는다. 겨자와 고추장 양념장은 식성대로 곁들여 먹는다. 각종 어회는 모두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한다”고 나와 있다. 어회는 이후의 조리서에도 다수 등장한다.
윤서울에서는 이 각색어회를 새롭게 재해석했다. 가리비는 태안 자염(끓여 만드는 전통 소금)으로 살짝 간해 오일을 뿌린 뒤 55℃ 저온으로 익혀 식감을 살리고, 문어는 75℃에 익혀 부드러운 맛을 냈다. 방어는 미리 소금을 살짝 뿌려 곁들였다. 저온에 익힌 미니 당근, 단호박, 감자, 아스파라거스, 콜라비, 알배추, 래디시는 견과류를 섞은 유자 소스로 간했다. 무엇보다 생선회의 중요한 요소인 소스는 조선시대에 주로 생선회를 찍어 먹었던 된장을 기본으로 만든다. 2012년에 담근 전통 된장에 갓 짠 들기름을 섞어 새로운 생선회 요리를 완성했다.

귀하게 만든 통밀 들기름국수
각 나라마다 독특한 국수 문화가 있다. 우리 민족도 오래전부터 국수를 즐겨 먹었다. 밀이 귀했던 조선시대에는 밀가루를 진짜 가루라는 의미로 ‘진말(眞末)’이라 불렀다. 잔치국수로도 불린 밀국수는 손님을 접대할 때 먹는 귀한 음식이었다. 윤서울은 국수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할 정도로 국수에 신경 쓰는데, 김도윤 셰프는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밀 품종을 연구했다고 한다. 현재 경남 사천에서 나오는 백강밀과 튀르키예 유기농 밀, 프랑스산 유기농 밀을 블렌딩해 만들고 있다. 들기름은 유기농 품종에 저온에서 직접 짠 들깨와 태안 자염을 넣어 버무렸다. 특히 달걀 대신 오븐에 로스팅한 녹두를 제분해 사용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1670년경에 쓴 최초 한글 조리서인 장계향의 <음식디미방>이나 1815년경에 쓴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에는 달걀노른자를 넣어 만든 난면법(국수 요리법)이 나온다. 국수 요리를 귀하게 생각한 우리 선조는 국수의 물성을 위해 달걀노른자를 넣었다. 그런데 윤서울에서는 달걀노른자 대신 녹두 가루를 사용해 질감을 살린 것.

윤서울의 서양식처럼 코스로 제공하는 방식이나 음식 모양새 등을 보면 한식이 맞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 음식에 담긴 스토리와 문화를 살펴보면 의심할 여지 없는 한식이다. ‘용의 눈’이라는 이름의 쌀로 잘 지은 밥과 국, 김치를 코스 마지막에 내는 걸 봐도 그렇다. 된장·간장 등 우리 장을 활용한 발효 음식이 기본을 이루고, 각색어회 같은 전통 한식이 등장하며, 아름다운 도자기 그릇을 사용하니 그야말로 모던하게 표현한 한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에디터 이정주(jjlee@noblesse.com)
정혜경(호서대학교 명예교수)
사진 정혜경(호서대학교 명예교수)
요리 김도윤(윤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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