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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15

멍 때리겠습니다

건강한 삶을 위한다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 선언해야 한다.

1 지금부터 쉬겠다는 자기암시로 심신의 휴식을 얻을 수 있다.
2 ASMR과 같은 일상 소음은 실제로 무소음일 때보다 일에 더 집중하게 만든다.

물어보자. 가장 최근에 멍 때린 시간이 있는지? 잠든 시간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충분히 혼자 보낸 시간은 언제인가? 혹시 멍 때린다는 표현 자체가 낯선 건 아닌지. 그렇다면 지금부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개인의 심신 건강은 물론, 나아가 사회현상과도 연관이 있는 말이니까.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멍-하니’란 말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얼떨떨하게’란 의미로 쓰는 부사다. 유의어로는 ‘흐리멍덩히’와 ‘우두커니’, ‘망연히’, ‘멍청한’ 등이 있는데 조금씩 그 결이 다르다. 확실히 요즘은 ‘멍하니 있다’에서 시작된 ‘멍 때린다’는 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식이나 다수 속에서도 고립된 상태에 더 가까운 의미로 즐겨 쓴다. 배경은 요즘 사람이 너무 바쁘다는 데 있다. 우리가 오가면서 보는 크고 작은 모니터나 광고, 방송에서 정보에 노출되고 온라인으로 시간대를 무시하며 일한다. SNS를 통해 서로 모르는 사이라도 내내 이어진 삶을 살아 남의 눈과 평가에 신경 써 온전히 쉴 틈이 없다. ‘워라밸’을 좇지만 주말마다 멀리 떠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 실용성과 가치에 무게를 둔 소비를 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2010년 초반부터 이른바 혼자 있기, 멍 때리기의 변주가 시작됐다.
가장 유쾌하고 구체적인 예는 ‘멍 때리기 대회’다. 이젠 매년 봄 <9시 뉴스>와 예능 방송에서도 종종 다루는 이슈로, 2014년 예술가 웁쓰양이 시작했다. 한 개인의 이벤트로 시작됐지만, 지금은 매년 4월 한강 주변에서 웁쓰양이 주관하고 서울시 주최하는 연례 행사로 자리 잡았다. 대회 규칙은 분명하다. 3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주최 측이 제공하는 음료와 껌 씹기를 제외한 음식물 섭취를 금하고 독서하거나 잡담을 나눠서도 안 되며, 휴대폰을 보거나 졸아도 안 된다. 진행 요원이 15분마다 참가자의 심박 수를 체크하는데, 가장 안정적 수치를 보이는 사람이 우승한다. 다방면의 기획과 퍼포먼스 활동을 하는 웁쓰양은 첫 회부터 SNS를 통해 기대 이상 빠르게 알려졌다고 소회했다.
“당시 사람들은 대회 이름만 보고 뭘 해야 하는지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 같았어요. 쉴 때조차 쉬지 않고 끝없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과 불안을 안고 사는 사회임을 느끼고 있었어요.” ‘멍 때리기’가 과거처럼 시간 낭비가 아니라 지금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시간이라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대회는 20~30대에서 가족 단위와 중·장년층의 참여율이 높아졌고, 해외로도 확장됐다. “이듬해 베이징에서 <차이나 뉴스위크>의 주관으로 두 번째 대회를 개최했어요. 한국처럼 경제와 산업이 성장한 동아시아 국가 사람들의 반응이 더 뜨거워요. 이후 네덜란드, 홍콩, 대만 등에서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3 레저 전문가들은 캠핑에는 정답이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불멍’을 즐기면 된다.
4 평소 일터에서도 짧은 명상은 도움이 된다.

‘멍 때리기 대회’가 단체전이라면 소규모 개인전으로 ‘불멍’이 있다. 대체로 캠핑장이나 야외에서 볼 수 있는 불의 움직임을 멍하니 본다는 뜻이다. 산에 오르고 텐트를 치는 것까지는 딱히 특별해 보이지 않지만, ‘불멍’은 레저의 새로운 방식이 됐다. 심지어 야외로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책상 위 모니터에서라도 즐길 수 있도록 모닥불 영상을 온라인이나 넷플릭스에서 찾는다. 실제로 한국관광공사가 포털 ‘다음’과 함께 약 25억 개의 인스타그램, 블로그, 커뮤니티(카페)에서 쓰인 단어 사용량을 조사해보니 ‘불멍’은 2016년부터 꾸준히 증가했다. 특히 나들이하기 좋은 5월과 10월에 급증했다. 소위 2010년대 고가의 등산용품 판매 시장 거품이 빠지고 주 52시간 도입 이후로 아예 바다로 나가는 서핑처럼 더 적극적인 행태로 바뀌는 한편, 등산이나 캠핑으로 통칭하던 쪽은 각자 취향과 거주 조건에 따라 더욱 세분화됐다. 많은 이가 자동차 안에서 숙박하는 ‘차박’을 포함해 도심 인근에서 간편하게 밤을 보내는 방식이다.
“저 역시 그날 컨디션에 따라 쉬는 방법이 다르지만, ‘불멍’은 어린아이에게도 통해요. 모닥불이나 텐트 속 화목 난로를 켜면 금세 조용해지거든요. 인간의 본성인지. 자기도 모르게 집중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오랜 시간 캠핑 문화를 온라인에서 공유하고 활동해온 김문기 피엘라벤코리아 마케터의 말이다. 복잡한 도심에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과하지 않게 피로를 푼 다음 쉽게 돌아올 수 있는 것. ‘불멍’ 마니아는 또 다른 방식을 찾고 있다. “부쉬크래프트(#Bushcraft)라고 검색해보세요. 작은 칼 하나로 나무를 깎아 숟가락 같은 용품을 그 자리에서 만들어요. 자연 속에서 반나절이 금방 가고, 그사이 고민을 잊죠.”




5 자전거 타기와 같은 신체 활동으로 활력을 불어넣는 것도 방법.
6 ‘2019 한강 멍 때리기’ 대회 모습. 올 봄에도 열린다.

이 외에도 휴식과 집중을 돕는 일상 속 방법으로 백색소음이나 ASMR을 듣는 방식은 유튜브 채널의 인기 주제라 예능 방송이나 홍보 영상의 주요 포맷으로 쓰이기도 한다. 요가 학원도 몸매 관리보다 명상에 집중하는 프로그램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요즘 사람들은 나 홀로 무념무상의 세계를 더 열심히 찾는 듯하다.
정신과 전문의 김경우의 말에 따르면, 소위 ‘멍 때린다’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드는 것은 내 몸을 일종의 소극적 명상 상태로 잠시 유도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재충전하는 시간 없이 24시간 긴장한 채 살아가는 경우가 많아요. ‘어디까지 뇌가 주의를 기울이고 긴장을 끝내야 하는지 모호해 멍 때리기가 ‘지금부터는 난 휴식을 취하겠다’라는 일종의 ‘셧다운’ 과 같은 선언이 된다면 의미 있습니다.” 뇌를 쉬게 한다는 건,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조용히 명상을 하고, 여럿이 하는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운동을 하면 된다.
하지만 잠만 자거나 밤새 넷플릭스를 보는 것으로 뇌를 쉬게 할 순 없다. 잠자느라 의식이 완전히 끊긴 순간에도 뇌는 일하기 때문이다. 밤새 꿈꾸며 낮 동안 쌓인 의식과 감정, 기억의 찌꺼기를 정리하고, 처리하고, 배출한다. 그렇기에 잠들기 직전 스마트폰이나 TV를 보면 수면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쉬려고 했지만 피로를 더하는 셈. 자기 전만이라도 가능한 한 뭔가 읽고 보기를 멈추고 때로 멍 때리기를 해보자. 오로지 나의 건강을 위해.

 

에디터 김미한(purple@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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