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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17

그리는 행위의 정의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평면에 그리는 행위에 집중하는 임자혁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본다.


갤러리기체에서 4월 18일까지 열린 <그러는 동안에>전에서 임자혁 작가를 만났다. 그녀는 회화 혹은 드로잉으로 장르를 구분 짓는 것에 물음표를 던지고,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는 평면에 그림 그리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 흰색을 조금 섞은 갈색(Brown with a Dash of White), Acrylic on Canvas, 90.9×116.7cm, 2020
2,3 임자혁의 신작은 큰 붓질과 그 안의 작은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큰 모양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작은 부분을 다시 들여다보았다는 점이 의미 있다.

전시 제목 ‘그러는 동안에’에는 두 가지 큰 의미가 있다. 그중 하나는 그림의 내용이다. 신작은 큰 붓질과 그 안의 여러 작은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업 과정에서 붓털이 지나가며 어떤 형태를 만들어내고, 물감이 뭉치거나 가늘고 엷게 보이기도 하면서 여러 형상이 나타난다. 이번 작업은 큰 모양을 만들어내는 동안에 생긴 작은 부분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색을 입히는 동안에 다시금 들여다보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큰 모양을 만들어내는 동안에 작은 과정이 있었다는 점을 조명했다. 결국 ‘그러는 동안에’는 과정을 의미하는 말이다. 또 하나의 의미는 작가와 작업의 관계다. 우여곡절도 겪고 인생의 어떤 지점과 시간을 지나는 동안에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그러는 동안에’는 긴 시간을 포함한 말이기도 하다. 작품을 보면 큰 움직임이 있지만, 반대로 아주 세밀한 행위도 있다. 큰 붓질은 작가가 즉흥적으로 남긴 것이고, 그 붓질이 만들어낸 여러 작은 디테일을 좇은 그림이 신작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신작의 제목이 ‘매우 연한 분홍’, ‘청록보다 조금 파란’ 등 색을 차용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색을 작품명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지요?
- 색 자체를 다루었다기보다는 제목으로 붙인 것뿐입니다. 색을 먼저 생각했다거나 그걸 대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주요 색을 미리 정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사실 그 후 다른 방식으로 작품이 발전했지만, 제목은 그 시작점인 색으로 정했습니다. 관람객은 그 색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저 작품을 구분하기 위해 제목은 항상 마지막에 붙이곤 합니다. 전에도 작업 초반에 미리 주요 색을 계획했어요. 중간에 갑자기 배색이 바뀌면 전체적 흐름이 흐트러지기에 다른 가능성은 다 열어둬도 ‘어떤 색으로 이 그림을 완성하고 싶다’ 정도는 미리 정하는 거죠. 이번에는 작품이 다른 어떤 것을 연상시키는 것을 지양하기 위해 색으로 명명했습니다.

작품은 작가의 심경을 반영한 거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작들이 현재의 심리 상태와 관계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 2012년 이후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품은 주로 종이를 활용했고, 대부분 크기가 작았습니다. 종이의 작은 면을 오려서 붙인 콜라주 작품도 많았죠. 그동안 이렇듯 소근육을 움직이며 작업했기에 이번에는 대근육을 시원하게 움직이고 싶어서 캔버스 작업을 하기로 했어요. 개인전에서는 여러 종류보다는 일관된 작품을 보여주는 것을 선호합니다. 대부분 일상에서 제가 발견한 것을 그리거나, 그리는 동안에 어떤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어서 구체적 대상을 그린 것이죠. 하지만 이번 신작은 그런 것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그린 것입니다. 구체적 이미지를 정하고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리면서 계속 그림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재미있었고, 그래서 오히려 감정을 표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졌어요. 그림 속 구도를 이용해 심리 상태와 멀어지는 작업이었습니다. 표현적 붓질이라고 해도 감정 표현이 아니라 커다란 모양을 만드는 빠른 행위까지만 생각한 것이지요. 심리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한 셈입니다.




4 연한 회색(Light Grey), Acrylic on Canvas, 193.9×130.3cm, 2020



마스킹테이프, 콜라주, 실, 잉크, 흑연, 판화 등 다채로운 재료를 사용했는데 최근 아크릴물감을 이용하는 캔버스 작업에 집중하는 이유가 있는지요?
- 표현 방법으로 작업을 규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간 종이나 벽에 드로잉을 하기도 했고, 견고한 평면 이미지에 관심을 갖고 판화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죠. 뭔가 큰 행위를 하거나 색을 강조하고 싶을 때는 캔버스에 물감을 사용하는 방식이 적절해 2003년 처음 페인팅을 시도했어요. 2010년 그 작품으로 개인전을 했고, 또다시 10년 만에 캔버스 페인팅으로 개인전을 열게 되었습니다. 중간중간 그룹전을 통해서도 계속 그런 작품을 선보였으니 선입견을 갖고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번 작품을 통해 관람객에게 궁극적으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지요?
- 품을 통해 제 고민을 관람객과 나누고 싶었던 건 아닙니다. 신작은 오히려 관람객이 뭔가 풍경을 그린 것처럼 보기 쉽습니다. 붓질에 농담이 있고, 진하고 연한 세부적 표현이 유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연에서 흔히 보는 어떤 것과 작품 이미지를 연결하게 됩니다. 저는 작은 부분을 칠하면서 그런 연상 작용을 방해하고 싶었습니다. ‘산’이라고 명명하면 그것은 산 이상이 되기 어려워요. 자동으로 뭔가가 연상되는 것을 계속 질문하고 부정하는 과정이 재미있었어요. 마지막에 기하학적인 원과 직선을 삽입한 것도 풍경으로 보이는 상황을 방해하고 싶은 의도였습니다. 관람객의 관점에서 볼 때 어디서 연상에서 벗어나고, 어디서 다시 돌아올지 플레이해보는 것이 흥미로웠어요. 원형이 해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여러 개를 넣기도 하고,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오게 삽입하기도 했어요. 원을 어디에 놓을지는 마지막에 결정했어요. 그림이 크니까 뒤에서 보면 엉뚱한 곳에 붙였다 싶어도 다시 옮기지 않았습니다. 균형을 맞추려는 고정관념이나 규칙에 대해 자문하고 싶었거든요. 여기에 두는 것이 가장 엉뚱하겠다 싶은 곳에 놓기로 최종 결정했습니다.




5 짙은 남색(Indigo Blue), Acrylic on Canvas, 90.9×116.7cm, 2020
6 그림 속 구도를 이용해 작품을 완성했기에 오히려 감정이나 심리 상태에서 멀어지는 작업이었다.



작업 프로세스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 주요 색을 정하고 큰 붓질을 하는 건 몇 분 만에 끝납니다. 우연히 아주 빠르게 큰 틀이 생긴 거죠. 이후에는 미시적 관점으로 그 틀을 몇 주 동안 들여다보면서 숨어 있는 여러 형태의 붓질을 찾아냅니다. 그 과정이 재미있어요. 빠르고 우연적인 것을, 반대로 느리게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린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살다 보면 순응하고 따라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과정이 더 재미있는 것 같아요.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결정하고 따라가는 과정이 오히려 더 즐거울 때도 있습니다. 신작도 그런 과정을 거쳤어요. 끝을 몰라서 재미있고, 가이드가 없어도 막막하지 않고 앞으로 그릴 것이 보였어요.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릴 수 있었지요.

구상에서 추상으로 변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에 대한 의견은 어떻습니까?
- 구상에서 추상으로 변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전에도 반복적으로 구상과 추상을 오갔습니다. 제가 구상 작가인지, 추상 작가인지에 대해선 항상 열어놓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동안의 포트폴리오를 보면, 시기에 따라 화풍이 바뀐 게 아니에요. 어떤 흐름이 반복됩니다. 짧은 호흡으로 작품을 보면 제가 변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긴 호흡으로 보면 공통적인 것이 보여요. 앞으로도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색의 사용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 일상과 그림을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제 작업은 선과 공간이 중요해서 선을 이용한 그림에 포커스를 맞추었죠. 그러다 형태가 단순히 내용을 담는 그릇 이상이 되려면 색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해 색을 주인공처럼 적극적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2003년경 개인적으로 특별한 계기도 있었고요. 어떤 상황이나 형태, 내용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색을 형식 요소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드로잉에서도 색을 중요한 레이어로 놓기 시작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색면을 오려서 모양을 만드는 콜라주 작업을 하게 됐어요. 콜라주는 공장에서 나온 종이의 색면을 이용하는 것이지만, 페인팅은 제가 색을 만들 수 있어서 하기 시작했습니다. 색을 만드는 과정이 재미있어서 즐기다 보니 페인팅을 하게 된 것이죠. 그때 다들 왜 달라졌는지 물을 정도로 작품이 확 바뀌었어요. 나중에 보니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그런 추상 요소만 가지고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가 있고, 지금은 그런 시기가 기다려지기까지 합니다. 그땐 뭘 할지 미래를 아는 것이 아니니, 한 달 후에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기대하게 됩니다.

20년 경력의 작가로서 가치관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요?
- 어떻게 하면 자유롭고 유연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이것이 제겐 이슈였죠.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 작품을 교육과정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당시 미술계 분위기에서 무겁고 가벼운 작품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마저 의심하게 되면 못할 것이 없고 자유로워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림은 무엇인가?’, ‘왜 그리는가?’ 같은 본질적 문제를 곱씹으며 내가 미술을 어떻게 생각하기에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인지 고민하고, 그러면서 더 작품의 이면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비슷한 재료와 과정을 거쳐 작업하는데 시대마다, 사람마다 작품이 달라지는 것이 새삼 흥미로워 본질적 문제에 포커스를 맞추게 되었습니다. 최근 두 번의 개인전에서 색종이를 오려 붙인 콜라주 작품을 선보인 건 기본적인 작업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도 테크닉을 통해 신기한 무엇을 그려내기보다는 물감을 붓으로 칠한다는 행위에 집중한 결과물이지요. 큰 구조를 강조하고 평면에서 변화를 보여주고 싶어 사이사이의 작은 면을 찾아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의도와 우연을 오가며 작품을 완성했다고 들었는데, 이번 신작뿐 아니라 전작에도 해당하는 표현인지 궁금합니다.
- 의도와 우연이 반반 정도 비율로 얽히는 것 같아요. 의도적으로 큰 붓질을 하지만 결국 어떤 모양이 될지는 저도 모릅니다. 물감이 만들어내는 우연을 따라가며 의도적으로 세부를 조명하죠. 그러면서 더해가는 것이 예상하지 못한 또 하나의 모양을 만듭니다. 시작점에서는 결과를 알 수 없으니 어느 정도의 의도와 우연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겠네요.

 

 


에디터 이소영(프리랜서)
사진 JK(인물)   이미지 제공 갤러리기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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