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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10

드라마틱한 와인 인생

프랑스 론 지역의 샤토 그리예 총책임자 추재옥의 드라마틱한 와인 인생.

샤토 그리예에서 만난 추재옥 총책임자.

프랑스 북부 론 지역 초입에 자리한 콩드리외(Condrieu)는 드라이 화이트 와인으로 유명한 와인 생산지다. 특히 콩드리외 내 유일한 모노폴(단일 소유) AOC인 샤토 그리예(Chateau Grillet)의 화이트 와인은 비고니에(Vigonier) 품종 100%로 만들어 희소성과 가치를 인정받는 화이트 와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 지역 화이트 와인은 수확 노동자 부족 등으로 대부분 레이트 하비스트(Late Harvest, 포도의 당도가 높아질 때까지 기다렸다 수확하는 것)를 통한 스위트 와인이 대부분이었는데, 샤토 그리예만 드라이 화이트 와인을 고수한 덕분에 모노폴을 받은 도멘이다. 다른 화이트 와인 품종에 비해 산미가 살짝 떨어지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풍성한 향기와 숙성하면서 나오는 미네랄의 풍미가 멋진 화이트 와인을 완성한다. 샤토 그리예는 10여 년 전 프랑스 굴지의 명품 브랜드 기업 케링(Kering) 그룹 소유가 되었다. 케링 그룹은 구찌, 보테가 베네타, 입생로랑, 발렌시아가 등 럭셔리 브랜드와 함께 보르도 5대 샤토 중 하나인 샤토 라투르(Chateau Latour), 부르고뉴 그랑 크뤼 도멘인 클로 드 타르(Clos de Tard), 도멘 듀제니(Domaine d’Eugenie) 등 총 7개의 고급 와이너리를 소유하고 있다.






그녀가 개인적으로 양조해 만든 메종 데 종 와인.

샤토 그리예를 유독 주목하는 이유는 책임자가 한국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양조 기술 경영 총책임자로 일하기 전, 샤토 그리예는 그야말로 전통적 콩드리외 화이트 와인이었다. 필자가 방문한 날 테이스팅한 그녀의 샤토 그리예(병입하기까지 아직 1년 가까이 남아 있는 2019 빈티지)는 각종 꽃향기가 풍성하게, 그리고 멋지게 어우러지면서 산미까지 갖췄다! 그야말로 전 세계 와인평론가들의 찬사를 예약해둔 맛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와인을 만드는 그녀의 인생 여정은 프랑스 혹은 전 세계 유수의 와이너리 경영자 중 유일한 한국인이란 사실만큼 드라마틱하다. 그녀는 국내 와인 수입사 신동와인에서 마케팅 일을 하다 와인에 깊이 빠져 와인 유학을 결심했다. 피노 누아의 매력에 매료된 그녀의 목적지는 당연히 프랑스 부르고뉴였다. 양조학을 학습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2년 과정 기술학교 BTS(Brevet de Technicien Superieur)에서 학업과 일을 병행하는 과정을 택한 그녀는 이곳에 등록하기 위해 100여 곳의 와이너리에 이력서를 들고 찾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계속 퇴짜를 놓는 바람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그녀를 받아준 곳이 바로 샤토 듀제니였다. BTS 등록 기한까지 2주밖에 남지 않은 절박한 상황에서 찾아온 행운이었다. 문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는 법. 100여 군데의 와이너리를 찾아다니며 열과 성을 다해 운명을 개척한 그녀에게 이 행운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그녀가 가족과 함께 살고있는 아름다운 샤토 그리예.

학업과 와이너리 일을 병행하면서 양조에 대한 열정은 더욱 커졌다. 그녀가 학업을 무사히 마치는 것을 지켜본 케링 그룹에서 샤토 라투르의 포도밭 경작과 관련한 부책임자 자리를 제안했다. 하지만 현재에 만족하지 않은 그녀는 샤토 라투르의 좋은 자리도 마다한 채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업의 길로 들어섰다. BTS는 일을 병행할 수 있지만, 학업 자체가 워낙 어려운 양조학은 매년 수여하는 학위 수가 정해져 있기에 학업에 매진해야 했다. 학위를 따기까지 3년간 곁에서 지원해준 남자친구와 결혼도 했고, 아이도 가졌다. 그녀는 양조 학위를 첫아이 샤를리를 임신한 상태에서 받았다. 학위를 받고 샤를리가 태어난 후 또다시 어려운 시기가 찾아왔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찾아다녔지만 BTS 진학을 위해 일자리를 찾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곳은 없었다. 결국 전 직장인 샤토 듀제니에서 정식 채용이 아닌 포도밭 일을 하는 단기 노동자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일자리가 없으니 우선 밭일이라도 하자는 심산이었다. 그때 그녀에게 두 번째 행운이 찾아왔다. 포도밭 총책임자가 갑자기 개인 사정으로 일을 그만둔 것이다. 보통은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워낙 탄탄한 직장이라 평생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개인 사정으로 자리를 마다하고 나간 것이다. 바로 책임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1 오크통이 빼곡히 들어찬 와인 저장고.
2 론 강이 바라다보이는 샤토 그리예의 아름다운 풍경.

그녀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포도밭 일이 아닌 양조에 대한 갈증을 느낀 추재옥 총책임자는 결국 2년 뒤인 2017년부터 샤토 듀제니와 별개로 포도를 산 뒤 개인적으로 양조를 시작했다. 이때에도 주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그녀의 첫 빈티지는 대성공이었다.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수출하면서 완판된 것이다. 두 번째 와인을 양조하던 2018년 겨울, 그녀의 재능을 눈여겨본 케링 그룹이 그녀에게 새로운 제안을 한다. 샤토 그리예 총책임자 자리였다. 개인적으로 하는 양조를 그만둬야 한다는 조건이 붙은 탓에 고민이 컸지만, 양조학 학위를 어렵게 땄음에도 정상에 올라보지 못한 것을 생각하니 비교적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학위를 딴 후 포도밭 일을 계속해왔고, 벌써 두 번째 양조를 하던 그녀에게 와이너리 총책임자 자리는 호기심과 매력으로 다가왔다. 메종 데 종(Maison des Joncs, 추재옥 총책임자가 직접 설립한 도멘 이름)으로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가 부르고뉴의 생활을 단숨에 접고 샤토 그리예로 옮긴 지 1년 하고도 절반이 흘렀다. 그녀는 과연 현재의 생활에 만족할까? 항상 먼 미래의 가능성을 내다보는 추재옥 총책임자는 그녀다운 답을 내놓는다. “양조는 적어도 다섯 번 정도 해봐야 제대로 일했다고 할 수 있어요. 나를 믿어준 케링 그룹에 예의를 지키고 싶기도 하고요. 향후 5년간은 샤토 그리예에 머물 계획이에요. 이후에는 나만의 와인을 만드는 꿈을 다시 실현하고 싶어요.” 샤토 그리예 총책임자는 원하면 평생 자리를 지킬 수도 있다. 경제적으로 편하기도 하고, 그룹 내에서 인정받아 더 큰일을 맡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새로운 도전을 꿈꾸고 있다. 며칠 후 근처에 매물로 나온 포도밭을 보러 갈 예정이라는 그녀의 10년 후 모습이 자못 기대된다.

 

에디터 이정주(jjlee@noblesse.com)
사진 임정현  
최영선(비노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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