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의 재정의, 정서영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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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2-21

조각의 재정의, 정서영

사물과 조각의 관계를 탐구하고 재정의하는 조각가.

정서영 작가. 제50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 작가로 독일 포르티쿠스, 아뜰리에 에르메스, 서울시립미술관 등 국내외 미술 기관과 국제 행사에서 활발히 활동해왔다. 한국 현대미술이 다양성과 개별성을 획득한 시기로 일컫는 1990년대에 현대 조각의 동시대성을 견인한 작가로 평가된다. 조각을 포함한 드로잉, 사운드, 영상,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와 영역에서 유연하게 조각의 문제를 다루는 예술적 실험을 지속하고 있다.

조각이란 무엇인가? 사물을 들여다보면 설정된 관계와 유형의 움직임이 보인다. 정서영은 이러한 관계와 움직임에 덧붙인 의미와 작용의 연결 고리 속 일상적 복합성을 포함하는 것을 골라 또 다른 경험의 조건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정서영이 생각하는 조각이고, 그 생각은 11월 13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막을 내린 <오늘 본 것>전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정서영은 오는 12월 영국 프리즈의 첫 상설 전시관인 넘버 나인 코르크 스트리트 런던(No.9 Cork Street London)에서 또 다른 전시를 선보인다. 알루미늄, 브론즈, 나무, 제스모나이트 같은 다양한 재료를 본뜨고, 쌓고, 균형 맞추는 조각적 행위를 통해 변화하는 사물의 위상, 사물과 조각의 관계를 탐구할 예정. 조각적 행위를 통해 단단한 물질로 굳어진 이미지가 다룰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포섭하는 장소로서 조각을 제안한다니 기대가 크다.





전망대, 나무, 유리, 210×120×88cm, 1999, 아트선재센터 소장

<오늘 본 것>전의 제목은 작가님이 일기처럼 쓰는 텍스트 드로잉에서 따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텍스트 드로잉 ‘오늘 본 것’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나요?
하루 일을 마무리할 즈음 머릿속이나 망막에 남은 것을 적습니다. 그 내용은 매우 파편적이라 시간이 지나면 저도, 그 누구도 그게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매일 쓰지 않으니 ‘일기’라 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지속적으로 하는 작업이기도 하고요. 언제 작품에 영향을 미칠지 모르고, 언제 그냥 사라질지 역시 모릅니다. 보통 말이나 글을 쓰는 방법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이에요. 이렇게 적어놓지 않으면 반드시 잊어버릴 것들입니다.

<오늘 본 것>전은 독일 유학 후 국내 첫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부터 신작까지 포함한 일종의 회고전입니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작품 그리고 새로운 재료로 다시 만든 작품도 있었는데, 과거 작품을 마주하면 달리 느껴지는 부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20여 년 만에 본 작품도 있었어요. 솔직히 그다지 깊이 생각하거나 유달리 감정이 움직이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억보다 뚜렷해서 좋았어요.

슈투트가르트 미술대학 재학 시절 작가님의 작품 세계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이들이 많은데, 이때를 작품 활동의 기점으로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까요?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보다 훨씬 전인 서울대학교 대학원 재학 시절 지금의 작품 세계가 시작되었습니다. 독일에서 공부하며 그 무렵의 생각을 끌어내는 여러 길을 모색할 수 있었죠. 1996년경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님 작품 세계의 기조는 ‘조각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보여주기 위한 탐구’라고 생각합니다. 조각을 바라보는 작가님의 시각이 독일 유학 후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합니다.
긴 이야기라 짧게 답하는 길을 택하겠습니다. 유학 후 지금까지 아주 느린 속도로, 작품을 만드는 과정의 세부를 가능한 한 늘리면서 작품에 제 의도를 함축적으로 담아내려 하고 있습니다. 저는 재료로 형태를 만들어내는 전통적 조각을 공부했는데, 많은 매체를 다루고 미술의 여러 영역을 긴 시간 겪으면서 조각의 문제를 다양한 방면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조각’이라는 것, 또 ‘조각가’라는 단어를 좀 더 예민하고 중요한 문제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왼쪽 -어, 나무, 비닐민속장판, 페인트, 130×140×3cm, 1996, 개인 소장
오른쪽 파도(‘유령, 파도, 불’ 중 일부), 제스모나이트, 50×70×40cm, 1998~2002

서울시립미술관 1층 전시장은 기존 전시와는 다른 특별한 디스플레이가 생경하면서도 작가님의 작품 세계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구조여서 흥미로웠습니다.
현실적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입니다. 특히 1층 전시장은 제가 생각한 것보다 준수해야 할 규칙이 많아 곤란한 지점도 있었죠. 하지만 그런 문제를 오히려 드러내고, 문제로 삼지 않는 길을 열려고 했습니다. 전시 공간에선 작품 자체만으로 충분하다는 점을 기억해냈는데, 공간의 가장자리를 따라 한참 그리고 여러 번 걸으면서 가까이서 작품을 보면 보지 못했을 면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전망대’, ‘파도’, ‘-어’ 등 작가님의 과거 전시에서 본 작품들을 다시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다른 시간대의 작품이 모여서 그런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했고요.
저에겐 작품이 등장하고 서로 엮이는 모든 관계가 중요해요. 남들이 보기엔 별 차이가 없고, 이러나저러나 똑같다고 하는 걸 가지고 계속 밀고 당기는 거죠. 다른 시간대에 만든 작품들을 처음으로 가까이 놓고, 가까이 있던 작품들을 멀리 떨어뜨리며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작품 자체는 변하지 않아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생각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웃음)

조각은 물론 퍼포먼스와 사운드, 드로잉, 영상 작업을 하시기도 합니다. 다른 장르의 작품 역시 조각의 일부인 것인지요?
조각은 하나의 형을 이루기까지 어떤 작용이 일어나고, 또 그 과정에 세상의 많은 복합적 문제가 개입합니다. 저에게 조각은 그런 문제가 어느 날 한자리에 모여서 가만히 있게 된다는 평범한 사실이에요.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매우 활동적이고 유동적인 상태를 드러내는 플랫폼으로서, 아주 흥미롭고 문제적인 매체로서, 하나의 장소로서 조각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각이라 할 만한 모양새가 아닌 사운드, 드로잉, 영상 작업 역시 조각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왼쪽 <오늘 본 것>전 전경.
오른쪽 싱크대, 싱크대, 돌, 페인트, 78×162×143cm, 2011

전시에서 선보인 신작 중 ‘뇌 속의 뼈’,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는 전통적 조각 재료인 브론즈로 만들어졌습니다. ‘가운데 서고 가운데 눕고 가운데를 열어서 밖으로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는 비건 가죽을 사용했고요. 소재는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말씀하신 대로 브론즈는 전통적 재료라 그것으로 별달리 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뇌 속의 뼈’를 만들 때 값싼 각목과 석고붕대로 원형을 제작했는데, 별다른 고민 없이 만든 이 조각의 임시 형태를 뚜렷하게 유지할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브론즈를 선택하며 문제를 털어낼 수 있었습니다. 재료 자체가 작품의 중요한 내용인 것이지요.

예술가라면 아름다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가님 역시 작품의 미학적 완성에 관심을 기울이실 텐데, 대중이 기대하는 조각 작품의 미학과 작가님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어떤 방식으로 절충하시는지요?
작업을 충분히 하면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대중의 기대는 항상 알쏭달쏭해서 늘 거기에 못 미치니, 그 문제로 괴로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도 1998년부터 선보인 ‘유령, 파도, 불’ 연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연작의 의미는 지난 24년간 어떻게 변화해왔나요?
유령, 파도, 불은 끊임없이 형태가 변하고 사람들이 계속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풍부하기도 하고 사소하기도 한, 인류의 역사에 끊임없이 이야기의 소재로 등장하는 것들을 전형적인 사물과 조각의 형태로 만들어보고자 했습니다.





왼쪽 유령은 좋아질 거야, 비닐장판, 페인트, 나무, 제스모나이트, 50×400×180cm, 2005
오른쪽 <오늘 본 것>전 전경.

작가님의 작품은 이해하기 수월한 편은 아닙니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이 작가님의 작품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기를 바라시는지요?
작품을 보면서 장벽을 마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보통 작품이 의미를 말해주지 않으면 장벽을 느끼는데, 의미를 바라는 것 자체가 장벽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에서 어떤 물건이나 장면을 봤을 때 누구나 그 순간의 목격자이듯, 작품을 볼 때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그 작품의 가장 중요한 목격자입니다. 작품과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데에서 자기 자신을 믿었으면 합니다. 누군가가 만들어준 의미에 의해 그 작품이 빛나지는 않거든요. 작가조차 통제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고요. 저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인 동시에 예술을 좋아하는 감상자로서 항상 그런 마음으로 다른 작품을 보려고 노력하며, 그럴 때 굉장히 풍부한 세계가 열리는 경험을 합니다. ‘이 작품이 무엇을 의미할까?’ 생각하는 것은 이미 스스로 장벽을 치는 것이며 그런 것은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문제라, ‘그건 그냥 없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기를 권합니다. 내가 무엇을 봤는지, 그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왜 기억하게 되는지 생각할 때 ‘왜’보다는 작품을 마주했다는 사실, 작품은 굉장히 구체적인 하나의 사실이라는 것, 그 사실을 내가 ‘봤다’는 것에서 출발했으면 좋겠습니다. 전시를 보고 나서 한참 후에도 그 장면이 기억나면 좋지 않을까요?

전시와 함께 웹 아카이브를 선보여 반가웠습니다. 웹 아카이브로 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그 까닭이 궁금합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계획을 물으며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웹 아카이브에 동그란 점으로 표시한 항목이 있습니다. 그 공간에서 작업을 해보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는데, 아직 시작도 못했네요. 그 공간에서 흐르는 이미지는 아주 오래전부터 모은 것인데, 방금 지나간 것을 다시 보려고 한참 기다리다 결국 포기하거나 갑자기 눈앞에 어떤 이미지가 나타나면 동공이 확장되는 걸 느끼기도 합니다. 과연 이 작업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항상 하다 만 일이 늘어납니다. 그래도 그 더미는 어느 날 꺼내 쓸 수 있는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디터 황제웅(jewoong@noblesse.com)
이소영(미술 저널리스트)
사진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바라캇 컨템포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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