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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14

차이 나는 건축

조신형 디퍼런셜퍼머넌스 대표의 건축 철학.

사무소 한편에 놓인 붓과 물감, 캔버스 위 기하학적 추상회화가 눈길을 끕니다. 건축가님의 작품인가요? 어릴 때부터 이어온 취미입니다. 잘하고 싶어 레슨도 주기적으로 받는데, 최근 일이 많아 연습 시간이 부족하네요. 작업 중 막히는 부분이 생기면 붓을 듭니다. 건축설계는 전체 구조를 짜 CAD 프로그램에 넣고, 디테일을 잡아가며 컬러를 입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요. 회화 작업은 피그먼트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하는 등 프로세스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상반된 요소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미술 작가로 커리어를 쌓아도 좋은 성과가 있었을 듯합니다. 미술을 좋아하면서도 건축가의 길을 걸은 이유가 있을까요? 유년 시절 대부분을 홍콩과 파리 등 해외에서 보내면서 여러 문화의 다양한 건축물을 접했습니다. 별다른 지식은 없어도 건축물과 주변 환경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인식할 수 있었고, 자연스레 누군가를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습니다.
한국과 영국, 미국에서 건축을 공부했습니다. 특히 2009년 하버드 대학교 석사 학위 졸업식에서 기념 작품을 전시한 유일한 졸업생으로 들었는데, 어떤 작품이었나요? 하버드 서머 파빌리온입니다. 땅을 파면 안 되고 용접할 수 없는 등 몇 가지 제약 조건이 있었어요.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모듈러 건축물을 만들었는데, 많은 분이 파빌리온에서 햇빛을 피하는 등 현장 반응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해체 후 다시 설치할 수 있어 다른 곳에 전시할 계획이었지만, 곧장 취직하면서 물거품이 됐죠.
커리어의 시작이 포스터 앤 파트너스(Foster+Partners)로 알고 있어요. 뉴욕 스페론 웨스트워터 갤러리, 바르셀로나 캄프 누 스타디움, 런던 히스로 국제공항 구청사 등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고요. 뉴욕 오피스에서 일했어요. 앞서 영국 유학 시절에도 몇 년간 런던 오피스에서 근무했습니다. 경기가 좋을 때라 굵직한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죠. 배운 것이 많아요. 특히 이전까지 기하학에 흥미를 지닌 정도였다면, 기하학을 통해 구조적으로 안전하면서 아름다운 건축물을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했습니다. 도형과 공간의 성질을 탐미한 당시 경험은 제 건축 세계의 기반이 됐고요.
하버드 대학교 동기생과 공동 창업한 건축 사무소 초힐로에이플러스유(Cho.Helo A+U)에서는 본격적으로 고유한 건축 세계를 쌓아 올렸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요 프로젝트를 꼽자면요? 대표로서 고려할 부분이 훨씬 많다는 걸 알았죠. 정해진 예산 아래 제 의도와 클라이언트의 니즈를 절충하는 부분 같은. 주요 프로젝트로는 쿠드 본사 사옥(현 스페이스신선)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클라이언트는 쌀로 사업을 일군 회사였고, 그래서 인조 대리석을 쌀 형태의 작은 모듈로 만들어 스틸 프레임에 붙이는 방식을 택했어요. 각기 다른 각도의 모듈이 어우러져 가을철 잘 익은 벼가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이때부터 부분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형태에 관한 고민을 시작했는데, 물결의 리듬을 표현한 서울웨이브아트센터 등 이후의 프로젝트에도 반영했습니다.







왼쪽 조신형이 설계한 판교의 라운디드 하우스. 2층을 살짝 넓게 디자인해 태양과 비를 가릴 뿐 아니라 멀리서 보면 공중에 떠 있는 듯 신비로운 모습을 연출한다.
오른쪽 작은 모듈로 건물 전체에 리듬감을 부여한 스페이스신선.

그 고민과 경험의 집합체가 현재의 디퍼런셜퍼머넌스(Differential Permanence)고요. 이름을 해석하면 ‘영속성의 차이’인데, 여기엔 건축가님의 철학이 담겨 있겠지요. 영속성, 즉 지속성은 오랜 시간 머릿속을 지배해온 화두입니다. 보통 건축물은 본래의 쓰임을 다하면 부수고 새로 짓게 되죠. 하지만 공간의 기능을 바꿀 수 있다면 지속성을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수동의 옛 공장이 근사한 카페로 변화해 생동하는 것처럼요. 이는 오늘날 우리 모두의 화두인 지속가능성과도 연결됩니다.
건축가님이 설계한 건축물은 스스로 뽐내기보다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완성되는 듯합니다. 질리지 않는 디자인, 즉 클래식이죠. 크게 보면 이 역시 지속성의 조건일 것입니다. 실제로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주변 환경부터 주의 깊게 살핍니다. 한 사람을 위한 예배실인 모놀리틱 스톤을 지을 때도 그랬어요. DMZ가 연상될 정도로 자연이 잘 보존된 곳이었고, 조화를 고려해 매끄럽게 통합되는 디자인을 의도했죠. 구조적으로는 혁신을 추구했습니다. 모듈러 디자인으로 접근해 각 부분을 독립적으로 제작하고 조립했는데, 유지 보수와 구조 변경에 용이한 측면이 있습니다. 고성능 초고강도 콘크리트(UHPC) 등 모든 건축 재료는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선정했어요. 안정성과 내구성을 확보해 환경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한 거죠. 프로젝트를 진행할수록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욕심을 버리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현재 제주 비밀의숲에 카페와 초지 정원을 조성 중인데, 정원에는 야생화와 희귀 식물을 심어 독특한 야생의 힘을 재현할 계획입니다. 양 측면으로 창을 낸 단정한 박공지붕 카페와 함께 한적한 수도원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운 정경이 펼쳐지고요.
디퍼런셜퍼머넌스만의 작업 원칙이나 특징이 있나요? 온전히 핸들링 가능한 프로젝트라면 도면, 견적, 시공 전 과정을 책임집니다. 퀄리티 컨트롤 측면에서 타협하지 않으려는 노력이죠. 또 클라이언트의 라이프스타일을 파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예컨대 창은 남향이 좋다지만, 클라이언트의 주요 활동 시간대가 밤이라면 조금 달라질 것입니다. 클라이언트조차 몰랐던 니즈를 캐치하는 것이 좋은 건축의 조건 아닐까요.
인터뷰를 준비하며 디퍼런셜퍼머넌스의 채용 공고를 접했는데, 자격 요건에 독서를 좋아했으면 한다고 쓰여 있더군요. 방금 전 답변과도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독서를 인간을 이해하려는 행위로 여긴다면요. 타인을 이해하는 역량은 건축과 디자인에서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서를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는 훈련으로 볼 수 있죠. 단순히 책을 많이 읽는다고 되는 건 아니지만, 하나의 요건으로 던져보고 싶었습니다.(웃음)
디퍼런셜퍼머넌스는 건축설계뿐 아니라 인테리어, 가구 설계,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프로젝트를 전개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건축은 결국 인간이 사는 공간에 관한 문제니까요. 작은 가구부터 거대한 도시까지 프로젝트 규모와 상관없이 디퍼런셜퍼머넌스의 철학은 이어집니다. 예로, 책장은 용접이나 볼트와 너트 결합 없이 손쉽게 조립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어요. 공간의 모양이나 넓이, 사용자의 목적에 따라 칸 수를 자유롭게 줄이고 늘리는 것도 가능하고요. 건축설계 프로젝트에서 추구해온 지속성과 같은 맥락입니다. 







모놀리틱 스톤. 클라이언트의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리는 동시에 성경 통독과 기도만을 위한 예술적 오브제에 가까운 공간을 설계했다.
쉽게 해체하고 재조립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 책장에는 조신형의 건축 철학이 담겼다.
도시의 물을 관리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 마케마케 프로젝트.


건축가님의 도시계획 비전인 마케마케(Makemake) 프로젝트를 담은 신간 <육백미터 한강 다이어트>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도시의 강을 활용해 물을 컨트롤하는 국가 규모의 프로젝트인데, 시작점이 궁금합니다. 지난해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에서 발표한 프로젝트로, 남태평양 이스터섬의 라파누이 신화에 등장하는 창조신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기후 위기로 인한 물 스트레스는 점점 심해질 것입니다. 이미 어떤 곳에는 심각한 가뭄이, 다른 곳에는 폭우가 찾아오고 있죠. 동시에 전 세계적으로 도시화가 이루어지는데,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된 도시는 빗물을 지표면으로 제대로 흡수하지 못합니다. 도시에서 물을 관리하는 새로운 해결책이 필요한 시점이고, 서울을 캔버스 삼아 아이디어를 발전시켰습니다.
혁신적 아이디어입니다. 한강의 좌우 폭을 300m씩 줄이고 깊게 준설해 강물을 통제하는 한편, 서울 둘레에 설치한 두 줄기 거대한 링로드(파이프)로 물을 빼내 군데군데 지하 저장고에 물을 저장한다고요. 그 물은 정수 과정을 거쳐 중수로 활용되고, 계단식 낙차로 수력 에너지도 생산할 수 있고요. 한 발 더 나아가 100년 뒤 기후에서도 살고 싶은 터전을 제시했는데, 바로 돔 아트리움입니다. 지름이 200m~2.6km인 다양한 돔 형태 건축물로, 마케마케 시스템으로 확보한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전기분해를 통해 수소와 산소를 만들어내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궁극적으로 에너지 자급자족이 목표고요. 이곳에 스마트 팜을 들이면 상당량의 곡물을 수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폭을 줄여 생긴 대지와 돔 아트리움 사이 유휴 공간에는 모두를 위한 문화 공간을 조성하면 어떨까 싶어요. 풍부한 문화적 연결은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창의적 터전이 되겠죠.
엄청난 프로젝트인 만큼 실현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건축가로서 사람들이 설 공간을 상상하는 일은 그 자체로 큰 기쁨입니다. 마케마케 프로젝트는 현실성이 떨어질 수 있지만, 실현 불가능해 보이던 과거 구상이 도시를 바꾼 사례가 여럿 있습니다. 후대에 더 나은 환경을 전하기 위해서는 통념을 뒤흔드는 건축적 아이디어가 필요하고, 그런 측면에서 메시지를 남기는 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케마케 외 도전하고 싶은 또 다른 프로젝트가 있나요? 랜드마크를 남기고 싶어요. 다만 제게 랜드마크는 그저 어디서나 잘 보이는 고층 건물이 아닙니다. 랜드마크를 규정하는 건 사람이에요. 생애 처음 영화를 관람한 극장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처럼, 각자에게 의미 있는 뭔가로 남을 수 있도록 ‘사람을 향한 공간’을 만들고자 합니다.







 

에디터 황제웅(jewoong@noblesse.com)
사진 배준선(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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