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송종호의 속도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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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18

배우 송종호의 속도

아주 심심한 36.9℃의 배우, 송종호를 만났다.

촬영에 앞서, 권태나 지루함 같은 걸 생각해달라고 했다. 송종호는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지금 제 상태가 그래요”라며 몸을 움직였다. 아지랑이처럼 기지개를 켜고, 아주 느리고 우아한 몸짓으로 앵글 앞 곳곳을 거닐었다. 봄볕에 뭉근히 덥힌 고양이처럼, 나른하고 시큰둥하게 그림을 만들었다. 오래도록 몸에 밴 감각과 표현이었다. 단출하지만 화려한 그 몸짓은 촬영이 끝남과 동시에 사라졌다. 대신 조심성 많은 남자와 마주 앉았다. 인터뷰에서 송종호의 대답은 한 템포 늦었다.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고, 신인처럼 자신을 낮췄다. 말과 말 사이에 ‘아직 한참 부족해서’, ‘내공을 더 쌓은 후에’, ‘어떤 역이든 성실히’라는 수사적 표현을 넣었다. 치레로 들리지 않았다. 데뷔 15년 차 배우는 여전히 연기가 맞는 옷인지, 자신에게 재능이 있는지 자문한다. 그리고 이 길이 틀렸을까 봐 불안해한다. 그것이 바로 송종호의 힘이다. 고민이 그의 필모그래피를 빼곡히 채운 30편으로 이끌었고, 불안이 매 순간 그를 더 나은 배우로 만든다. 그래서 소박하게 말하는 ‘좋은 기회’라는 게 오고 있다는 걸 안다. 잘하는 것보다는, 때로 오래 하는 게 더 의미 있을 수도 있다. 자주 뒤돌아보는 사람은 늦을지언정 틀린 길로 가지 않는다. 40대의 송종호는 이제 흐릿하게나마 그걸 알고 있었다.




스카이블루 재킷과 화이트 셔츠, 네이비 롱 와이드 팬츠 모두 Dunhill, 블랙 레더 스니커즈 Converse.


대학 때 잡지를 펼치면 온통 당신이었다. 나이가 좀 있겠다.(웃음) 워낙 오래전 일이니까. 잡지 작업을 많이 했는데, 연기하면서 그걸 멈췄다. 두 가지 다 잘할 자신도 없었고, 배우가 멋만 부린다고 오해받기도 싫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짧은 생각이었지. 아주 오랜만에 하는 매거진 작업이다.

그래도 앵글 앞에 서자마자 눈빛이 변하더라. 그때 폼 하나도 안 죽었다. 어색했는데, 다행이다. 현장 느낌이 좀 다르다. 전엔 폴라로이드로 테스트 샷을 보고 전부 필름 작업이었는데, 요샌 기술이 좋아진 것 같다.(웃음) 바로 컷을 볼 수 있으니 편하다.

관련 자료를 좀 뒤져봤는데, 인터뷰가 없다. 제작 발표회나 가끔 패션쇼에 참석했다는 기사 외엔 개인적 이야기가 전혀 없다. 활동을 이렇게 오래 했는데, 그게 신기했다. 성격이 외향적이 아니다. 연기하면서 좀 변했지만, 여전히 나서는 게 불편하다. 그리고 일단 연기 잘하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어 조용히 지냈다. 연기를 시작하고 항상 부족함을 느꼈다. 전공자도 아니고, 바탕이 없다 보니 막막했다.

여러 번 질문을 받았겠지만, 배우로 전향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어떤 면에선 휩쓸려서 시작했다. 타고난 재능도 없고, 이거 아니면 죽을 것 같진 않았다. 입대를 앞두고 모델 일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뭔가 지지부진하고 미래에 대한 막연함 같은 게 있었다. 오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자연스레 흘러서 여기까지 오게 됐다.

그렇더라도, 배우라는 직업이 주변 권유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재능이나 열망 없이 쉽게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재능은 없는 것 같다.(웃음) 모델 일을 하면서 배우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 일이 몸에 뱄다. 처음엔 몇 번 고사했다. 끼가 없으니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군대를 전역한 뒤 막연히 연기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거의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스카이블루 재킷과 화이트 셔츠, 네이비 롱 와이드 팬츠 모두 Dunhill.


포즈 취하는 거 보니 끼가 다분한데. 다른 분야이긴 하지만 모델도 끼가 없으면 하기 쉬운 일은 아니다. 처음 모델 일을 할 때, 주변에서도 놀랐다. 나도 모르는 끼가 있는 건가 싶었고.(웃음) 재미있게 했다. 에너지가 넘쳤고,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다. 거기서 얻은 걸로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 같다.

배우들을 만날 땐 필모그래피를 꼼꼼히 본다. 거기서 읽어낼 수 있는 어떤 맥락이 있다. 송종호는 열심히 살았더라. 2007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1년에 2~3편, 많을 땐 4편씩 했다. 나무위키에는 당신에 대한 평이 “소처럼 일하는 배우”라고 돼 있더라. 거기서 열망을 봤다. 기회가 있을 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역의 비중에 상관없이 제의가 들어오면 가능한 한 수락했다. 나이와 경력을 떠나 현장에서 배울 수 있는 게 많다. 나는 밑천이 없는 배우니까, 성실하지 않으면 괴물 같은 배우들과 경쟁할 수 없다. 지금도 그렇다. 작품 제안이 들어오면 감사한 마음으로 성실히 연기한다.

어느 배우가 1년에 세 작품 이상 출연한다는 건 자기 관리를 정말 잘하는 거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아니면 연기밖에 모르는 심심한 사람이든지. 아마 후자일 거다.(웃음) 나는 심심한 사람이다. 주위 사람들도 하나둘 결혼해 떠나가고 있다. 또 나이를 먹다 보니 놀이에 대한 흥미도 떨어지더라. 혼자 있는 시간이 많으니 연기나 작품 말고는 생각할 게 별로 없다.

주연에 욕심이 있을 텐데. 30대 중반에 주연이나 비중 높은 역도 해봤다. 흥행한 작품에도 출연해보고. 그때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배우’에 대한 열망이 생겼다. 그때 일을 가려서 한 적이 있다. 오만했던 거지. 잠깐이었지만, 어리석은 생각을 했던 때라 지금도 낯 뜨겁다. 나이를 먹으면서 잘나가는 것보다는 꾸준히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 뒤론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게 되더라. 그래서 역이 좋으면 비중은 상관없다. 나이가 좀 찼지만,(웃음) 아직도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외모로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전과 달라진 것도 별로 없어 보이고. 그런데 좀 깊어진 느낌이다. 배우들은 겉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좀 다른데, 그게 보였다고 할까. 고된 삶과 피폐해진 정신 때문에?(웃음) 천직이 배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어쨌든 이 일을 하고 있으니 배우인 건가?(웃음)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항상 새롭다. 대본 리딩 때 가장 절실히 느끼는데, 10년 넘게 했지만 지금도 어색하다. 그리고 작은 역이라도 캐릭터가 다르니 매번 작품을 시작할 때 갓 연기자가 된 느낌이다.



아이보리&베이지 패턴 믹스 니트 Ordinary People.


슬럼프가 있었나? 필모그래피엔 공백이 없어서 꾸준했을 것 같다. 슬럼프까지는 아니고, 일을 10개월 정도 쉰 적이 있다. 작품이 들어오지 않았다. 작품 끝나고 3개월까지는 좋다. 그러다 6개월쯤이 되면 불안하고,(웃음) 그게 넘어가면 별의별 생각이 다 난다.

영화가 좀 적다. 그게 아쉽다. 많은 배우가 영화를 하고 싶어 한다. 나도 문을 두드린 적이 있었다. 제작 단계에서 엎어지거나 스케줄이 어긋나 출연하지 못한 작품이 몇 개 있다. 항상 아쉬운 부분이다. 최근엔 작은 규모의 영화 출연 제의가 있었는데, 고민 끝에 고사했다. 사이즈 문제가 아니라 배역이 문제였다. 아빠 역할인데, 장가도 안 간 내가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

영화는 연기자가 좀 익어야(?) 빛이 나는 장르니까, 지금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신선할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치열하니까. 괴물 같은 배우들의 틈바구니에서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있다. 어제 <기생충>이 아카데미에서 상을 휩쓰는 것을 보니 가슴이 뜨거워지더라. 영화는 참 대단하다. 조금 더 연마해 언젠가는 꼭 다시 도전해볼 거다.

40대의 삶은 어떤가. 40대 초반까진 우울했다. 청춘이 다한 느낌이 들더라.(웃음) 눈에 보이지 않는 제약에 구속당하는 것 같았다. 나른하고 허무한 감정이 좀 오래갔다. 그리고 심심한 거.(웃음) 요새는 편안해졌다. 결국엔 사람이더라. 관계가 좁아져도 좋은 사람 몇이 옆에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만약 내가 결혼한다면 그런 부분이 더 개선되겠지. 인생을 함께하며 가끔 술 한잔하는 거. 지금은 그런 노년을 생각한다.

나도 곧 마흔이다. 많은 선배가 30대보다 40대 삶이 더 편안하다고 한다. 송종호의 경우는 어떤가. 스타가 되고 싶다는 욕심은 점점 옅어지는 듯하다. 그런 강박이나 굴레에서 벗어나니 마음이 편하다. 현실을 인정하게 되니까.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없는 것이 뭔지, 지금은 안다. 이젠 조급함도 없고, 언젠가 기회가 있을 거란 생각만 한다. 내 나이 또래 배우들이 그런 것 같다. 주연을 맡는 몇몇 배우를 제외하곤 비슷한 고민을 할 거다. 배역을 맡기 어중간한 나이거든. 그래서 나 역시 과도기를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40대 송종호의 고민은 무엇인가? 여전히 미래에 대한 것. 막연한 것이 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일상을 어떻게 즐겁게 보낼지, 연기는 또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불안.

15년 차 배우인데, 여전히 연기에 대한 갈등과 고민이 있다. 더 잘하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열망이 커진다. 그래서 중간중간 체크한다. 내 연기는 어떤지, 나는 어떤 배우인지,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하는지 스스로 질문하다 보면 흐리게나마 길이 보인다.



플라워 패턴 네이비 맥 코트 Beyond Closet, 화이트 라운드 티셔츠와 블랙 와이드 팬츠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SNS를 보니 골프를 좋아하는 것 같더라. 핸디캡은 어느 정도인가?  잘 맞을 땐 싱글 스코어도 나온다. 10년 정도 됐는데, 요샌 거의 유일한 취미다. 결국 할 게 없더라.(웃음) 골프가 성격을 많이 바뀌게 했다. 예전에는 아는 사람만 만났다. 모르는 사람이 있는 자리는 불편해서 안 갔다. 그런데 골프를 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됐다. 성격도 밝아졌고, 외향적으로 변했다. 골프는 참 좋은 운동이다.

술은 즐기는 편인지?  좋아하는 건 아닌데, 마셔야 할 자리면 버티는 수준은 된다. 얼마 전 대본 리딩을 마치고 회식이 있었는데, 끝까지 살아남았다.(웃음)

골프 말고 다른 취미는 무엇인가? 그냥 집에서 쉰다.(웃음) TV나 영화를 보고 배가 고프면 사람들을 만나 밥을 먹는다. 요새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다. 전엔 궁금하지 않던 경제나 정치 이야기. 요 몇 년 동안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게 좋더라. 우리 쪽 일 말고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이 일을 오래 했다. 권태나 지루함 같은 걸 느낄 때도 있겠다. 사는 게 다 비슷하다. 일단 직업이니까, 나도 결국 먹고살려고 연기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가려가며 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가끔은 지루하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맡은 배역에 다른 느낌을 가지려 한다. 사람은 모두 다르니까, 그때 일상이 환기되는 느낌이다. 이 일의 장점인 것 같다. 타인의 삶을 살아볼 수 있다는 것.

드라마 <우리, 사랑했을까>가 6월부터 방영한다. 시놉시스를 훑어봤는데, 지금의 송종호와 가장 가까운 캐릭터처럼 보이더라. 코로나 바이러스로 촬영이 좀 밀렸다. 대본 리딩만 8~9번 했는데, 그래서 배우들끼리 친해지고 캐릭터 준비도 잘 된 것 같다. 소위 잘나가는 스타로 출연한다. 아, 나랑 거리감이 좀 있는데.(웃음) 자기중심적 사람이지만, 상처도 있고 다채로운 인물이다.

이번 드라마가 송종호에게 어떤 터닝 포인트가 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준비를 많이 하고 있다. 시나리오 좋고, 배우들의 합도 잘 맞는다. 특히 사랑이나 결혼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보면 공감할 만한 요소가 많다.

아까 나눈 말이 계속 걸린다.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하나?’ 같은 심각한 고민을 여전히 하면서도 이 일을 계속 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뭘까? 그러니까, 나도 그게 신기하다.(웃음) 나는 무엇으로 버텼을까. 또렷한 무기도, 특출한 점도 없는데. 주변 사람들이 계속 하는 걸 보면 운명 같다는 말도 한다.

그래도 뭔가 있으니 지금껏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제라도 찾아봐야겠다.(웃음) 아직 멀었다. 그저 나쁜 짓 안 하고 스태프들과 친하게 지내려는 것 정도가 내 장점이다. 앞으로도 꾸준히 일할 수 있는 배우로 남고 싶다. 좋은 일은 그사이에 운명처럼 다가올 거라고 생각한다.

 

에디터 조재국(jeju@noblesse.com)
사진 김성용   헤어 지경미(요닝)   메이크업 도경(요닝)   스타일링 윤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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