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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14

드로잉의 향기

코로나19 팬데믹의 분위기에도 겔랑 부부는 제 13회 다니엘 & 플로렌스 겔랑 현대미술재단 드로잉 프라이즈 수상자를 발표했다.

후안 우슬레와 그의 작품. Notas Para Sone Que Revelabas(3), Aquarelle sur Papier, 55×71cm, 2015

플로렌스와 다니엘 겔랑(Florence and Daniel Guerlain) 부부는 30년 넘는 세월 동안 예술품 컬렉터로 살아왔다. ‘겔랑’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도 낯익다. 1828년 피에르-프랑수아-파스칼 겔랑(Pierre-Francois-Pascal Guerlain)이 설립한 이후 프랑스의 걸출한 조향사들을 배출한 향수 명가, 바로 그 겔랑 가문이다. 1994년까지 겔랑 가족이 운영한 향수 사업은 현재 LVMH 그룹에 속해 있다.
창립자의 손자 자크 겔랑(Jacques Guerlain)의 손자 다니엘과 그의 아내 플로렌스는 향기를 파는 사업에 참여하기보다는 예술의 향기를 알리는 쪽으로 삶의 방향을 정했다. 그들은 기념비적 대형 조각부터 사진, 회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수집했다. 비록 지금은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지만, 조경가이기도 한 다니엘은 사유지의 테니스 코트를 조각 공원으로 조성해 전시를 열 만큼 예술 알리기에 열정을 쏟았다. 그럼에도 본격적으로 ‘드로잉’을 수집하기 전 그들은 스스로를 컬렉터라기보다는 ‘예술 애호가’ 정도로 소개했다. 다니엘 & 플로렌스 겔랑 현대미술재단(Fondation d’Art Contemporain Daniel & Florence Guerlain, 이하 겔랑 재단)을 설립한 1996년 이후에야 드로잉을 향한 관심이 체계적 작품 수집과 기부, 수상 프로그램 제정 등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다니엘은 “드로잉은 모든 창작 행위의 첫 번째 제스처다”라는 말로 이 장르가 단순한 밑그림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이유를 설명한다.






다니엘 겔랑과 그의 아내 플로렌스 겔랑.

이들은 2012년 퐁피두 센터에 그동안 수집한 1200점의 작품을 조건 없이 기증했다. 스케치, 에스키스, 손장난하듯 끄적거린 낙서를 비롯해 완성작 드로잉까지 포괄하는 방대한 작품을 국립미술관에 보내기로 한 것은 훗날에도 컬렉션을 온전한 형태로 보전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한 끝에 내린 결정이다. 동시에 수장고에 잠들어 있는 것보다는 보다 많은 사람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길 바랐기에 망설임 없이 기부를 결정할 수 있었단다. 이들의 예술 사랑 여정에서 ‘다니엘 & 플로렌스 겔랑 현대미술재단 드로잉 프라이즈(Daniel and Florence Guerlain Contemporary Art Foundation Drawing Prize)’는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다. 경제적 이익이나 명성 등을 얻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대로 드로잉을 열성적으로 모은 부부는 2007년부터 좀 더 적극적으로 미술계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정한 이 상은 1년에 한 번, 3명의 예술가를 선정해 상금과 함께 전시 기회를 제공한다. 지금까지 수상 작가 중에선 제57회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 참여한 치프리안 무레샨(Ciprian Mureșan), 2016년 마르셀 뒤샹 프라이즈 파이널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울라 폰 브란덴부르크(Ulla von Brandenburg), 음악과 텍스트 등의 요소가 어우러진 개념적 드로잉으로 주목받고 있는 요린데 포크트(Jorinde Voigt) 등이 눈에 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아티스트를 발굴해 소개하겠다는 취지로 시작한 이 제도의 안목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Florian Pumhosl, Study for Georgian Letter 1599, Monotype Oil based Paint on Paper, 36×25.5cm, 2015

올해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전 세계 미술계가 거의 마비 상태에 이르렀지만, 지난 3월 말 겔랑 재단은 예정대로 수상자를 발표했다. 한자리에 모일 수 없었기에 9인의 심사위원은 이메일로 후보에 관한 논의를 거쳐 투표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올해의 수상자로 뽑힌 3인의 예술가는 후안 우슬레(Juan Usle), 캘럼 이네스(Callum Innes), 플로리안 품회슬(Florian Pumhosl)이다. 그중 우승의 영광은 스페인 출신 작가, 후안 우슬레에게 돌아갔다. 1954년생인 우슬레는 1980년대 이후 뉴욕에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는 작가다. 수채 기법을 주로 활용하는 그의 작품은 파란색, 녹색, 회색, 검은색의 미묘한 농담 차가 자아내는 효과 덕분에 섬세하고 서정적이다. “추상의 역사와 풍경화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는 평가를 받는 작가지만, 그의 작품이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호흡과 심장박동 같은 자기 몸의 리듬과 더불어 자전적 요소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규칙적으로 일렁이는 물의 움직임, 빛의 흐름처럼 자연 속 리듬을 포착하는 드로잉 과정도 작가에겐 일종의 의식(ritual)과 같다. 우슬레의 드로잉은 결국 작가 자신이 바깥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거나 합치되는 기분을 만끽하는 순간의 내밀한 흔적인 셈이다.






캘럼 이네스와 그의 작품. Untitled, Corrugated board, gouache on Arches 600 gsm HP, 57×76cm(unframed), 2019

다른 수상 작가 2인의 면면도 눈여겨볼 만하다. 1962년 영국 에든버러에서 태어난 캘럼 이네스는 1995년 이미 터너상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탄탄한 이력을 쌓아온 작가다. 당시 주요 흐름이던 구상회화에 관심을 둔 젊은 시절을 제외하곤 추상회화에 침잠하며 “더하고 빼는 과정, 제작과 해체(unmaking), 현존과 부재” 등의 개념을 작업의 중심에 두고 발전시켜왔다. 간결한 모노크롬 회화가 주를 이루는 그의 작품 세계는 보다 전통적인 추상의 문법을 기반으로 한다. 1971년생으로 다른 2명에 비해 젊은 세대에 속하는 오스트리아 출신 플로리안 품회슬은 작가인 동시에 미술사학자다. 20세기 초기의 추상과 모더니즘에 매료된 품회슬은 그 언어를 계승하며 직선과 곡선을 활용한 기하학적 구성을 보여준다. 현실의 구체적 대상에서 영감을 얻고 그것을 추상으로 재해석하는 그에게 드로잉은 ‘비율, 질감과 구조에 관한 연구를 위한 매트릭스’다.
이들 중 우승자인 우슬레는 1만5000유로(약 2000만 원), 그 외 2인은 각각 5000유로(약 670만 원)의 상금을 받게 된다. 한편,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이동제한령으로 5월 말 파리 중심가의 팔레 브롱냐르(Palais Brongniart)에서 열리는 드로잉 전문 아트 페어 ‘살롱 뒤 데생(Salon du Dessin)’ 기간에 치를 예정이던 시상식과 전시는 모두 취소되었다.
다니엘과 플로렌스 겔랑은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현재의 끔찍한 시간을 돌파하기 위해 우리는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지지하는 일을 지속할 수 있도록 힘쓸 것이다”라며 “올가을 혹은 겨울에라도 수상 작가의 전시가 가능하도록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는 계획을 귀띔했다.

 

에디터 김미한(purple@noblesse.com)
이가진(미술 저널리스트)
사진 제공 다니엘 & 플로렌스 겔랑 현대미술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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