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큐브를 떠나 흙으로 들어간 예술 | Noblesse

NEWSLETTER

노블레스 매거진의 뉴스레터를 신청해보세요.
트렌드 뉴스와 이벤트 소식을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닫기

화이트 큐브를 떠나 흙으로 들어간 예술

ARTNOW
구글 선호 매체로 추가

구글 검색과 ai 답변에서
노블레스 닷컴을 우선적으로 보여줍니다.

자연을 바라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흙을 돌보고 식물을 기르는 과정 자체를 창작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 파리 남쪽 전원에 자리한 91530 르 마레는 농업과 예술, 기술과 공동체가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환경에서 예술이 우리 삶과 어떻게 다시 연결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살아 있는 실험실이다.

에디트 드킨트(Edith Dekyndt)의 설치전 〈Visitation Zone, Chapter III〉. 풍요롭고 습한 토양에 묻힌 천 조각을 설치 작업에 활용했다.

파리에서 남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에손 지역의 한 전원 마을. 도시의 번잡함에서 한발 비켜난 이곳에, 동시대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안하는 공간 91530 르 마레(91530 Le Marais)가 있다. 이곳은 갤러리도, 농장도, 연구소도 아니고 동시에 그 모든 정체성을 포괄하는 복합 아트 센터로, 예술과 농업, 생태와 기술, 생산과 사유가 공존한다. 91530 르 마레가 자리한 부지는 17세기부터 지역공동체의 농업 인프라로 사용된 곳이다. 한때 이곳은 곡물과 씨앗을 저장해 지역의 생존을 떠받치던 장소였고, 농업 문화의 중심지였다. 오늘날에도 당시의 건축구조와 유기농 토양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이 인프라는 91530 르 마레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이곳에서 예술은 이미 존재하던 땅의 기억 위에 겹쳐져 탄생한다. 91530 르 마레는 빅투아르 드 푸르탈레(Victoire de Pourtalès)와 뱅자맹 에메르(Benjamin Eymère) 부부가 함께 시작한 프로젝트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영역에서 경력을 쌓았지만, 예술을 사회와 삶의 맥락에서 다시 사유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이 공간을 함께 구상했다. 빅투아르는 파리 현대미술계에서 오랜 시간 활동해온 큐레이터이자 갤러리 디렉터다. 타데우스로팍 갤러리에서 국제 전시 프로그램과 현대 드로잉 부서를 이끌었고, 이후 데이비드 즈워너 파리의 디렉터로 활동하며 글로벌 아트 시스템의 중심부를 직접 경험했다. 한편 뱅자맹은 법과 미디어, 글로벌 비즈니스 전략 분야에서 활동해왔다. 파리 2대학교와 뉴욕 대학교 법대를 거쳐 국제적 로펌에서 경력을 시작했으며, 이후 패션 · 문화 미디어 그룹 로피시엘(L’Officiel)의 국제 전략을 총괄했다. 그는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과 구조 설계, 새로운 경제 모델을 다룬 경험을 바탕으로, 예술과 농업, 기술을 연결하는 장기적 플랫폼으로서 91530 르 마레의 토대를 설계했다.

빅투아르 드 푸르탈레.
뱅자맹 에메르.

2012년 이미 아트 매거진 〈로피시엘 아트(L’Officiel Art)〉를 공동 창간하며 예술과 미디어의 새로운 관계를 실험한 두 사람에게 91530 르 마레는 그 연장선이자 훨씬 더 급진적인 확장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예술은 전시를 위한 작업의 결과물이 아니다. 이곳은 재생 농업(regenerative agriculture)을 실천하는 실제 농장이며, 대마와 대나무 같은 식물을 재배하고, 이를 섬유, 건축자재, 토양 개선 재료로 전환하는 전 과정을 연구한다. 대마 섬유는 과거 인류 문명의 핵심 재료였으며, 종이 · 로프 · 직물의 역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91530 르 마레는 이러한 물질의 역사적 맥락을 되살리면서, 오늘날의 환경문제와 연결되는 새로운 활용 가능성을 탐구한다. 예술가들은 이곳에서 작품 제작 외에 토양의 상태를 관찰하고, 농업 노동의 리듬을 경험하며, 재료가 생산 · 변형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한다. 흙을 밟고, 냄새를 맡고, 손으로 만지는 경험은 작업의 출발점이 되고, 작품은 그 과정의 응축인 셈. 그리고 예술가뿐 아니라 농부, 엔지니어, 과학자, 디자이너, 기업가가 함께 테이블에 앉아 토양과 재료 등에 대해 논의하며 ‘지속 가능성’이 실제 생산과 구조의 변화로 이어지게 하는 데 힘쓴다. 최근에는 토양의 가치를 경제적으로 가시화하기 위한 프로젝트 ‘소일로닉(Soilonic)’을 통해 디지털 기술과 생태적 사유를 결합하는 실험도 이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91530 르 마레가 제안하는 것은 예술의 역할에 대한 재정의다. 토양을 살피고, 공동체를 연결하며, 우리가 발 딛고 선 세계를 다시 인식하게 하는 감각적 · 지적 장치로서 동시대 예술의 또 다른 미래를 제시한다.

에드가르 사랭(Edgar Sarin)의 ‘지하의 향수 어린 블루스(Subterranean Homesick Blues)’. 흙에서 추출한 천연 안료로 완성한 프레스코화는 살아 있는 미생물에 의해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한다. 
도예가 10인에게 풍부한 광물성 점토인 지역의 흙을 사용해 도자기 시리즈를 디자인하도록 의뢰한 뒤, 그 결과물을 전시했다. 

91530 르 마레는 기존 갤러리와 어떤 점에서 가장 다르다고 생각하나요?

가장 큰 차이는 ‘맥락’입니다. 화이트 큐브는 작품을 중립적 환경에서 보여주기 위한 공간이지만, 이곳에서는 장소 자체가 이미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91530 르 마레는 17세기부터 지역공동체를 위해 곡물과 씨앗을 저장하던 농업 시설이었습니다. 이 지역의 경제와 삶 그리고 토양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곳이죠. 그래서 여기서는 작품을 설치한다기보다, 장소와 함께 작업을 시작한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해요. 관람객 역시 냄새를 맡고, 흙을 밟고, 공간의 온도를 느끼며 예술을 경험합니다. 시각 중심의 감상에서 벗어나, 오감 전체가 열리는 경험이라 할 수 있죠.

화이트 큐브에서 경력을 쌓은 후, 이런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오랫동안 파리에서 갤러리스트로 일했어요. 화이트 큐브 시스템은 분명 장점이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예술이 점점 맥락을 잃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죠. 작품은 점점 더 시장과 가격 중심으로 소비되고, 예술가와 관람객 그리고 장소의 개인적 관계는 사라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예술이 다시 삶과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습니다. 그 질문의 답이 바로 이곳이고요.

농업과 예술을 연결하는 관점은 어디에서 비롯했나요?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제 아버지는 농부였어요. 식물과 토양,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감수성이 굉장히 풍부한 분이었죠. 특히 식물 치료와 자연 순환에 관심이 많았고, 동시에 예술을 사랑했습니다. 집에는 늘 작품과 책이 있었고, 예술은 우리 가족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존재였어요. 그래서 예술과 농업을 분리해 생각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언젠가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또렷해졌죠.

91530 르 마레에서 예술가들은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나요?

우리는 예술가들과의 대화에서 모든 것을 시작합니다. 이곳에서 어떤 재료가 생산되는지, 토양의 상태는 어떤지, 어떤 농업적 · 역사적 맥락이 있는지 함께 이야기합니다. 예술가들은 재료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변형되는지에 강한 호기심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대마를 재배하고, 섬유와 건축자재로 변환하는 과정을 직접 연구해요. 그 과정 자체가 예술가들에게는 하나의 리서치가 되죠. 작업은 매우 유기적으로 발전하며, 완성된 결과보다 과정 그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아델라이데 초니(Adélaïde Cioni)는 3년간 농장에서 재배하는 대마를 연구한 후 보편적 기하학 형태를 사용해 연극 무대 같은 몰입형 전시를 탄생시켰다.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하는 작가 오레스 베티에(Aurèce Vettier)가 16세기부터 현재까지 이 지역의 식물 표본 데이터셋을 기반으로 완성한 작품. 

농업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분야이기도 하죠.

맞아요. 농업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위험한 일입니다. 기후, 바람, 토양 상태에 따라 모든 것이 좌우되거든요. 우리는 대마 재배를 위해 그르노블의 엔지니어들과 협업했고, 작은 변수 하나가 전체 수확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매번 실감합니다. 그래서 저는 농부들을 단순한 생산자가 아니라 진정한 기업가이자 토양의 관리자라고 생각해요. 농부들이 없다면, 우리 토양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예술이 농업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나요?

예술은 농업을 설명하는 또 다른 언어가 될 수 있어요. 토양, 박테리아, 미생물, 순환이라는 개념은 말로 설명하면 어렵지만, 예술은 그것을 이미지와 감각, 시적 언어로 전달할 수 있죠. 그래서 우리는 예술가뿐 아니라, 앞으로는 글을 쓰는 작가와 사상가들도 이곳에 초대하려 해요. 토양이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 다시 정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예술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요?

예술은 다시 ‘장소’와 ‘삶’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더 이상 반복되는 아트 페어와 과도한 시장 논리에 매력을 느끼지 않습니다. 작품을 소유하는 행위 역시 하나의 ‘의미 있는 선택’이 되기를 원하죠. 미래의 예술은 더 이상 고립된 시스템 안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술가는 사회, 자연, 다른 산업과 끊임없이 연결되며, 그 속에서 새로운 역할을 발견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젊은 예술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

자신의 직관을 믿으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자연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도시와 자연,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하고 재료와 역사, 소리와 감각에서 영감을 얻길 바랍니다. 예술은 쉽지 않은 길이지만, 세상을 다시 보게 하는 힘을 여전히 지니고 있어요. 그 가능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면 해요.

  • 양윤정(아트 칼럼니스트)
  • 에디터 김수진
  • 사진 91530 르 마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