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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3-23

좋은 취향을 경험하고 싶을 때

현대미술 전시 공간 '뮤지엄헤드'와 찻집 '델픽'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유수진 대표를 만났다.

위쪽 뮤지엄헤드와 델픽이 공존하는 건축물 앞에 선 유수진 대표.
아래쪽 2020년 12월 열린 개관전 <나메>의 설치 전경. 사진 제공 뮤지엄 헤드. 사진 조준용

에디터가 뮤지엄헤드와 델픽의 존재를 알게 된 건 미술계의 마당발이라 불리는 한 선배 기자를 통해서였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곳에는 정겨운 한옥을 비롯한 주거 건물에 둘러싸인 모던한 2층 건물이 있었다. 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1층에는 꽤 많은 관람객이 있었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공간을 탐색하는 방문객도 있었다. 뮤지엄헤드의 개관전 <나메(Name)>를 꼼꼼히 둘러본 후 올라간 2층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탁 트인 시야와 내리쬐는 햇살을 만끽할 수 있도록 커다란 통유리창까지. 커피가 아닌 오로지 차 종류만 즐길 수 있는 델픽에서 차향을 음미하며 오후를 보냈다.
인상적 경험을 제공하는 이 공간을 기획한 유수진 대표는 뮤지엄헤드와 델픽을 찾는 이가 에디터처럼 사전 정보 없이 왔다가 시간 속을 유영하는 예술과 차향에 흠뻑 취하기를 바랐다. “이곳은 남향이라 햇빛이 많이 들어옵니다. 저는 이 건물을 지을 때 빛을 염두에 뒀어요. 햇빛이 너무 좋아 놓치면 아쉬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죠. 2층 카페 공간뿐 아니라 1층 전시 공간 정면 역시 모두 창으로 만들어 자연광이 고스란히 들어올 수 있도록 했습니다.” 기존의 화이트 큐브를 표방하는 전시 공간이 많아 위치적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다는 것이 유수진 대표의 설명. 뮤지엄헤드와 델픽이 들어선 이곳은 원래 그녀가 나고 자란 집이 있던 장소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 대표는 주택의 모습은 지우면서도 옛 흔적을 남긴 채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건축물을 원했다. 갤러리와 미술관 등 여러 미술 공간이 밀집한 삼청동과 지척이면서도 분리된 이점이 있었다. “삼청동 옆 동네라 이곳에 거주하거나 오가는 분들은 대부분 전시 공간에 대해 알고 계시지만 막상 전시가 많지 않다 보니 저희가 지역에 예술에 대한, 또 공간에 대한 좋은 인상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그녀가 기획한 현대미술 공간은 매체를 국한하지 않고, 현시점에서 알아야 하거나 관심을 보일 만한 주제를 다룰 수 있도록 마련했다.





왼쪽 류연희 작가의 금속공예 작품과 최근 한식구가 된 스튜디오 포의 수제 받침. 앞으로도 유수진 대표는 국내 공예 작가를 발굴해 소개할 계획이다.
오른쪽 델픽이 위치한 2층 전경. 이곳에서 유수진 대표가 셀렉트한 우리나라 공예 작가의 작품을 살펴보고 구매할 수 있다.

“예술을 좋아하고 전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이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작가도 포함해서요. 이름에 ‘뮤지엄’이 있어 이곳을 미술관 같은 기관으로 인지하기도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뮤지엄헤드’는 뮤지엄에 ‘미친’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비영리 전시 공간입니다. 예술을 잘 알지 못해도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든 편안하게 찾을 수 있는 곳으로 계획했어요.” 유수진 대표는 영국 유학 시절 만난 권혁규 큐레이터를 든든한 지원군으로 전시 기획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저도 회화를 전공했지만, 전시 공간 운영이나 기획은 처음이다 보니 권혁규 큐레이터를 비롯해 전시팀에서 함께 일하는 허호정 큐레이터의 능력이 무척 중요합니다. 이들의 역량과 노력 덕분에 뮤지엄헤드의 정체성이나 방향성을 좀 더 확고히 할 수 있었어요.” 유수진 대표는 뮤지엄헤드가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2021년 가을 게이 작가 아홉 명과 함께 성 정체성을 다룬 전이나 오는 3월 4일부터 4월 13일까지 열리는 여성에 관한 전시 <말괄량이 길들이기>처럼 미술관이나 갤러리 혹은 대안 공간에서는 쉽게 꺼내기 어렵지만 반드시 다뤄야 할 시의성 있는 주제를 예술로 풀어내는 것 역시 뮤지엄헤드가 추구하는 전시의 방향성이다. 어떤 매체도 차별하지 않는 것 또한 특징이다. 전시 공간은 회화를 위한 벽도, 설치 작품을 위해 마련한 널찍한 공간도 있다. 중간에 탁 트인 홀은 퍼포먼스를 펼치기에도 무리가 없다. “예술은 모든 것을 아우르잖아요. 뮤지엄헤드가 관람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는 그릇을 한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야 더 풍부하고 빈틈없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유수진 대표와 뮤지엄헤드는 우리나라 작가와 그들이 이루는 미술계를 위해 크든 작든 유의미한 흔적을 남기기 위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는 전시뿐 아니라 출판이라는 형태로도 발현되고 있다. 뮤지엄헤드는 권혁규 큐레이터의 진두지휘 아래 1년에 한 번 <뉴스페이퍼>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글 좀 쓴다는 기획자나 전문지 에디터는 물론 다양한 작가들이 지면을 구성하는데, 이때 특정 주제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기고한다. 실제로 2021년 12월에 발행한 <뉴스페이퍼> 두 번째 에디션에는 총 53명이 참여했다. 어떤 이는 ‘낱말잡담’, ‘2021 신년 운세 다시 보기’와 같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아이디어를 공유했고, 또 어떤 이는 여성이나 자신의 전시에 관한 좀 더 진중한 이야기를 싣기도 했다. “참여하는 분이 많아 진행하기 쉽지 않은 프로젝트인데, 저희는 이를 통해 좀 더 다양한 예술인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들려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뉴스페이퍼>를 읽으면서 지난 한 해 우리나라 동시대 예술인의 생각을 좀 더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죠. 앞으로도 매년 연말에 발행할 계획입니다. 올해는 또 어떤 이야기를 펼쳐 보일지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위쪽 영국에서 사모은 찻잔(왼쪽)과 뮤지엄헤드에서 연간 발행하는 <뉴스페이퍼>(오른쪽).
아래쪽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찻잔 세트. 여백의 미를 강조한 간결한 디자인이 유수진 대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금까지 전시 공간 뮤지엄헤드를 집중적으로 살펴봤다면 이젠 델픽으로 넘어가보자. 유수진 대표에게는 처음 공간을 구상할 때부터 차 브랜딩과 카페에 대한 확고한 사업 계획이 있었다. “사람들이 처음부터 이 두 층을 각각 다른 공간으로 인식하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공간 이름도 각각 지었죠. 뮤지엄헤드와 델픽 모두 독립적으로 잘 뻗어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말마따나 1층 뮤지엄헤드는 벽이나 조명을 화이트로 통일해 작품이 돋보이는 환경을 조성했다면, 2층 델픽은 ‘따뜻한 차’를 테마로 우드 톤과 베이지 톤이 적절히 섞여 포근한 느낌을 전한다. “이 두 공간을 관통하는 공통 테마가 있다면 빛과 텍스처입니다. 이 요소를 바탕으로 잘 찾아보면 마감하지 않은 채 드러난 부분에서 공통적 표면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영국에서 유학하던 중 차 문화에 흠뻑 빠진 유수진 대표는 자신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한 브랜딩에 나섰다. 카페에서 사용하는 잔과 주전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다기가 국내 공예 작가의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그릇 수집하는 걸 좋아해요. 라이프스타일 관점에서 볼 때 가볍게 차 한잔 즐길 때도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에 담아 마시면 더욱 풍부하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요.” 작가들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공예품을 활용하면서, 차 마시는 행위 역시 작가의 예술적 행위에 동참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도록 만들었다. “대부분 차를 마실 때는 격식이나 예절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죠. 저는 여행할 때 그 지역에 있는 찻집에 꼭 들르는데, 모든 나라가 저마다 차 문화가 있어요. 그리고 그 문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했다는 것을 느끼곤 해요. 차를 끓여 마시기 위해서는 큰 결심이 필요한 것처럼 얘기하는데, 격식에 구애되지 않고 그냥 좋아하는 대로 편하게 마시면 전혀 번거롭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영국에서 처음 찻잔을 수집할 때 화려하면서 예쁜 패턴이나 한국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브랜드 위주로 모았다. 차에 대한 지식과 애정이 점점 쌓이면서 유수진 대표는 다기에서도 자신의 취향을 찾아냈다. “지금은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거나 조금 울퉁불퉁한 모습에 더 매력을 느껴요. 공간과 연결되기도 할 텐데요, 제가 좀 더 관심 있게 보는 물건은 대체로 표면이 무채색 톤으로 매끈하지 않은 거예요.” 그녀가 아끼는 애장품으로 소개한 찻잔과 찻주전자를 소개하며 “하나하나 고를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한데 모아두니 어디든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디자인”이라며 은은한 차향과 조화를 이루는 다기만의 매력을 소개했다. 델픽에서는 유수진 대표가 직접 고른 공예 작가의 다기를 판매하기도 한다. 현재 델픽의 공간을 가득 채운 제품은 전적으로 그녀의 취향을 따르지만, 소박한 바람이 있다면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이 예술 작품도 접하고 이를 직접 사용해 차를 마시며 생각을 바꿨으면 하는 것이다. 현재 그녀가 소개하는 작가는 박성욱·최민록·허상욱·류연희 등 열명이 훌쩍 넘으며, 올 2월부터는 금속공예를 주로 선보이는 ‘스튜디오 포’도 새롭게 가족으로 맞았다. 이렇게 국내 공예 작가 위주로 컵, 머그잔, 주전자, 티스푼, 받침 등 다양한 제품을 컬렉팅하고 실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작가를 긴밀하게 서포트한다.
“처음엔 저도 임팩트가 강한 차에 호감이 갔어요. 자연스럽게 센 맛에 반응한 거죠. 그것부터 시작하다 보니 점점 더 은은한 차향에 매료됐어요. 델픽에서 소개하는 싱글 티 라인은 전부 그 차가 유명한 국가와 도시에서 들여와요. 녹차와 말차를 제외하고는 중국, 대만, 모로코 등 해외에서 수입하죠. 델픽에서 차를 마시며 그 맛의 정수를 느꼈다면, 분명 여러분도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것이야말로 델픽의 역할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그녀의 삶은 오롯이 뮤지엄헤드와 델픽에 맞춰져 있다. 앞으로 예술과 차가 공유하는 지점은 어떤 것이 있을지, 그것을 어떻게 다른 사람과 나눌지 고민하면서 하루하루 새로운 일을 기획하는 유수진 대표. 올해는 전시를 몇 번이나 개최할지, 다가올 여름엔 어떤 신제품을 내놓을지 이미 계획을 세워둔 그녀가 가꿔나갈 뮤지엄헤드와 델픽이 기대된다면 고즈넉한 가회동으로 발길을 옮겨보자.

 

에디터 정송(song@noblesse.com)
사진 이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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