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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16

전쟁 앞에 선 예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하는 영국 미술계의 움직임을 전한다.

포토그래퍼 톰 스킵(Tom Skipp)이 ‘우크라이나를 위한 예술’ 펀드레이징 프로젝트에 판매한 ‘Катерина Вишнева in Kyiv on 24th of May 2018’.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몇 달째. 유엔난민기구의 4월 발표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 약 490만 명이 국경을 넘어 피난했다. 수도 키이우 인근 소도시 부차에선 러시아군이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증거가 나오는 중. 국제법이라는 국가 간 약속이 무용지물이 된 상황에서, 비인간적 폭력과 전쟁의 참상을 구시대 역사로 치부한 건 우리의 오만이었다.
그런 가운데 영국 BBC는 예술을 수호하기 위한 우크라이나인의 노력을 기사화했다. 키이우 출신 예술 평론가 콘스탄틴 아킨샤(Konstantin Akinsha)의 말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문화정보정책부는 전쟁 발발 몇 주 전 미술관 소장품 보호와 대피 지침을 발표했고, 약탈 등 피해에 대비해 디지털 파일 리스트를 정리하고 작품을 은밀한 장소로 옮겼다. 박물관 직원들이 작품 보관소에 장벽을 치고 잠을 자며 지키기도.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4월 1일까지 미술관, 박물관을 포함해 최소 53개의 우크라이나 문화 유적지가 러시아군 폭격에 피해를 입었다.
이렇듯 전쟁은 어떤 작품이 기록으로만 남을 것인지, 혹은 후대에 전해질 것인지 가르는 분기점이 된다. 하지만 예술이 폭력에 무기력한 존재인 것만은 아니다. 하나의 권력으로서 그에 당당히 맞서고 있는 것.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기 위한 시민사회의 움직임이 활발한 영국 미술계에서도 그러한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국기 색으로 조명을 밝힌 테이트 브리튼의 모습.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 파괴된 탱크의 모습.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일주일을 넘긴 시점에 영국의 주요 예술 기관은 공식 성명을 통해 러시아를 규탄하고 우크라이나 국민과 연대하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로열 오페라하우스, 사우스뱅크 센터 같은 기관은 단시간 내에 콘서트 등 행사를 조직해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한 펀드레이징을 진행했다. 가장 먼저 성명을 낸 곳은 영국문화원이다. 100여 개국에서 문화 교류를 증진하는 비정부 공공 기관인 영국문화원은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을 주관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들은 3월 1일 공식 성명을 통해 우크라이나 국민과 연대하겠다고 밝혔다. 로열 아카데미(RA)도 아카데미 임원이자 페이트런인 러시아 재계 거물 표트르 아벤(Petr Aven)과 절연하고, 전시 중인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전시 후원금도 반납했다. 2월 28일 공개한 유럽연합의 러시아 제재 문서에 따르면 아벤은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 올리가르히(신흥 재벌) 중 한 명이다.
테이트 미술관은 3월 7일 공식 성명을 발표해 전 세계 미술 기관과 함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철수하도록 글로벌 캠페인을 진행할 것이며, 러시아 정부와 관계 있는 누구와도 함께 일하거나 관계를 지속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더불어 우크라이나에 있는 미술계 동료들에게 연대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매일 저녁 테이트 브리튼 건물을 우크라이나 국기의 노란색과 파란색 조명으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영국 의회와 액티비스트들이 아래로부터 권력을 행사한 결과로 읽힌다. 러시아 이슈에 대한 영국 통합 정당 의장을 맡은 노동당 의원 크리스 브라이언트(Chris Bryant)는 트위터를 통해 “영국 문화 기관과 갤러리, 뮤지엄은 푸틴 지지자들과 절연하고 러시아의 피 묻은 돈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내셔널 갤러리는 SNS를 통한 우크라이나인의 요구에 에드가르 드가(Edgar Degas)가 그린 소장품의 제목을 ‘러시아 무용수들(Russian Dancers)’에서 ‘우크라이나 무용수들(Ukrainian Dancers)’로 바꿨다. 갤러리 대변인은 “이 작품 제목은 몇 년간 논의 대상이었지만,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로 작품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며 작품의 특성을 더욱 잘 나타내는 제목으로 변경하게 됐다”라고 밝혔다. 여전히 많은 갤러리와 미술관이 구소련 작품을 러시아 작품으로 뭉뚱그려 표기하는 상황에서 이례적이고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정당한 목적 없는 러시아의 침공은 우크라이나의 소프트 파워를 강화하고 있다.





러시아 재계 거물 표트르 아벤과의 동행을 종료한 로열 아카데미.





에드가르 드가의 ‘우크라이나 무용수들’(1899).

개인이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해 펀드레이징에 나선 사례도 있다. 2019년부터 2020년까지 영국문화원이 주최한 영국·우크라이나 예술가 교류 프로그램 참여 작가들은 전쟁의 참상을 전해 듣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크라우드 펀딩 웹사이트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판매해 우크라이나를 도운 것. ‘우크라이나를 위한 예술(Art for Ukraine)’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한 펀드레이징은 14일간 8000파운드(약 1300만 원)의 수익금을 모았다. 그중 대부분은 우크라이나 적십자사에 보냈고, 1000파운드는 ‘우크라이나 긴급 예술 펀드(Ukrainian Emergency Art Fund)’에 기부했다. 이 펀드레이징을 주도한 조각가 조슬린 맥그리거(Jocelyn McGregor)는 “본질적으로 미술은 생각과 지식을 공유하고 관계를 가꾸어나가며 모두에게 유익한 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면서 우크라이나에 있는 미술계 동료들과 그러한 고민을 함께해왔기에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채러티의 나라 영국에서 채러티 활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런던 소재 예술 단체인 카운터포인츠 아츠(Counterpoints Arts)는 이민자와 난민을 대상으로 하는 작가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전쟁 피해자를 위한 다양한 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곳의 시니어 프로듀서 톰 그린(Tom Green)은 “예술을 통해 영국 사회와 문화 전반의 이주, 난민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미션”이라고 말한다. 카운터포인츠 아츠의 공동 의장 나이마 칸(Naima Khan)과 앨리스 사크라이다(Alice Sachrajda)는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공식 성명을 통해 “예술은 이주의 역경과 고난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이자, 이민자와 난민의 창의성과 탄력성을 기리는 강력한 수단”이라며 6월 20일부터 26일까지 영국 전역에서 ‘치유’를 주제로 진행하는 ‘난민의 주(Refugee Week)’ 행사에서 우크라이나 난민이 겪은 비극과 그들이 현재 처한 상황을 함께 고민하는 자리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에디터 황제웅(jewoong@noblesse.com)
김윤정선(미술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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