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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03

당신과 나의 시간

최재은 작가가 에르메스 현대백화점 판교점 윈도 디스플레이를 탈바꿈했다.

위쪽 최재은 작가. 사진 제공 에르메스 © 남기용
아래왼쪽 ‘Dear my Puppy’, 현대백화점 판교점 에르메스 윈도 디스플레이. 사진 제공 에르메스 © 남기용
아래오른쪽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나무와 인간의 관계와 삶을 아우르는 ‘아소카의 숲’(2010).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 Choi Jae Eun

1970~1980년대 백남준, 오노 요코, 요제프 보이스, 존 케이지 등의 플럭서스(Fluxus) 멤버가 활동했던 일본 소게츠 아트 센터에서 데시가하라 히로시(Hiroshi Teshigahara)를 사사하며 미술의 시간에 들어선 최재은. 건축, 설치, 조각,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그는 거대한 스케일과 섬세한 조형성을 함축한 작업으로 생명의 순환을 이야기하는 작가다. 그동안 최재은은 끝없는 호기심과 탐구정신으로 다양한 물질을 연구하고 극대화해 누구도 쉬이 구현하지 못한 실험적 작업을 선보여왔다. 그런 최재은이 이번엔 현대백화점 판교점에 새로 문을 연 에르메스 윈도 디스플레이를 자신만의 색채로 물들였다. 유리를 활용한 작업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

에르메스의 시그너처는 매장 윈도 디스플레이를 우아한 소극장으로 탈바꿈하는 거예요. 처음 현대백화점 판교점 윈도 디스플레이 협업을 제안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 올해 에르메스의 주제인 ‘가벼움의 미학(lighthearted!)’에 마음이 동했어요. 긍정적이거든요. 가볍다는 건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자연의 영역일 것이고, 가벼움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건 비움, 즉 무소유와 연결이 됩니다. 무소유란 사물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만큼만 가지라는 뜻인데, 이는 우리에게 사물을 대하는 가치 기준을 제시합니다. 작업을 통해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대량생산한 공산품을 뒤로하고 사물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했어요. 인간은 사물의 지배를 받는 존재예요. 산업혁명 이후 소비와 생산에 열중하다 보니 오늘날과 같은 상황을 맞이한 게 아닐까요?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에르메스가 커머셜 브랜드이긴 하지만 기업 DNA에 수공업과 몇 대에 걸쳐 제품을 공유한다는 아이덴티티가 각인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유리에 더 눈이 갑니다. 가벼움과 밝음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니까요. 또 유리는 지속 가능성에 걸맞은 재료이기도 하죠. 유리는 투명함과 정직함의 이미지, 단단하지만 깨지기 쉬운 비결정질 고체이면서 영원한 소재예요. 그래서 저는 투명함에 오브제를 배치함으로써 사물이 최대한의 정직성을 가지고 윈도 디스플레이 안에서 자신만의 오라를 내뿜게 하고자 했습니다. 작업은 자본주의·소비주의의 장막을 거두고, 우리에게 필요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데 의의가 있어요. 첫 질문의 답변처럼 지금은 무조건 생산, 무조건 소비를 지양해야 할 시점이니까요.
예로부터 판교는 말 그대로 다리 역할을 해왔습니다. 삼국시대 때는 동북아 교류의 장이었고, 조선시대 때는 교통과 통신의 요충지였어요. 작가님은 유리로 다리를 제작했는데, 에르메스가 판교에서 어떤 역할을 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으셨나요?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사이에 끼어 있는 게 우리 현실입니다. 이를 반성하고, 더 나은 가치 창출을 향해 판교를 건너야 해요. 현란한 수단과 방법으로 대량생산과 소비를 촉진하는 시대와는 작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르메스의 아이덴티티를 바탕으로 보다 오거닉한 세상에서 같은 별을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소비자 혹은 생산자 한 명의 목소리는 한 장의 유리처럼 연약하지만, 모이면 단단한 다리이자 지향점이 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공동체입니다. 지금은 개개인의 문제의식과 개선 의지를 모아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시기예요.





위쪽 인간과 자연의 이상적인 공존을 시사한 ‘미시-거시’(1995), 제46회 베니스 비엔날레.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 Choi Jae Eun
아래쪽 4만여 개의 유리병으로 제작한 대전엑스포의 ‘재생조형관’(1993).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 Choi Jae Eun

에르메스 윈도 디스플레이 작업은 작가님 세계관의 연장선인 듯해요. 1980년대 소게츠(草月) 아트 센터에서 일본 전통 꽃꽂이인 이케바나(いけばな)를 접하면서 ‘시간과 생명’이라는 주제와 연을 맺으셨습니다. 큰 틀에서 이를 ‘연결’, ‘순환’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근원적 주제에 몰두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는 생명체는 무한과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유한성을 지닌 존재는 흐르는 시간 속의 일부일 뿐이에요. 식물을 꺾는 행위에서 출발하는 이케바나 역시 필연적으로 소멸을 맞이할 수밖에 없어요. 저는 ‘끝’을 ‘순환’으로 돌려놓는 행위를 통해 본질이 무엇인지 고민하고자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제46회 베니스 비엔날레’(1995) 일본 대표로 참가했을 때 일본관 외벽을 형형색색의 플라스틱 파이프로 감쌌고, 필로티 공간은 미로 형태로 구성해 미생물을 촬영한 영상과 제 심장박동을 녹음한 것을 설치했어요. ‘미시-거시’라는 제목 안에서 폭력적인 플라스틱과 미생물의 심장박동 소리가 대치하는 상황은 인간과 자연의 이상적인 공존을 시사합니다.
1986년 처음 시작해 지금도 진행 중인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한국, 일본, 미국, 케냐 등의 땅에 특수 제작한 종이를 묻고, 3~15년 후 다시 꺼내 공기와 접촉하게 하는 것이 작업의 뼈대예요. 종이와 공기가 만나면 화학변화가 일어나 추상화 같은 형상이 드러나는데, 이를 보며 자연의 시간이 빚어낸 문화·생명·역사 등을 고찰해보자는 뜻입니다.
이러한 ‘순환’을 처음 보여준 작업이 ‘대지’(1985)였습니다. 노구치 이사무(Isamu Noguchi)의 실내 석조 정원 ‘천국’을 흙으로 덮은 게 파격적이었어요.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스승인 데시가하라 히로시의 어시스턴트로 지내며 스케일이 큰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어요. 그 무렵 데이비드 내시(David Nash), 크리스토 & 잔 클로드(Christo and Jeanne-Claude) 등의 워크숍에도 참여했고요. 저의 방대한 스케일은 이러한 경험에서 오지 않았나 싶어요. ‘대지’에선 돌을 뒤덮은 흙에 씨를 뿌렸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공간이 점점 푸른색 잔디로 뒤덮이더군요. 흙을 매개체로 성장과 소멸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케바나를 최재은만의 색으로 재해석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경동교회 옥상에 3000여 개의 대나무 가지를 엮은 ‘동시다발’(1990), 4만여 개의 유리병으로 제작한 대전엑스포의 ‘재생조형관’(1993)도 굉장히 실험적이었습니다. 소재와 정면으로 맞닥뜨렸어요. 그동안 자연, 플라스틱, 유리 등을 사용한 작업을 유심히 살펴보면, 제가 물질을 얼마나 세심하게 대하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먼저 ‘동시다발’은 대나무를 사선으로 엮어 만든 구조물을 교회 옥상에 설치한 작업이에요. 교회의 붉은색 벽돌과 자연 소재(대나무)를 충돌시켜 또 다른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한편 ‘재생조형관’은 유리병으로 돔을 만든 덕분에 스테인드글라스 효과가 나타났어요. 버려진 유리병을 장력 구조로 설계한 ‘재생조형관’은 산업폐기물에 대한 미래 방향을 제시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건축·영상·조각 등을 다양하게 활용하는데, 주제와 마찬가지로 매체 또한 하나에 머무르지 않고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듯해요. 표현 방법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겠지만, 분명한 점은 어떤 주제 혹은 매체든 제 작업 바탕에 구조적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에르메스 작업을 예로 들면, 왼쪽의 ‘Passifolia를 위한 찬장’, 오른쪽의 ‘Dear my Puppy’, 가운데 ‘에르메스 판교(板橋)를 건너다’를 포함, 전체적으로 유리의 투명함과 긴장감을 극대화한 구조물과 사물을 대립시켜 보았습니다.
최재은이라는 작가가 살아온 타임라인의 총체가 DMZ 프로젝트가 아닐는지요. 선의 미학을 보여준 대나무 구조물, 인간과 자연을 보호하는 공중 정원 개념, 멸종 위기의 식물 종자를 보관하는 종자 은행 등이 시간, 생명, 순환과 맞닿아 있으니까요. DMZ 생태계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2015년부터 ‘꿈의 정원(Dreaming of Earth)’ 프로젝트를 진행해오고 있어요. 현재 ‘자연국가(自然国家)-The Nature Rules’라는 이름으로 발전한 프로젝트는 우주, 세계, 자연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의 이상적인 관계에 대한 깊은 사유의 과정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철원 지역 비무장지대가 생태계 보전 지역이라는 사실이 모티브가 되었고, 실제로 파괴된 자연을 복원하는 데 필요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려고 전문적 조사와 기술적 해결 방안을 모색했어요. 이렇게 구축한 자료와 방법론을 2016년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과 2020년 일본 하라미술관 전시 <자연국가>를 통해 중간발표했습니다. 스튜디오 최재은은 2020~2022년에 걸쳐 DMZ의 ‘생태 현황 분석도’를 완성했고, 산림학자 홍성각 교수를 주축으로 하는 팀과 함께 숲을 회복시키는 기획을 설계했어요. 이는 DMZ 숲을 유형화하고, 관목 및 임상 지피식물을 분석해 숲을 단계적으로 채워나가고자 하는 기획이자, 기존에 존재하는 식물들과의 생태적 조화를 중시하며 미래의 숲을 가꾸고자 하는 꿈입니다.
모든 존재는 마지막을 마주하게 됩니다. 오랜 시간 ‘시간과 생명’에 집중해온 작가님에게 처음과 끝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더불어 작업은 어떻게 남길 바라는지요. 자연현상을 거부할 수는 없어요. 그저 무한과 부딪히는 유한한 시간을 기록하는 것이 저의 예술이에요. 제 작업이 인류에게 유익한 아카이브가 됐으면 합니다. 작업을 본 사람들이 책임감을 느끼고 공동체 의식을 갖는다면 더할 나위 없을 듯해요.

 

에디터 박이현(hyonism@noblesse.com)
사진 제공 에르메스,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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