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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 2023-08-09
산토리, 일기일회의 마음으로
산토리 위스키가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산토리 5대 치프 블렌더 신지 후쿠요.
“산토리 라인업을 책임지는 치프 블렌더로서 어찌 자식에게 순서를 매길 수 있을까요? 위스키마다 각각 개성을 부여했으니 그날 분위기에 맞춰 음미하셨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 위스키는 밤에 혼자, 하이볼은 함께 즐기는 게 좋더군요.(웃음)”
산토리 5대 치프 블렌더 신지 후쿠요(Shinji Fukuyo)의 위스키를 향한 자부심이 그득했던 ‘산토리 위스키 100주년 기념 세미나’가 지난 6월 22일 롯데 시그니엘 호텔에서 개최됐다. 산토리 위스키의 역사를 돌아보고, 야마자키 18년과 야마자키 18년 미즈나라 한정판, 하쿠슈 18년과 하쿠슈 18년 피티드 몰트 한정판의 맛과 멋에 스며든 이번 세미나는 100년이라는 시간의 가치를 체감할 수 있는 자리였다.
산토리의 역사는 19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로 일컫는 산토리 창업자 도리 신지로와 스코틀랜드에서 위스키 제조법을 배우고 돌아온 다케쓰루 마사타카가 교토와 오사카 중간 지역에 야마자키 증류소를 세운 것이 명품 위스키 탄생의 서막. 일본 사람들에게 뛰어난 수준의 훈훈하고 향이 깊은 위스키를 선사하고 싶었던 도리 신지로는 물이 깨끗하고, 습도가 높은 이 지역이 고품질 위스키를 위한 최적의 환경이라고 판단해 일본 최초의 몰트위스키 증류소를 설립했다. 스카치위스키 공장을 참고한 야마자키 증류소의 첫 번째 작품은 ‘시로후다(현 화이트 라벨)’. 그러나 5년을 공들여 세상에 내놓은 위스키는 실패의 쓴맛을 보았다. 서양 문화가 익숙지 않던 당시 일본 사람들에겐 피트 향이 낯설게 다가왔으리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스코틀랜드 제조 기법을 지향하던 다케쓰루 마사타카가 산토리를 떠나면서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지만, 도리 신지로는 다른 사업을 매각하면서까지 위스키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 세상의 빛을 본 것이 바로 오늘날 산토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쿠빈’이다. 1937년 출시된 가쿠빈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산토리는 세계적 위스키 반열에 오르는 원동력을 얻었다.
산토리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본 뒤 이어진 건 이날의 하이라이트인 위스키 시음. 품귀 현상 탓에 평소 쉬이 접하지 못하는 야마자키·하쿠슈 포트폴리오가 참석자를 기다려서일까. 왠지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였다. 시음 행사는 신지 후쿠요의 설명에 따라 진행됐다. 대망의 첫 번째 위스키는 야마자키 18년. 미즈나라(일본 참나무)와 버번(미국), 셰리(스페인) 캐스크를 블렌딩해 만든 야마자키 18년은 달콤한 과일 향에서 시작해 쌉싸름한 초콜릿 향, 스파이시함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목 넘김이 부드럽고 쓴맛이 강하지 않아 적당한 밸런스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소개한 야마자키 18년 미즈나라 한정판은 미즈나라 캐스크 원액만을 활용해 순수한 풍미를 경험할 수 있었다. 신지 후쿠요는 “미즈나라 캐스크는 오래 숙성할수록 맛이 좋아 대중에게 인기가 높다”고 설명하는데, 이를 방증하기라도 하듯 복숭아·계피·육두구·정향 등의 내음이 동시에 입안을 맴돌아 화려한 인상을 전한다. 더욱이 도수를 48%로 올렸음에도 목이 뜨거워지는 작열감이 거의 없어 현장에서 소량만 마실 수 있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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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자키에 이은 하쿠슈 포트폴리오는 하쿠슈 증류소에서 제작한 위스키다. 이곳은 1960~1970년대 일본에 위스키 열풍이 불면서 야마자키 증류소 물량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워진 산토리가 1973년에 세운 두 번째 증류소다. 해발 700m에 자리한 하쿠슈 증류소는 황실에서 차를 마실 때 사용했을 만큼 물이 청정하며, 경도가 (마그네슘과 칼슘이 적은) 연수에 가까워 목 넘김이 부드럽다. 하쿠슈 18년은 이 모든 것이 담긴 위스키다. 입에 머금으면 톱 노트로 피톤치드가 연상되는 상쾌한 풀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이후 망고·멜론·캐러멜 향도 느껴지지만, 미즈와리(물을 타서 희석)를 사랑하는 일본 사람들을 겨냥한 것인지 잔향이 길게 이어지지는 않는다. 반면 하쿠슈 18년 피티드 몰트 한정판은 스모키함을 극대화한 위스키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트 향이 올라오는데, 마치 100년 전 실패의 쓴맛을 넘어서겠다는 일종의 기개로 느껴진다. 흥미로운 점은, 맥아와 이탄(피트) 대부분을 수입(영국)에 의존하는데도 산토리 계열인 스코틀랜드 아일러섬의 피트 위스키 보모어·라프로익보다 감미롭다는 것. 이에 관해 신지 후쿠요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물이 숙성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싶어요”라고 설명한다.
2015년 야마자키 셰리 캐스크 2013이 위스키 바이블 1위를 차지한 일을 기억하는가. 위스키 본고장인 스코틀랜드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평소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일본 위스키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나아가 미국·유럽·아시아 시장에서 애호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뜨거운 이름으로 거듭났다. 그중 장인정신으로 만든 산토리 위스키는 국가 행사와 기념일, 장례식 등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약방의 감초 같은 존재다. 산토리 위스키를 마신다는 건 존경과 환대의 표시로 여기기 때문. 비슷한 맥락으로 일기일회(생애 단 한 번뿐인 일)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과 산토리 위스키의 만남은 필연일 터. 이는 산토리 위스키를 열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니 혹 지금 소중한 인연을 꿈꾼다면, 그에게 진심을 담아 산토리 위스키 한 잔을 건네보자.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변치 않은, 누군가를 생각했던 도리 신지로의 따스함이 분명 서로의 마음을 녹일 테니까.
* 경고 : 지나친 음주는 뇌졸중, 기억력 손상이나 치매를 유발합니다. 임신 중 음주는 기형아 출생 위험율을 높입니다.
에디터 박이현(hyonism@noblesse.com)
사진 양성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