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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05

예술을 단단하게 만드는 힘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이 전하는 울림의 목소리.

“파리 세계청년화가대회에 참가했을 때 그곳의 생활 및 예의 풍습을 잘 모르는 데다가 언어조차 잘 통하질 않고 보니 거기에 돈까지 풍족하지 않은 나로선 세계 각국의 청년 작가들에게 강렬한 ‘코리아’의 인상을 줄 방법이란 머리를 박박 깎는 길밖엔 없다고 생각했다.” 빤질빤질한 머리를 한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그는 다시 말을 잇는다. “우리나라는 문화적으로 고립 상태에 있다. 따라서 코리아라는 이름만으로는 도무지 그들의 눈과 머리를 잡을 수 없을 것 같다. 지금 당신네 신문사가 나에게 흥미를 갖듯이 각국 대표가 나에게 흥미를 가져주기를 희망한다. 그곳에서 합동 전시를 열 때, 내 작품으로 그들을 압도시킬 때까지 이 삭발로 조국의 명예를 걸고 밀어붙일 결심이다. 그리고 그들 앞에 인간 ‘오브제’로 그들의 마음을 잡고 싶다.” 지금은 폐간된 『민국일보』에 실린 1960년 12월 16일 자 기사다.
BTS가 앞서 달리고 블랙핑크가 이어 달리는 K-팝 계주는 선두 그룹에 서 있고, 〈기생충〉과 〈오징어게임〉 같은 경쟁력 있는 작품들이 전 세계적으로 호평받는다. 단군 이래 우리 문화가 동시대적으로 주목받은 적은 이제껏 없었다. 장르 이름에 접두사처럼 K를 붙이는 데에도 익숙해졌다. 미술계도 마찬가지다. 단색화에 이어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마친 한국 실험 미술이 다음 달이면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전시로 이어진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세계 곳곳에서 한국문화주간이 열리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들었을 일이 현실이 되고 있으니 격세지감이 든다.
다시 6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1961년 1월 4일부터 열릴 예정이던 파리 세계청년화가대회(Jeunes Peintres du Monde á Paris)는 제2회 파리 비엔날레(Biennale de Paris)에 맞춰 10월로 연기되었는데, 나는 그 사실도 모르고 살던 집 보증금을 빼서 마련한 40달러와 볶은 고추장, 80호 크기의 해체한 캔버스 나무틀 4개분을 등에 지고 파리에 도착했다. 조국의 명예는 덤으로 어깨에 얹혀 있었다.
다음 날 파리 세계청년화가대회 사무국에 찾아갔을 때 “한국 측에도 연기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했는데, 왜 왔냐?”라는 청천벽력 같은 대답을 들었다. 아찔했다. 한국과 콩고, 파키스탄만 연기된 사실을 모르고 똑같은 실수를 했다. 후진국 중에서도 바닥권 나라들이었다. 국제적 망신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훗날 알고 보니 한국위원회 측 담당자가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탓에 파리에서 온 ‘연기 통보 서신’을 읽을 수 없자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잊어버린 것이다. 당시 국제 문화 교류 수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40달러로 대회가 열리는 10월까지 버텨야 했다. 먼저 나와 있던 동포 유학생(혹은 도불 작가)들의 도움이 컸다. 사정은 저마다 달랐지만 선진 학문과 문화를 배우고 익히겠다는 신념만큼은 모두 같았다. 또 하나의 공통점이라면 경제적 어려움이었다. 모국이 가난한 탓도 있지만, 배우기 위해 나라 밖에 나온 사람들은 분야를 막론하고 모두 춥고 배고팠다. 책 한 권, 물감 하나 사는 것도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이건 시대가 바뀌어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경제 대국이 되었어도, 아무리 K-컬처의 기세가 등등해도 떠나온 자의 지갑은 늘 가볍다. 그 가난함과 절박함이 해외 체류의 고단함을 버티게 하고 자기만의 예술 세계를 단단하게 만드니,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지난 몇 년간 해외에 체류하며 작업하는 작가, 또 그들을 후원하는 한국인 갤러리스트 다수를 만났다. 그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어려움은 곤궁함만이 아니었다. 고국에서 바라보는 차별적 시선이 있다는 것.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해외에 나가 있는 부유하고 한가한 집단으로 바라보는 그릇된 인식이 무엇보다 힘들다고 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실시간으로 세계가 연결되는 시대에, 어쩌면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은 아직도 근대를 떠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부도 천편일률적 관행에서 벗어나 실질적 지원책을 마련했으면 한다. 한국 문화에 대한 전 세계적 관심이 BTS의 〈버터〉 한 곡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에디터 이정주(jjlee@noblesse.com), 구술, 박서보(작가)
정리 박승호((재)박서보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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