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를 뒤엎는 건축가, 최시영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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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06

판도를 뒤엎는 건축가, 최시영

타워팰리스의 공간 디자인을 시작으로 한국 주거 디자인의 선봉장 역할을 한 최시영 건축가.

위쪽 최시영 건축가
아래쪽 이천에 위치한 새로운 개념의 리조트형 봉안당 ‘에덴낙원’에 온실처럼 조성한 ‘엔젤하우스’.

“저는 루저였어요.” 인터뷰는 최시영 건축가의 고해성사로 시작됐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분위기는 순간 어색해졌다. 누군가가 작게 웃으며 “무슨 겸손의 말씀을”이라고 했지만, 그는 그 말을 받아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리빙엑시스 대표 최시영 건축가는 주상복합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타워팰리스를 비롯해 미켈란쉐르빌과 시그니엘 등 고품격 주거 공간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리고, 수많은 개인 주택 설계, 여의도 전경련빌딩의 더스카이팜과 알렉스더커피 . 신촌 CGV 등의 상업 공간, 팔레스 호텔과 조선 호텔 스위트 공간 디자인을 섭렵한 한국 최고 건축가 중 한 명이다.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수상, 독일 iF 디자인 어워드 3회 수상 등 주요 상을 휩쓰는 동안 행운은 늘 그의 편에 선 듯 보였다.
하지만 그의 지난 모든 시간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다. ‘루저’라는 단어를 사용할 만큼 아버지의 반대로 화가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과 궁여지책으로 진학한 홍익대학교 건축과에서 보낸 반항과 저항의 청년기, 건축적 기본기가 부족한 상태에서 얻은 성공과 뼈아픈 실패 등은 녹록하지 않은 그의 과거를 보여준다.
그는 어릴 적부터 미술에 재능이 있었다. 교내 미술상 수상자에 늘 이름을 올렸고, 전교생 앞에서 교장에게 상장을 받은 것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상 받았다고 자랑을 할 수 없었다. 칭찬은커녕 핀잔만 들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어떤 미술상도 아버지께 보여드릴 수 없었다. 중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집안의 반대는 계속됐다. 미대를 포기하고 겨우 찾은 절충점은 건축과. “건축과에 가면 막연히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죠. 수업에 영 재미를 못 붙였어요. 교수님께서 차라리 학교에 오지 말라고 하실 정도였어요.”
대학 시절은 의도적 반항과 저항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하루는 에스키스(초안이나 밑그림, 구도를 정리하는 습작) 과제를 주셨어요. 학생들이 완성한 과제를 복도에 쫙 붙여놓으면 교수들이 하나씩 평가하는 수업이었죠.” 그는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다 수업 하루 이틀 전에야 벼락치기로 준비하는 학생이었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켄트지 앞에 앉은 그는 ‘어떻게 하면 친구들과 다르게 해볼까’, ‘어떻게 하면 내 작품이 튈 수 있을까’ 고민하다 멀쩡한 흰색 켄트지를 빨갛게 칠하고 그 위에 블랙 잉크로 에스키스를 그려 제출했다. 수업 날, 복도엔 수십 장의 흰색 켄트지가 붙었다. 교수는 한 장 한 장 비평을 하다 갑자기 빨간 켄트지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떤 놈이야?” “접니다.” 그게 전부였다. 놀라운 사실은 그 빨간 켄트지로 좋은 학점을 받은 것.





위쪽 경기도 광주 삼성리에 위치한 ‘파머스대디’. 농장과 정원, 카페를 함께 조성한 곳으로 주말이면 많은 방문객이 찾는다.
아래쪽 에덴낙원에 조성한 유수식 자연장.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반영한 곳으로, 함 안에 유골을 뿌리면 유수식 정수 시설을 통해 에덴낙원의 정원으로 스며드는 구조다.

기존 방식을 ‘부정’하는 행동으로 교수의 이목을 모은 일은 또 있다. “건축 모형을 만드는 과제였어요. 친구들은 모두 건축 모델링 재료로 제작했죠. 저는 과제를 준비하던 중 한 공방에서 우연히 빠데(표면에 생긴 흠집을 메울 때 쓰는 아교풀 같은 것)라는 걸 보게 됐고, 그걸 모형에 너무 써보고 싶었어요. 장난감 가게에서 골조를 사다 빠데로 모형을 만들어 제출했습니다.” 역시 그때도 좋은 학점을 받았다.
새로운 걸 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시기. 그래서 내용이 부실하더라도 자꾸 남과 다른 걸 시도한 시절로 함축되는 그의 대학 생활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건 교수가 그에게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추천하면서다. “당시는 ‘인테리어 디자인’이라는 말도 없을 때였어요. 그러니 교수님 말씀을 듣고 ‘아, 나보고 영화 간판이나 그리라는 건가?’라고 오해한 것도 무리는 아니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교수님께서 제가 컬러를 사용하는 걸 보고 인테리어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한번 개척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추천하신 거라고 해요.”
미대에 진학하지 못한 아쉬움, 반항과 방황으로 점철된 대학 시절, 그리고 졸업과 함께 찾아온 오랜 백수의 나날. 이것이야말로 ‘루저’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한 친구의 제안으로 기회가 찾아왔다. 낮에는 건설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홍익대학교 건축과에서 공부하던 친구가 개인적으로 수주를 받은 동네 건축 일을 해보자고 제안한 것. “그 친구 말이 제 감각이 뛰어나다고 했어요. ‘너는 다른 사람이 못하는 생각을 한다’면서. 영업은 자기가 할 테니 저는 상상만 하라고 했죠.”
두 명의 초짜 건축가는 그렇게 5평짜리 카페 인테리어 디자인을 맡았다. 친구 말처럼 그는 상상했고, 그것을 말로 설명했다. “실내 전체를 그레이로 꾸며보자. 아그리파 석고상처럼 광이 없는 마감을 해보면 어떨까?” 인테리어에 ‘무광’이란 단어조차 거의 쓰지 않던 시기, 카페 전체를 ‘석고상 느낌’으로 칠했고 클라이언트는 그 결과물에 큰 만족을 드러냈다. 그들의 새로운 시도는 프로젝트를 이어갈수록 큰 인기를 끌었다. 집을 지어달라는 요청은 점점 늘어갔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와 함께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가 도래하고 주거 문화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높아지면서 그의 이름은 점점 더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왼쪽 최시영 건축가가 ‘오래 머물고 싶은 봉안당’을 추구하며 설계한 에덴낙원의 봉안당과 성큰 가든. 자연광이 곳곳을 비춰 밝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오른쪽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는 이들을 위한 온화한 빛의 예배당. 교회 아래 봉안당이 있다.

‘파머스대디’라는 안식처
최시영 건축가는 본디 여행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건축가라면 좋은 공간을 많이 봐야 한다고 믿었다. 수입의 대부분을 여행에 썼고, ‘지갑을 허공에 던졌다’고 표현할 정도로 비싼 곳에 묵고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했다. 자연히 이런 의문이 뒤따랐다. ‘하루에 100만 원짜리 리조트도 이렇게 좋은데 40억, 50억 하는 고급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이런 일상을 경험해야 하지 않을까?’ 그는 언젠가 우리나라도 고급 주택에 리조트 개념을 도입하는 시대가 올 거라고 예상했다.
예측은 생각보다 일찍 현실화됐다. 1999년 분양가 자율화 이후 건설사들은 공간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더욱 고심했다. 주거 공간 디자인으로 이름을 알린 그를 찾은 건 당연한 수순. 당시 주상복합 펜트하우스는 거의 그가 설계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이 밀려들었다. 그의 설계는 신선했고 때론 파격적이었다.
“타워팰리스 디자인에서 처음으로 몰딩을 없앴어요. 건설소장이 ‘이런 마감은 못 한다’며 사표를 내겠다고 할 정도로 새로운 시도였죠.” 그러나 그것은 타워팰리스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대표적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의 고급 주택에 몰딩 마감이 대부분 빠지게 된 것도 그의 디자인이 얼마나 선도적인지 보여준다. 패밀리 룸 문화를 도입한 것도, 신발장과 방문 손잡이 등을 모두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것도 당시에는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미켈란쉐르빌, 하우스토리, 헤르만하우스, 퀸덤 등 많은 곳에서 그를 찾았다. 기계처럼 일하는 바쁜 나날이 이어지면서 그의 멘털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디데이를 정해놓고 건축을 완성하는 건 아마 우리나라가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게 25년 가까이 살다 보니 서서히 멘털이 무너지는 게 느껴졌어요.” 해외 디자인 페어를 돌아다니며 본 것으로 미래의 주거 트렌드를 읊는 자신의 모습도 견디기 힘들었다. “어느 날 번쩍 정신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해외 디자인 페어에는 가지 않았어요. 앞으로 미래의 주거 트렌드를 어떻게 예측해야 할지 걱정도 됐지만 그때 얻은 해답이 ‘내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었죠.” 그때, 불현듯 생각난 것이 ‘그린’이다.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를 소개받은 것도 그즈음이다. 그녀를 따라 해외 가든 쇼를 둘러본 그는 더욱 깊이 정원 문화에 빠져들었다. “정원과 식물을 공부하면서 조금씩 제 자신이 회복되는 걸 느꼈어요. 어떤 면에서 정원, 그린은 건축과 정확히 반대되는 지점에 있죠. 정원은 인간의 속도로 완성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자연의 속도를 거스르지 않고 그 속도에 발맞추는 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멘털이 조금씩 회복되어가자 문득 15년 넘게 잊고 살던 아버지가 물려주신 땅이 생각났다. 아버지가 젖소를 키우고 과수원을 운영하던 경기도 광주의 땅은 그린벨트와 상수도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던 곳. 그는 그날로 달려가 덤불부터 걷어냈다.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들러 밭을 일구고 채소와 꽃나무를 가꾸었다. 그렇게 위안을 얻길 8년, 그는 농장 입구에 ‘파머스대디’라는 이름표를 걸고 2018년에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약 2000평에 달하는 파머스대디에는 두 가지 장관이 펼쳐진다. 유리온실 형상의 네모나고 뾰족한 비닐하우스와 아름다운 화단을 보는 듯한 밭 디자인이 그것. “1990년대에는 해외 최고급 리조트를 경험하러 다녔는데 이제는 전 세계 정원과 밭을 구경하러 다닙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일본은 정원이나 농장이 끝내줍니다. 심지어 베트남이나 미얀마의 밭도 우리나라 것보다 훨씬 예뻐요. 그들은 농작물을 심을 때 그 주변에 꽃을 같이 심어요. 파머스대디를 통해 밭도 예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고급 온실처럼 제대로 된 건축물 형태의 비닐하우스를 지은 것도 같은 맥락. 사계절이 뚜렷한 예전에는 겨울엔 먹을 곡식이 없어 가난에 굶주리는 사람이 많았다. 정부에서 대응책으로 제시한 것이 비닐하우스. 온 나라가 비닐하우스로 뒤덮인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우리는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먹거리 걱정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비닐하우스를 바라보는 관점은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다. “유기농작물에 관한 이야기는 한참 전 등장했지만 비닐하우스나 밭 디자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은 없죠.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에요.”
2013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전시장 한편에서 텃밭을 선보이며 “농사짓는 건축가가 되겠다”, “밭으로 입장료를 받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선언한 그 약속대로 파머스대디는 음료와 간식값을 포함한 1만 원의 입장료를 받아 주말에만 대중에게 오픈하고 있다. 10월 말에는 국내 리빙 브랜드와 협업해 전시 형태의 행사도 진행할 예정. “자유로운 외출이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의 주거 스타일은 변화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가운데 개인 주택에서도 점점 정원의 중요성이 부각될 거예요. 실내와 실외에서 사용하는 가구나 전자제품의 경계가 사라지고, 가든파티에 이어 팜파티가 유행하는 시대가 도래할 거라고 봅니다.”





왼쪽 최시영 건축가가 ‘오래 머물고 싶은 봉안당’을 추구하며 설계한 에덴낙원의 봉안당과 성큰 가든. 자연광이 곳곳을 비춰 밝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오른쪽 프랑스어로 ‘둘’을 뜻하는 ‘deux’와 공간이란 의미의 ‘ville’을 합성한 ‘두빌(Deux Ville)’. 디지털미디어시티역 부근의 쌍둥이 오피스 빌딩 이름이다. 이 작품은 2015년 독일 iF 디자인 어워드의 인테리어·건축 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산 자를 위한 낙원
파머스대디에 이어 최시영의 격의 없는 상상으로 탄생한 건축의 결정체는 2016년에 오픈한 이천의 ‘에덴낙원 메모리얼 리조트’(이하 에덴낙원)이다. 호텔과 야외 연회장, 정원, 도서관, 레스토랑과 카페, 티하우스와 함께 기독교형 봉안당이 자리한 구조다. 야트막한 산자락 아래, 엄숙한 장례식과 가족 나들이가 한곳에서 일어나는 이 생소한 ‘리조트형 봉안당’은 어떻게 이곳에 문을 열게 됐을까? “본래 땅 주인은 호텔 사업을 하던 분이었어요. 호텔 골조까지 모두 올렸는데 근처에 대기업이 25층짜리 호텔을 짓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망연자실해 있었죠. 제가 상담해드릴 기회가 있어서 이 호텔에 텃밭과 정원을 같이 꾸미면 대기업 호텔과 차별화될 거라고 제안했는데, 설득되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분당소망교회의 곽요셉 목사님이 봉안당 지을 곳을 물색하던 중 이곳을 알게 됐고, 제가 목사님께 호텔과 봉안당을 같이 지어보자 해서 성사된 것입니다.”
그는 사전조사를 위해 마이클 잭슨이 묻힌 LA 포레스트론 공원묘지 등을 답사했다. 저명인사가 많이 묻혀 유명한 그곳에선 주말이면 심심치 않게 결혼식을 볼 수 있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곽 목사에게 이 호텔 부지에 정원을 조성하고, 그곳에서 결혼식과 음악 콘서트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는 공간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제 고향이 안성이라 어머니를 안성 봉안당에 모셨어요. 물론 그곳 역시 로비가 넓고 천장도 높게 잘 지은 곳입니다. 그런데 10년을 가도 늘 낯설고,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곳에 오래 머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죠.” 음침하고 무서운 곳. 그래서 자주 찾고 싶은 마음도,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 곳. 봉안당을 대하는 일반적 인식이다. “저는 오래 머물고 싶고, 자꾸 오고 싶은 봉안당을 만들겠다고 했어요. 확신이 있었거든요.”
호텔은 그가 합류하기 전 이미 골조가 완성된 터라 새로 손대기에는 비용 면에서 낭비가 컸다. 하는 수 없이 건물 외관을 손보는 정도로 관여했다. 그러나 채플과 그 아래 위치한 봉안당, 온실 형태를 취한 홍차 전문 티하우스와 에덴낙원 회원을 위한 프라이빗 라이브러리, 가족 모임을 위한 다양한 크기의 미팅 룸, 연회장과 야외 결혼식장, 테마 가든 등 에덴낙원 대부분의 시설은 최시영 건축가의 손을 거친 것이다.
어느 한 곳 마음을 다하지 않는 곳이 없지만, 그는 무엇보다 ‘봉안당’에 힘을 쏟았다. 유럽에서는 사제들이 성당 밑에 묻히는 경우가 대부분. 그는 그것을 차용해 자연광이 환하게 드는 ‘부활교회’를 세우고, 그 아래층에 총 8000기의 봉안함이 들어가는 봉안당을 만들었다. “봉안당은 지하에 있지만 밝아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었어요. 봉안당 어느 방향에서든 자연광으로 성큰 가든을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했고, 널찍한 회랑으로 여백의 미도 살렸습니다.” 햇빛 좋은 이날도 지하의 봉안당 곳곳엔 자연광이 내려앉았다.
봉안당 커버는 모두 불투명으로 설계해 고인의 이름과 사망일, 고인이 살아생전 좋아한 성경 말씀 한 구절을 새긴다. 8000기의 봉안당으로 오픈했지만 그사이 1만2000기를 추가 증축해야 했을 정도로 이곳에 영면한 고인이 많다. 특히 대기업 오너와 유력 정치인, 연예인까지 자신이 묻힐 자리를 예약해놓은 예약자도 상당수. ‘00기업 존’으로 한쪽 벽면의 봉안함을 모두 예약해놓은 기업 오너도 있을 정도다.
지금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 됐지만 에덴낙원이 문을 열기까지 과정은 그야말로 천로 역정이 따로 없었다. 우선 은행 같은 금융권에서는 돈을 빌릴 수 없었다. “봉안당에 돈을 빌려준 전례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실제로 봉안당이 성공한 예는 드물었다. 그 와중에 인근 주민들은 주일마다 시위를 했다. “봉안당이 혐오 시설이라는 거죠. 제가 아무리 리조트 봉안당의 개념을 설명하고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그러나 연인과 가족 단위 나들이객으로 가득 차고 주말마다 웨딩과 돌잔치, 콘서트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지금, 상황은 역전돼 주민들에게 더없이 환영받는 곳이 됐다.
에덴낙원에서 최시영 건축가가 좋아하는 곳 중 하나는 정원 끝에 마련한 사색의 공간이다. “상상해보세요.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가 손을 잡고 산사나무가 안내하는 길 끝에 놓인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겁니다. 사랑하는 손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오죽 많겠어요. 살아생전 쌓은 아름다운 추억이 나중에 할아버지의 봉안함으로 이어지는 거죠.” 가족이 평상시에 자주 들르던 곳일 때 봉안당도 ‘가고 싶은 곳’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자신이 묻힐 곳을 미리 정하고, 그곳에서 살아생전 가족과 함께 추억을 쌓는 에덴낙원. 그래서 에덴낙원은 죽어서 가는 곳이기도 하지만 살아 있을 때 가족과 더 자주 가야 하는 곳이다.





왼쪽 최시영 건축가는 부산의 고급 아파트 ‘퀸덤’에 돌과 물 등 자연 요소를 적극 끌어들였다.
오른쪽 <마스터셰프 코리아> 세트장인 ‘여주 팜 스튜디오’. 4 에덴낙원에 조성한 ‘사색의 가든’.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가 손을 잡고 산사나무 길 끝에 놓인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추억을 쌓는 모습을 상상하며 설계했다.

새로운 ‘판’은 계속된다
농장형 정원 파머스대디, 리조트형 봉안당 에덴낙원, 전경련회관 50층에 들어선 스카이팜 레스토랑 ‘세상의 모든 아침’ 등 기존의 개념을 깨고 건축과 그린의 접점을 찾는 최시영 건축가는 요즘 “땅 좀 봐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는다. 가지고 있는 땅에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최근 그는 곤지암의 2만5000평 부지를 브랜딩하는 작업을 마쳤다. 땅에 개념을 부여하고 클라이언트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해 그 사용법을 제안했다. “곤지암 프로젝트 브리핑에 사용한 사진만 500컷이 넘고, 총 5시간 동안 발표했어요. 아이디어가 마구 샘솟더라고요.”
주상복합 주거 디자인으로 정상의 위치에 올랐을 때 그는 멘털이 붕괴되는 것을 느꼈다. 그때 너덜너덜해진 정신을 부여잡고 찾은 것이 그린이다. 그린 덕에 ‘루저 최시영’은 치유의 시간을 경험했고, ‘건축가 최시영’은 새로운 장, 새로운 판을 열었다. “젊은 친구들이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걸 보면 이해가 안 돼요. 삼성을 보세요. 20년 전만 해도 가전에서 소니와 파나소닉을 물리치고 세계 톱이 될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어요. 삼성은 그들을 이길 수 없었어요. 그런데 이겼어요. 판을 바꾼 거죠. 아날로그 판에서는 이미 역전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디지털’이라는 판을 들고 나온 겁니다.” 현재 중국의 자동차 시장도 마찬가지. 자동차 산업에서 후진국을 면치 못하던 중국은 전기차가 등장하면서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위를 끌어내리는 대신 새로 판을 짜 그곳에서 톱이 되는 것. 바로 최시영식 생존법이다.
그래서 그는 직원과 제자들에게 거대한 꿈을 좇는 대신 하루하루를 ‘다르게’ 살라고 조언한다. 건축가가 꿈이라면 오늘 하루를 건축가처럼 살라는 것. 매일을 그렇게 남과 다르게 살다 보면 언젠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건축가가 되어 있을 거라는 것이다. “건축가가 되고 싶은 경쟁자가 얼마나 많겠어요. 그렇다면 경쟁자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해요. <아웃라이어>에서도 그러잖아요. ‘당신이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최소한 하루에 3시간은 다른 걸 해야 한다’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날을 위해 우리는 매일 다름을 추구해야 해요. 세상이 그걸 원하니까, 끝없이 원하니까요.”





최시영 건축가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사진 안지섭(인물)
사진 제공 리빙엑시스
촬영 협조 에덴낙원 메모리얼 리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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