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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06

다원예술로서의 퍼포먼스

다원예술로서의 퍼포먼스. 아직은 낯선 이 장르의 예술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주요 전시를 통해 핵심을 짚어낸다.

Exhibition View of <Ann Hamilton: The Event of a Thread> at Park Avenue Armory. Photo by James Ewing

기획자로서 퍼포먼스 작업을 자주 다루다 보니 간혹 듣게 되는 관람객의 반응이 있다. 그건 바로 “난해하다”라는 것. 하지만 어쩌면 그건 그들에게 난해하기보다 ‘낯선’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익숙하지 않은 작품을 봤기 때문에 막연히 어렵다고 느끼는 기분 말이다. 다시 말하면 그건 퍼포먼스에 흥미와 두려움을 함께 느끼는 사람들의 양면적 인식일 것이다. 사실 전시의 일환으로 참여하는 ‘독립적 작품’이든, 전시 자체가 추구하는 ‘주제’든 ‘퍼포먼스의 차용’은 궁극적으로 더욱 직접적인 전시 경험을 향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퍼포먼스가 직접적 행위예술로 보이지 않더라도 근래에는 이 고유한 장르의 운동적·확장적 성질을 품은 작품과 전시가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일련의 퍼포먼스 작품과 전시를 관람객은 어떻게 바라보고 경험해야 할까? 이왕이면 그것을 더욱 적극적으로 즐기고 향유할 수 있는 관람 방식이 있을지 기념비적인 퍼포먼스 전시와 작품 3점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2020년 프랑스의 대표적 현대미술 기관 팔레 드 도쿄에서 개인전을 선보인 독일 출신 작가 울라 폰 브란덴부르크의 ‘Le Milieu est Bleu’. 이는 전시장 전체를 하나의 서사를 소개하는 극장적 접근 방식으로 연출한 작품이다. 작가는 미술에 입문하기 전 시노그래피, 즉 극의 장면을 구성하는 연극적 연출을 공부했고, 지속적으로 이미지를 통한 서사를 추구해왔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극장에서 관람하는 무대 집중형 방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화려한 색감의 무대연출에서 사용하는 배경 막을 하나의 설치 작품으로 또는 일종의 무대처럼 조성했다. 작가는 형형색색의 천을 마치 천막처럼 만들어 하나의 터널을 지나는 동선을 따라 움직이며 과거 역사적 사건을 상징하는 ‘넌버벌 퍼포먼스(Non-verbal performance)’를 선보였다. 이는 단순히 퍼포먼스가 하나의 이벤트로 등장하기보다 천막 설치 작품들이 이야기하는 특정 장면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는 작품이다. 해묵은 오해이긴 하지만 관람객은 그동안 현대미술의 추상성과 불확정성에 난해함을 느끼곤 했다. 이런 가운데 관람객은 현대미술의 범주에서 다소 추상적으로 연출하던 다른 장르 작품의 홍수 속에서 현대미술이 상기시키는 여러 상상적 가능성을 퍼포먼스에 참여한 배우들의 움직임과 연기를 통해 더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하나의 퍼포먼스가 전시의 일부 혹은 전시와 연대하는 역할을 하기보다 전시장 전체를 작품 그 자체로 탈바꿈시킬 수도 있을까? 미국 작가 앤 해밀턴은 오래된 무기고를 개조한 뉴욕 맨해튼의 파크 애비뉴 아머리에서 퍼포먼스 전시 <Ann Hamilton: The Event of a Thread(실의 향연)>를 선보였다. 2013년 개최한 이 전시는 아직도 대표적 관람객 참여형 퍼포먼스 작품으로 회자된다. 해밀턴은 이 전시를 구성하기 위해 바우하우스의 여성 작가이자 대표적 텍스타일 디자이너 애니 앨버스의 직물 짜기 테크닉은 물론이거니와 앨버스 고유의 예술론, 바우하우스 태동 이론 등을 하나의 거대 서사로 차용했다. 그녀는 특히 직물 짜기 개념 속 실의 가로세로 교차점에서 발생하는 감촉과 접촉을 시각화한다. 또 텍스트와 직물의 관계에서 출발해 거대한 바느질의 움직임을 상기시키는 실크 천막 조각이 마치 환영처럼 위아래로 펄럭이게 하고, 그 주변에 그네를 설치해 관람객이 자유롭게 타며 그네의 높낮이에 따라 전시장을 다양한 시점에서 조망하도록 전시를 구성했다. 그뿐 아니라 한쪽 테이블에 비치한 서적과 기타 출판물을 읽어 내려가는 관람객의 목소리가 전시 공간에 울려 퍼지게 했다. 이는 퍼포먼스에서 공연자의 일방적인 실연이 아니라 관람객의 자연스러운 참여를 유도, 여기서 퍼포먼스가 하나의 움직이는 전시장이자 해프닝 장소로 기능하는 사례를 보여준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너머의 여정>전 전경. 사진 제공 전민경, 더그레잇커미션





Paul Chan, Khara en Tria(Joyer in 3), Nylon, Fans, Vinyl, Polyfil, 84×153×132in, 2019. Courtesy of the Artist and Greene Naftali, New York

그렇다면 모든 퍼포먼스는 공연예술가의 참여 없인 불가능한 것일까? 관람객이 향유하는 전시 혹은 공연에 배우나 댄서 등 등장인물이 부재한 상황에서 퍼포먼스 작품은 어떤 존재 의미가 있을까? 홍콩계 미국인으로 공동체적 실천을 추구하는 행동주의 예술가 폴 챈은 20세기 야수파 화가 앙리 마티스의 유명한 회화 작품 ‘춤’에서 기인한 설치 작품 ‘Khara en Tria(Joyer in 3)’를 2019년 뉴욕 첼시에 위치한 그린 나프탈리 갤러리에서 선보였다. 제목을 번역하면 ‘3명의 기쁨조(?)’쯤으로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인위적으로 만든 바람을 이용해 대형 실크 천이 아름답게 일렁이게 한, 일명 로테크 설치 작품으로 거리의 윈드 배너를 떠올리게 한다. 작품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폴 챈은 경쾌하고 발랄한 물성에 비해 현대인의 연약한 내면을 투사하는 함몰된 정서를 반복되는 바람 작용을 통해 마냥 가벼워 보이지 않는 정서로 드러냈다. 이는 퍼포먼스를 비물질적 미술로서 그것이 환기하는 운동적이고 확장적인 성질을 다루는 독립적 매체로 볼 수 있음을 시사한다.

퍼포먼스는 전시의 주제를 전달하는 특별한 매체, 작품을 다른 관점에서 소개하는 접근 방식으로 미술계에 등장했다. 또 전시 전체를 아우르는 태도이자 기획으로 활약했으며, 나아가 독립적 예술 작품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다원적 예술의 가치가 어느 때보다 주목받고 있는 지금, 하나의 장르이자 매체로서, 나아가 관람객과 소통하는 채널이자 방식으로서 퍼포먼스의 발전 가능성은 무한하다. 현대미술을 비롯해 종합예술을 감상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동시대를 해석하는 작가나 기획자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방법을 사전에 익히는 것이 좋다. 그래야 보다 풍부하게 작품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퍼포먼스는 막연히 난해함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낯선 것 혹은 낯선 접근 방식에 대한 작가나 기획자의 고찰과 가치를 공유하는 매체다. 이를 바탕으로 퍼포먼스를 보다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또 향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에디터 정송(song@noblesse.com)
전민경(독립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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