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그가 남긴 유산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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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10

이건희, 그가 남긴 유산

올해 가장 큰 화두는 '이건희 컬렉션'이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무엇일까?

이상범, 무릉도원도, 158.6×390cm, 192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단순히 감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를 곁에 두고 오래오래 눈길을 주고 싶은 갈망에 사로잡힌다.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하나둘 모으게 되고,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면 ‘나만의 컬렉션’이라 부를 수 있는 다수의 작품이 내 공간 곳곳을 장식한 것을 목격하게 된다. <아트나우>에서도 매 호 ‘Collector’라는 칼럼을 통해 특히 해외 유명 컬렉터의 면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들에게 예술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더불어 어떤 작품을 어떻게 소장하게 되었는지, 또 사랑해 마지않는 작가와는 어떻게 친분을 쌓게 되었는지 등을 듣다 보면 자연스레 글을 읽는 ‘나’도 예술품 컬렉션의 중요성에 고개를 끄덕이기 마련. 그렇게 예술을 사랑하는 유명 컬렉터가 세계 곳곳에 퍼져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미술계 최고의 컬렉터를 꼽으라 하면 단연 삼성그룹의 전 수장인 고 이건희 회장이다. 유명을 달리하기 훨씬 전부터 그는 호암미술관과 리움미술관을 통해 예술에 대한 고고한 취향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왔다. 뉴스를 통해 리움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의 극히 일부가 공개되기도 했지만, 정확히 그가 어떤 작품을 얼마나 많이 모았는지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런 이건희 회장이 타계하며 2020년 엄청나게 많은 작품이 우리나라 각지에 있는 미술관과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대구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이중섭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박수근미술관 등에 그가 기증한 문화재와 미술품만 자그마치 2만3000여 점에 이른다. 우리나라 언론사는 앞다투어 ‘세기의 기증’이라 부르며 일명 이건희 컬렉션을 조명했고, 기증처인 미술관과 박물관은 발 빠르게 특별 전시를 기획하고 작품을 엄선해 대중에게 공개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가 4단계로 격상되어 일상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진 지난 여름과 가을, 미술관과 박물관의 전시는 예약하기 힘들 정도로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유영국, 산, 1968,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 흰소, 30.7×41.6cm, 1953~1954,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변종하, 두 마리 고기, Oil on Plaster Board, 50.6×61.3cm, 1980, 대구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대구미술관

우리는 그간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친 서양의 근·현대미술에 열광해왔다. 폴 세잔, 파블로 피카소, 마르셀 뒤샹, 알베르토 자코메티, 앤디 워홀 등이 내한 전시를 펼칠 때는 미술관 밖으로 긴 줄이 이어질 만큼 환영한 우리지만, 정작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고 이건희 회장의 20세기 컬렉션을 마주하며 우리나라 미술은 어떤 맥락으로 이어져왔는지, 또 어떤 거장들이 우리나라 미술을 만들어왔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이다. 미술관은 미술관대로 소장품의 공백을 메우고 한국 미술사에 대한 연구를 이어갈 수 있는 사료가 생겼고, 관람객 입장에선 퀄리티 높은 작품을 보며 우리의 미술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고 느낄 수 있는 기회도 열렸다. 그렇다면 각각의 미술관에는 어떤 작품이 기증되었고, 또 이를 가지고 어떠한 연구를 이어가게 될까?
먼저 국립현대미술관에는 김환기, 나혜석, 박수근, 이인성, 이중섭, 천경자 등 한국 근·현대미술 대표 작가의 명작과 더불어 모네, 샤갈, 달리, 피카소 등 세계적 거장의 대표작 총 1488점을 기증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한국 근·현대미술 작가 238명의 작품 1369점이 포함됐고, 그중 1950년대까지 제작한 작품은 총 320여 점으로 전체 기증 작품의 약 22%를 차지했다. 작가별로 보면 유영국 187점(회화 20점, 판화 167점), 이중섭 89점(회화 19점, 엽서화 43점, 은지화 27점), 유강열 68점, 장욱진 60점, 이응노 56점 순이다. 근대기에 만든 작품은 특히 희소가치가 높고 수집하기 어려운데, 이런 작품이 대거 소장품에 추가되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 근대미술사 연구를 위한 자료를 크게 보완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앞으로 미술관은 기증받은 작품의 제목과 작가명, 재료와 기법, 제작 연도 등 작품 정보 데이터 구축을 위한 학술 조사를 2022년까지 마무리하고, 유족과 생존 작가, 미술계의 다양한 인사를 통해 이에 대한 조사 연구를 논문과 출판물 등으로 공유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거점인 국립현대미술관에 역사적 가치를 지닌 다수의 소장품이 추가되며 국립미술관으로서 위상이 한층 업그레이드될 것이 기대된다.
대구미술관에도 지난 4월 김종영, 문학진, 변종하, 서동진, 서진달, 유영국, 이인성, 이쾌대의 작품 총 21점이 새롭게 자리 잡았다. 그중 이인성, 서동진, 서진달, 이쾌대, 변종하는 모두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한 거장으로 미술관은 <웰컴 홈: 향연>전을 열어 이들의 귀환을 반겼다. 아무래도 고 이건희 회장의 고향이기도 한 대구의 1930년대는 근대미술가가 대거 출현한 시기이며 서화와 서양화, 즉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화단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시대다. 이번에 대구미술관에 기증한 작품은 대체로 1920년대부터 1940년대를 아우르며,
고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이 지역 예술가와 맺은 긴밀한 관계성을 드러내 보인다. 단순히 작품을 기증하는 것을 넘어 지역에 대한 기증자의 애정과 고심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한편 전남도립미술관도 지역을 대표하는 김환기, 천경자, 오지호, 임직순과 더불어 타 지역 작가인 김은호, 유영국, 유강열, 박대성의 작품 총 19점이 소장품 목록에 추가됐다. 특히 현재 아시아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는 김환기의 1970년 작품 ‘무제’는 화면을 가로지르는 십자 형태로 구성한 뉴욕 시기 작품으로 ‘전면점화’의 시작을 알린 무척 중요한 작품 가운데 하나다. 더불어 1971년 작품 ‘만선’과 1973년 작품 ‘화혼’을 통해 화려하고 장식적인 색채와 표현 기법을 주로 선보인 천경자의 작품도 일품. ‘고귀한 시간, 위대한 선물’이란 가제와 함께 11월 7일까지 열린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은 작품과 작가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축적해온 역사적 가치, 이를 진즉 알아보고 귀중하게 간직해온 고 이건희 회장이 남긴 중요한 선물임을 분명하게 알린 자리였다. 마침 전남도립미술관은 올해 5월 문을 열었다. 소장품의 규모가 미술관의 위상을 결정하는 만큼, 이번에 보강한 컬렉션은 지역 미술에 대한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일뿐더러 다양한 전시를 기획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다.





김종영, 작품 67-4, Marble, 42×26×19cm, 1967, 대구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대구미술관





대구미술관에서 개최한 <웰컴 홈: 향연>전 전경. 사진 제공 대구미술관





천경자, 화혼, 39×60cm,1973, 전남도립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전남도립미술관

2022년 개관 20주년을 앞둔 박수근미술관 역시 중요한 기증처 가운데 하나다. ‘아기 업은 소녀’, ‘농악’, ‘한일’, ‘마을 풍경’ 등 유화 4점과 드로잉 14점, 총 18점의 박수근 작품을 이곳에 보냈다. 특히 ‘아기 업은 소녀’ 연작은 박수근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지만, 경매를 비롯해 대중에게는 거의 공개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에게 주로 알려진 ‘아기 업은 소녀’가 뒷모습이나 측면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면, 박수근미술관에서 이번에 소개하는 작품은 정면을 향하고 있어 그 희소가치가 더욱 크다. ‘나무와 여인’, ‘나무와 소녀’ 등 전쟁 이후 서민의 삶을 기록한 드로잉 작품도 박수근의 독보적인 드로잉 선의 미학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미술관은 기증전시홀을 별도로 조성해 상설 전시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중섭미술관과 광주시립미술관도 각각 12점과 30점의 작품을 소장품 목록에 추가했다. 특히 이중섭미술관에는 ‘섶섬이 보이는 풍경’을 비롯해 ‘해변의 가족’, ‘아이들과 끈’ 등 한국전쟁 당시 이중섭이 서귀포에서 피란 생활을 하며 만든 작품이 70여 년 만에 태어난 곳으로 돌아왔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고작 1년 남짓한 짧은 기간 서귀포에 머물렀지만, 이중섭이 이때 선보인 작품은 예술가로서 그의 진가를 증명해냈다. 한 작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설립한 ‘작가 미술관’에서 또 다른 연구 자료를 수집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중섭의 작품은 찾기도 힘들뿐더러 가격 또한 만만치 않아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으로 운영하는 미술관에서 소장품을 늘리는 건 여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으로 보낸 12점의 작품은 더욱 그 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 오지호, 임직순, 서세옥, 김기창, 이중섭, 이응노의 작품 등 광주시립미술관으로 간 30점의 작품은 내년 개관 30주년을 앞둔 미술관에 다시 한번 활기를 불어넣었다. 고 이건희 회장은 생전에 “문화유산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은 인류 문화의 미래를 위한 시대적 의무”라고 말했다. 그가 이곳에 남긴 작품은 지역 미술사의 정립과 연구에 필수적 자료임이 틀림없다. 예향이라 불리는 광주 지역의 예술성, 나아가 한국 미술의 전반적 흐름까지 살필 수 있는 소장품은 내년에 개관 30주년을 맞는 광주시립미술관의 연구 과제로 남았다.
이렇게 20세기 근·현대미술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작가들의 작품을 전국 각지의 미술관에 기증하면서 이건희 컬렉션과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그 역사적 가치가 주목받으며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이건희미술관’ 건립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지방자치단체 40여 개가 뜨거운 공방을 벌인 가운데 서울 송현동으로 미술관 건립 후보지가 결정됐다. 물론 일각에서는 이것이 개인의 기념관 설립 추진으로 보일 수 있고, 작품에 대한 심층적 연구와 논의를 고려하지 않은 성급한 결정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비판의 소리를 내고 있다. 분명 고 이건희 회장이 기증한 컬렉션은 우리나라에선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규모일 뿐 아니라 가치도 높은 문화재와 예술 작품이다. 별도의 미술관 건립을 추진할 만큼 그 가치와 중요도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우리 모두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고 이건희 회장이 한때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작품의 가치를 따져선 안 된다는 점이다. 그는 단지 그만의 심미안으로 미술사에 획을 그을 작품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봤을 뿐이다. 우리나라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 등 어디를 가도 우리는 고 이건희 회장이 생전에 작품을 마주했을 때 느낀 감정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우리가 신념을 가지고 선택한 작품도 그것 그대로 위대한 유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에디터 정송(song@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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