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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5-19

아이 캔 스피크

과거 네모난 종이 위에 주제로만 존재하던 식물이 이젠 주체가 되어 자신의 소리를 내고 있다

라시드 존슨, ‘Capsule’, 2020~21. National Gallery of Canada, Ottawa. Purchased 2021
강은영, ‘밤이 낮으로 변할 때, Blue Alkanet Tree’. 사진 이의록
많은 환경예술 작가에게 영감을 준 레이첼 카슨의 책 <침묵의 봄>(1962).
<침묵의 봄>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작가 알렉시스 록맨의 ‘Balance of Terror’, 1988.
헤르만 헨스텐부르그(Herman Henstenburgh), ‘Vanitas Still Life’, 17세기 말~18세기 초 추정. 바니타스 정물화에서 식물은 인간 삶의 덧없음을 빗댄 상징이었다.


여린 꽃잎이 지고, 녹음이 풀어놓은 잔향이 은은하게 피어올라 그것이 청춘의 초입임을 알았던 언젠가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나이가 들고 보니 젊을 때는 몰랐던 봄날의 연분홍빛과 초여름의 연둣빛이 보이는구나!” 그때만 해도 그 말이 깊게 와닿지 않았다. 화폭의 정물처럼 꽃은 그저 꽃이고, 나뭇잎 또한 그저 나뭇잎이거늘 대체 무엇이 보인다는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형언할 수 없는 색의 향연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들리기 시작했다. 생명을 속삭이는 식물의 작은 소리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식물의 빛깔과 향기가 벗이 되는 순간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미술과 식물의 관계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지금이야 식물을 우리 곁에 바투 다가앉아 소곤대는 친구 같은 대상(주체)으로 여기지만, 과거 미술사 속 식물은 그저 바라보는 대상(주제)이었다. 흔히 자연과 인간의 연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때 동양은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사이라 여기고, 서양은 자연이 이성적 인간의 품에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수묵화나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나, 동서양 모두 인간중심주의 시각에서 식물을 그렸다는 느낌이 강하다. 수묵화의 경우 자연과 인간을 동일시한다고 하나 화선지를 물들인 꽃과 나무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드러내는 일종의 매개체고, 바니타스에서 식물은 인간 삶의 덧없음을 빗댄 상징이었으니까. 결국 수묵화든 바니타스든 식물은 인간의 생을 형상화하기 위한 주제이자 수단이었던 셈이다.
시간이 흘러 20세기 중반, 미국 해양식물학자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1962)이 발간되면서 자연 본바탕에 관심을 두는 작가가 하나둘씩 등장했다.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을 적나라하게 공개한 그의 책은 알렉시스 록맨(Alexis Rockman)으로 대표되는 환경예술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더욱이 비슷한 시기에 유행한 ‘아르테포베라(arte povera, 일상적 소재를 활용해 삶과 예술, 자연, 문명 등을 고찰)’와 ‘대지예술(자연 재료를 활용해 대지를 작품화)’은 본격적으로 식물을 종이에서 끄집어낸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자연과의 공존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자연환경을 훼손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를 계기로 자연에 접근하는 작업이 활발해진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움직임 한가운데에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이 있다. 그는 커다란 올리브나무를 미술관 안으로 들여온 괴짜 작가다. 주지하다시피, 성경에서 올리브나무는 인간을 살린 신의 선물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의 작품 ‘Senza Titolo, Untitled’(1998)에는 종교적 의미가 반영되지 않았다. 아무런 기호도 덧붙이지 않고 나무 한 그루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 인상적이다. 그렇기에 뿌리부터 나뭇잎까지 화이트 큐브에 박제된 올리브나무를 본 관람객은 식물의 생명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
20세기 중·후반의 미술이 식물을 향한 인간의 시선을 재구성했다면, 21세기의 미술과 식물은 적극적으로 상호작용을 한다. 특히 ‘식물상점’ 강은영 대표는 사람들에게 식물이 전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해 눈길을 끈다. 어릴 때부터 식물 곁에서 자란 덕분에 자연스레 식물을 사랑하게 됐다는 그는 대학에서 판화를 공부할 때도 매일 뒷산에 올라 풀을 그렸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 판화작업을 하는 것보다 식물 곁에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면서 식물 돌보는 일과 식물이 중심이 되는 작업에 큰 관심이 생겼고, 그 결과 공간의 맥락과 인물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식물을 구성해주는 현재의 일을 하게 됐다. 그야말로 덕업일치다. 강은영 대표가 연출한 장면과 마주하면, 식물이 우리에게 재잘거리는 것만 같다. 마치 이 공간에 자기가 왜 존재하는지 뽐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에 관해 강은영 대표는 “기본적으로 식물에 애정이 많아요. 식물 고유의 색과 형태, 그것들이 살아가는 모습, 변화하는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관찰합니다. 작업할 때 식물의 어떤 특성, 어떤 부분을 보여주고 싶은지 고민해요”라고 말한다. 이런 내용을 집대성한 건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열린 전시 <따로-같이>(2020~2021)다. 소외된 사람들을 돌아보자고 이야기하는 전시에서 강은영 대표는 송보경 작가와 협업해 잡초와의 공존을 실현한 ‘Weedplant’를 선보였는데, 이를 보고 있으니 현실에선 소외되지만 잡초 자신도 하나의 생명이라는 애절한 소리가 들리는 느낌이었다.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 오는 11월까지 캐나다 국립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는 라시드 존슨(Rashid Johnson)의 ‘Capsule’(2021~2022)도 있다. 그는 본디 인종차별과 계급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작가지만, 이 전시에선 우리 삶을 둘러싼 요소들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피력한다. 특히 정글짐이 연상되는 구조물 안에 식물을 배치한 작품은 보는 이가 식물의 삶에 들어간 듯한 효과를 줘 체험하는 재미가 있다. ‘Capsule’에서 작가는 ‘뿌리줄기(rhizome)’의 개념을 차용해 얽히고설킨 인간과 자연, 물질의 관계를 묘사하며, 조명 등 식물의 생장에 필요한 조건을 보여줌으로써 개체 간 유기적 연결을 표현한다. 이처럼 그가 내세운 식물은 더는 인간의 삶을 대변하는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식물의 삶을 통해 사회구조를 돌아보게 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고 할 수 있다.
미술과 식물의 사이를 엿보다 문득 집에 있는 식물이 떠올랐다. 아마 플랜테리어 유행을 좇는 데 급급해 무작정 작은 생명을 데려왔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 거다. 집 밖에선 식물의 소리가 들린다면서, 안에선 그들에게 너무 무심했음을 반성한다. 오늘날 미술과 식물 사이가 그러하듯,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식물과 교감하는 이상적 생활을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이 물음에 강은영 대표는 이렇게 답한다. “눈앞의 식물이 예쁘게 보이는 것을 넘어, 그 식물이 살아가는 환경과 조건을 한 번 더 살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시간과 애정이 쌓인 식물과 함께 지내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에요. 물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햇빛은 어느 정도 쬐어야 하는지 등 크고 작은 관심을 꾸준히 보여줘야 합니다”.

 

에디터 박이현(hyonism@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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