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명예의 전당

LIFESTYLE

2024-12-12

예술과 명예의 전당

독일의 발할라에서 스위스 취리히 톤할레까지. 두 나라의 여정 속에서 문화 칼럼니스트 정준호가 경험한 음악적 연결 고리를 전한다.

도나우슈타우프의 발할라 사원.

독일의 젖줄인 라인강은 스위스 알프스에서 발원한다. 반면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곡으로 유명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는 오스트리아가 아닌 독일의 슈바르츠발트에서 시작한다. 남독일의 레겐스부르크는 바로 그 도나우가 지나는 주요 도시 중 하나다. 시내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40분 정도 가면 강어귀 산 중턱에 거대한 신고전주의풍 사원 발할라(Walhalla)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가 세운 독일 명예의 전당 발할라는 1842년에 문을 열었다. 홀 안은 역사적으로 기릴 인물의 두상이 가득 메우고 있다. 발할라는 북유럽 신화에서 죽은 영웅이 승천해 머무는 곳으로, 바그너 오페라의 주요 소재이기도 하다. 어쩌면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선전한 나치가 이용하기 딱 알맞은 장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바이에른 정부가 추가한 인물을 보면 그런 왜곡을 회피하고자 한 노력이 엿보인다. 2003년 헌액된 조피 숄은 나치에 저항하는 ‘백장미 운동’을 펼치다 처형된 뮌헨의 대학생이고, 2018년에 모신 케테 콜비츠는 소외 계층의 고통과 반전 평화 메시지를 작품에 담은 조각가였다. 낭만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역설적이다. 그는 2010년에야 발할라에 입성했는데, 유대인이자 보수적인 종교와 정치에 비판적이던 인물이다. 만일 그가 알았더라면 발할라를 뛰쳐나갔을지도 모른다. 프리드리히 니체도 이곳에 들어가길 강력히 거부하는 독일 위인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강변 습지에선 그런 사정에 관심 없을 갈매기와 철새가 제 살길을 찾느라 여념 없다.

뉘른베르크 카이저부르크.

뉘른베르크 카타리나 교회 폐허.

뉘른베르크 성모교회 내 부조와 제단.

클래식 음악 여행
여행 중 낮에는 눈과 혀의 궁금증을 달래러 돌아다닌다면, 밤에는 귀의 갈증을 메워줄 곳이 필요하다. 대중에겐 같은 클래식일 수 있으나 내게는 오페라냐 콘서트홀이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그 차이를 설명하자면 좀 복잡하다. 아이돌 문화와 트로트 문화에 차이가 있듯, 클래식 음악에도 오페라와 콘서트홀 사이에는 미묘한 전류가 흐른다. 본고장보다 문화가 늦게 자리 잡은 우리나라는 세종문화회관처럼 한 극장에서 오페라와 콘서트를 함께 올리기도 했다. 마치 종합 경기장에서 축구와 야구를 번갈아 하는 경우랄까. 전용 극장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예술의전당 내 여러 극장이 자리 잡은 지는 반세기 가까이 되었지만, 밖에서 보기엔 여전히 그저 클래식일 뿐이다. 그러나 유럽에선 두 공연장이 엄격히 분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관객도 다름을 실감할 수 있다. 일단 오페라는 푯값부터 월등히 비싸다. 막과 막 사이에 적어도 20분, 길면 40분 이상 휴식 시간을 두기도 해 서너 시간 이어지는 것은 기본이다. 대개 푯값이 비싼 오페라일수록 관객의 의상도 화려하고, 이른바 문턱이 높다는 느낌을 받는다. 반면 콘서트홀은 너무 튀지만 않으면 일상복을 입어도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또 일급 오케스트라 공연도 현지에선 우리나라 오케스트라와 비슷한 가격에 표를 살 수 있다. 오페라와 콘서트홀의 관객은 의외로 접점이 크지 않다.
세계 최고 악단 둘을 보유한 뮌헨의 콘서트홀도 두 곳이다. 바이에른 라디오 심포니는 주로 시내의 헤르쿨레잘(Herkulessaal)에서 연주한다. 한편 뮌헨 필하모닉의 안방인 가스타이크(Gasteig)는 이자르강에 접해 있다. 그런데 악단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두 곳의 시설은 전부 낙제점이다. 헤르쿨레잘은 너무 낡고 작으며, 가스타이크는 음향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가스타이크는 2027년 재개장을 목표로 리모델링 중이라 뮌헨 필하모닉은 더 변두리인 젠들링의 복합 시설에 임시로 자리 잡고 있다. 폭풍 보리스 때문에 며칠째 호우가 내린 뮌헨이기에 나는 거추장스러운 정장 대신 청바지에 재킷만 걸쳤는데, 나와 비슷한 차림새가 제일 많았다. 이런 날씨에도 홀이 만석이었다. 프로그램 덕이라 예상할지 모르지만, 그러기엔 나조차 처음 듣거나 아예 처음 보는 작곡가들의 곡이었다. 이스라엘 출신 라하브 샤니가 지휘하는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곡은 진은숙의 ‘수비토 콘 포르차’, 앙리 뒤티외의 바이올린협주곡 ‘꿈의 나무’, 미하엘 젤텐라이히의 ‘죄수의 딜레마’, 파울 벤하임의 교향곡 1번이었다. 여독이 풀리지 않은 내게 고도의 집중력을 시험할 만큼의 레퍼토리를 듣기 위해 1500명이 궂은 날씨를 마다하지 않고 모였는데, 휴대폰 한 번 울리지 않고 모두 소리에 집중했다.
옆자리 커플과도 대화가 오갔다. 어디서 왔느냐는 그들의 질문에 “한국”이라 답하자 ‘진은숙’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묻고 나를 따라 하며 좋아했다. “날씨도 좋지 않은데 이런 현대음악 프로그램을 들으러 왔느냐”고 묻기도 했다. 둘은 콘서트홀을 자주 찾는데, 프로그램에 신경 쓰기보다는 악단을 믿고 듣는 편이라고. 이는 과거와 현재 세상의 다양한 소리를 통해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한 것을 느껴보는 시간 여행이다. 그런 면에서 커플에게 콘서트홀은 트레킹이나 여행과 비슷하다. 궂은 날이고 해가 진 밤이기에 오히려 이곳에 온 것이다. 예상대로 두 사람은 오페라는 거의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남자는 축구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여자는 그 시간에 밀린 집안일을 하고, 넷플릭스도 가끔 봤으나 흥미가 줄었다고 말했다. 평범하면서도 비범하다. 이 커플이 모든 청중을 대변하지는 않겠지만, 주관이 뚜렷하고 남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가 아는 독일인의 태도가 느껴졌다. 대화 후 나는 전반보다 훨씬 열린 귀로 후반을 들었다. 지휘자 샤니는 무대 위 연주자와 객석을 연결하는 주술사였다. 주문은 커졌다 속삭였다 했으며, 때론 위협적으로 머리를 쭈뼛하게 했고, 흥겨운 춤곡이 되었다가 이내 재즈에 구애하기도 했다. 앎과 무지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고 순수한 소리의 시간을 독일 청중과 공유했다.

발할라 사원에서 본 도나우강.

두 나라의 메타오페라
뮌헨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뉘른베르크. 제2차 세계대전 전범 재판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독일 내 폭격으로부터 손상되지 않은 법정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콘서트뿐 아니라 오페라에도 관심이 많은 내게 뉘른베르크는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의 고장이다. 오페라는 애당초 메타 예술이었다. 그리스어로 메타는 ‘초월한’, ‘이후의’라는 뜻이다. 메타 예술은 곧 장르 자신을 성찰하는 예술이다. 효시로 꼽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는 음유시인 이야기로, 음악과 음악가의 영향력을 다룬 작품이다.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는 중세 시대 실존 인물인 신기료 장수이자 음유시인 한스 작스가 하룻밤 새 제자 발터 폰 슈톨칭을 노래 경연에서 우승시키는 오디션 오페라이니, 메타오페라의 전형이다. 폐허가 된 카타리나 교회에서 빌터가 에파를 보고 한눈에 반하는 첫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노래 경연이 열리는 카이저성의 고목 아래서 소나기를 피하며 전통의 계승과 발전에 대한 신성한 의무를 결의하는 대목은 오페라의 대단원을 상기한다.
독일 여행에 이어 스위스의 놀라운 경치를 눈이 시리도록 구경하고 며칠 후 취리히에서 만난 콘서트는 뮌헨보다 훨씬 익숙한 프로그램이었다. 브람스의 피아노협주곡 1번과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파보 예르비가 지휘하는 톤할레 오케스트라의 시즌 개막 연주에는 아이슬란드의 기린아 비킹귀르 올라프손이 피아노 협연자로 나섰다. 뮌헨의 음악홀이 악단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 데 비해 1895년 브람스의 지휘로 문을 연 취리히 톤할레는 최고 음향을 자랑했다. 브람스 협주곡은 교향악적 규모와 짜임새로 유명하다. 기교파 피아니스트가 탄탄한 사운드의 오케스트라와 분투하는 모습을 브람스가 보았다면, 이 곡을 쓴 자신의 20대 모습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브람스는 뜻밖에도 2000년 발할라에 입성했다. 라이벌인 바그너의 본고장에서 받은 예우를 내심 좋아했을 법도 하다. 후반부는 아이슬란드 여성 작곡가 안나 소르발스도티르의 ‘아르코라’로 시작했다. 아이슬란드를 배경으로 탄생한 여러 판타지 SF 영화에 어울릴 법한 초월계(메타) 음향이다. 가장 변방의 음악가들이 주류로 부상한 세태를 읽을 수 있었다. 물론 한 세기 전 이탈리아 오페라와 독일 교향악의 틈새를 뚫고 발레 음악으로 비상한 러시아가 있었다. 그 선두 주자는 바로 스트라빈스키였다. 러시아 민요를 주제로 한 ‘불새'의 피날레는 취리히 톤할레 전체를 발할라로 연결하는 듯했다. 21세기는 진은숙과 젤텐라이히, 소르발스도티르를 바그너와 브람스 곁으로 이끌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