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된 음악적 환희

LIFESTYLE

2024-07-04

200년 된 음악적 환희

이탈리아 여행기를 연재해온 문화 칼럼니스트 정준호가 다시 유럽으로 향했다.이번 목적지는 빈과 파리, 런던. 각 도시에서 마주한 특별함을 인문학적 시선으로 독자와 함께 나눌 예정으로, 첫 장은 빈과 베토벤으로 연다.

클림트의 '입맞춤'이 전시되고 있는 벨베데레 상궁 후원.

팬데믹에서 완전히 벗어난 올해 나는 오랜만에 빈과 파리, 런던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딱히 봐야 할 행사나 연결 고리를 찾으려 애쓴 것은 아니지만, 언제 방문해도 시간 가는 것이 아쉬운 도시들이다. 늘 그렇듯이 내가 가면 특별하다는 허영심까지 가득 챙겨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빈 황실 도서관에서 진행 중인 브루크너 특별전.

빈 미술사 박물관 앞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동상.

빈 미술사 박물관에 전시된 자동 인형.

빈이 지닌 보물
가장 먼저 빈으로 떠났다. 내가 빈에서 머무른 아파트는 우리나라 기준으로 말하면 사대문 안인 ‘링슈트라세’ 바로 아래에 있는데, 아파트 바로 옆에는 미술사 박물관이 자리한다. 빈 미술사 박물관은 합스부르크 황실이 수집한 무수한 보물을 소장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길을 끈 것은 아우토마트(Automat)라 불리는 자동기계였다. 17세기 한스 야코프 바흐만이 제작한 ‘켄타우로스를 탄 디아나 여신’은 루돌프 2세 황제의 식탁을 장악한 존재였다. 태엽을 감으면 사냥의 여신을 태운 황금 반인반마가 활을 겨눈 채 식탁을 돌아다니는 형태로, 손님 앞을 헤집고 다니던 이 기계가 점차 동력을 잃고 관심이 멀어져갈 때쯤 놀라움이 엄습한다. 동작이 멈추는 순간 과시용인 줄 알았던 화살이 실제로 발사되기 때문이다. 화살이 날아간 곳에 있는 손님은 술잔을 비워야 한다. 권주용 장난감이라고 하기엔 놀라운 기예다. 이렇듯 아우토마트란 원시적으로는 자동판매기와 비슷하고, 좀 더 복잡한 예를 들면 천문시계이며, 궁극적으로는 자율형 로봇이 아닌가. 여기에 요즘 화두인 인공지능을 얹으면 사이보그가 된다. 애초에 인간이 조종하더라도 자율적 사고와 행동이 목표다. 인간이 조물주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정인지, 해서는 안 될 도발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만큼 도덕적으로 아슬아슬한 사업이 현재 온 인류의 최대 관심사다.
미술사 박물관에서 이틀을 꼬박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숙소 앞 ‘분리파 전당’으로 향했다. 분리파 전당은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베토벤 벽화’를 전시한 곳이자 ‘입맞춤’이 걸린 벨베데레 궁전만큼 클림트 애호가에게는 꼭 가봐야 할 성지이기도 하다. 라이프치히의 화가이자 조각가 막스 클링거는 베토벤 서거 75주기를 기리는 의미로 대리석상을 만들었다. 빈은 클링거에게 순회 전시를 요청했는데, 이때 클림트가 같은 주제의 벽화로 호응했다. 한창 독일 문화권에서 베토벤의 신격화가 진행되던 때였다. 1902년 당시 벽화 옆방에 놓였던 클링거의 조각은 다시 라이프치히로 돌아가 회화 예술 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현재 이 베토벤 조각 위에는 소설가 토마스 만이 쓴 헌사가 적혀 있다. “헤라클레스나 지크프리트는 ‘선택받은 영웅(hero)’이지 ‘스스로 도달한 영웅(held)’은 아니다. 영웅다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나약함의 극복이 영웅의 사업이며, 그러려면 반드시 약해야 한다. 클링거의 작고 여린 베토벤은 거대한 신의 옥좌에 앉아 있다. 타는 듯한 눈빛을 한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그야말로 스스로 도달한 영웅이다.” 이는 곧 오늘날 베토벤이 많은 예술가의 모범이자 음악의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 까닭이다.

파리 필하르모니에서 열린 베토벤 장엄 미사 공연.

빈 분리파 전당의 베토벤 벽화.

빈음악협회 황금 홀 주변 야경.

여전히 회자되는 베토벤의 음악
올해로부터 200년 전인 1824년 5월 7일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이 빈 케른트너토어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아마도 어떤 음악이 초연된 해까지 기리는 경우는 몇 없을 터. 베토벤이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에 붙인 가락은 오늘날 유럽연합 공식 행사에서 연주될 정도로 자유와 연대의 승리라는 인류 보편 가치를 지향하는 상징성이 크다. 특히 올해는 유럽 텔레비전 연합 아르테(Association Relative a la Television Europeenne, ARTE)에서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200세 생일을 기념해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5월 7일 라이프치히, 파리, 밀라노, 빈을 대표하는 최고 악단이 동시에 ‘합창 교향곡’을 연주하며 그것을 한 악장씩 릴레이로 중계방송하는 구성이었다. 안드리스 넬손스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1악장, 클라우스 메켈레와 파리 오케스트라의 2악장, 리카르도 샤이가 이끄는 라스칼라 악단의 3악장, 끝으로 곡이 초연된 빈에서 페트르 포펠카가 지휘하는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피날레를 듣는 야심 찬 기획이었다. 네 도시의 전곡 연주를 틈틈이 이어가기 위해 악장 사이엔 독·프 양국 진행자가 그 의의와 각각의 출연진을 소개했다. 그러나 이처럼 잇따른 ‘간섭’에 의해 전곡의 맥은 끊어지고 말았다. 어쩌면 ‘행사를 위한 행사’를 기계적으로 조작한 데 따른 예견된 실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든 ‘합창 교향곡’에 비하면 같은 해 작곡된 쌍둥이 곡인 ‘장엄 미사’는 예나 지금이나 자주 들을 기회가 없다. 그러나 베토벤은 이것을 교회 음악이 아닌 보통 사람을 위한 오라토리오로 규정하고 합창 교향곡과 한날에 함께 초연하고자 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법상 미사를 교회가 아닌 곳에서 공연하지 못하도록 금했기에 ‘장엄 미사’는 ‘찬가’로 바꿔 불렸다. 그런데 지난 4월 23일 파리에서 제레미 로레르가 지휘하는 ‘조화의 순환(Le Cercle de l’Harmonie)’ 앙상블과 아우디 청소년 합창단(Audi Jugendchorakademie)이 ‘장엄 미사’의 뜻을 기렸다. 지난 30년간 이 곡보다 해석의 여지가 비약적으로 확대된 예는 흔치 않다. 그 점을 십분 알고 있는 로레르는 다이내믹한 음향과 역동적 추진력을 끌어냈다. 하나 왜일까, 질주가 끝났을 때 든 느낌은 공허함이었다. 악상 부호를 추적하는 것만으로는 이런 아쉬움을 떨칠 수 없었다. 우리는 과연 엄혹한 현실에 맞서 분투하고 있는가?
한편 베토벤이 ‘합창 교향곡’을 초연한 그해 9월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안톤 브루크너가 태어났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인 빈 황실 도서관도 브루크너의 전 생애와 작품을 소장 자료를 동원해 특별 전시할 만큼 인정받는 인물이다. 마침 지난 4월 파리에서는 최고 신구 브루크너 전문가가 저마다 다른 악단과 세 곡을 연주했다. 이 중 단연 압권은 4월 24일 헤르베르트 블롬스테트가 지휘한 파리 오케스트라의 교향곡 8번이었다. 1927년생인 블롬스테트는 현재 96세로 현역 최고령 지휘자 중 한 사람이다. 지휘자로 데뷔한 지 70주년을 맞은 올해까지 세계 제일의 무대에서 정통 교향악과 씨름해온 그는 유독 브루크너에 대해 깊은 통찰을 보여줬다. 교향곡 8번은 브루크너의 전곡 중에서도 가장 길이가 길고, 그만큼 심원한 해석의 시야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블롬스테트가 악장의 부축을 받으며 무대에 오르는 순간부터 객석은 브루크너 본인과 마주하는 듯한 행운을 누렸다. 작곡가와 혼연일체가 된 노대가는 듣는 이를 소리로 가능한 가장 이상적인 곳까지 데려갔다. 네 악장이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간 듯, 혹은 10시간은 꼼짝없이 보낸 듯한 1시간 30분이었다. 블롬스테트 역시 악보에 줄이 매인 꼭두각시라는 점에서 로레르와 다를 바 없지만, 그는 결국 줄을 끊고 자율성을 확보한 영웅처럼 느껴졌다.
4월 18일, 빈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열린 하겐 사중주단의 베토벤 시리즈는 또 하나의 탁월한 인형극이었다. 43년 전부터 사중주단으로 활동해온 이들이 이제는 노년이 되었음에도 무대에 임하는 자세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이든과 드뷔시의 사중주를 연주한 전반부에 이어 후반에는 하이라이트인 베토벤의 사중주 14번, Op 131이 뒤따랐다. ‘장엄 미사’와 악상을 공유하기도 하는 이 후기 걸작은 보이저 우주선에 지구를 대표하는 음악 가운데 하나로 실리기도 했다. 중단 없는 일곱 악장이 중력을 거부한 유영을 멈추고 섰을 때 네 사람의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다시금 나를 각성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노력하는 사람에게 대체 불가능한 말이자 전진을 향한 의지와도 같음을!

에디터 김혜원(haewon@noblesse.com)
글·사진 정준호(문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