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서울의 진 마이어슨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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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01

지금, 서울의 진 마이어슨

20년 전, 진 마이어슨(Jin Meyerson)이 다양한 채널에서 얻은 이미지를 바탕으로 거대한 순수 회화를 보여주었을 때, 뉴욕과 런던의 유명 갤러리가 열광했던 건 작가의 스토리와 현대사회의 이면이 용암처럼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16개 도시를 돌며 활동해온 그가 최근 정착한 곳은 서울 문래동. 노블레스 컬렉션에서 6월 25일부터 한 달간 열릴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그는 여전히 왜곡과 우연 속에 있는 자신의 작품처럼 직설적이며 논쟁을 즐긴다.

1 새로 전개될 작품의 캔버스가 걸린 작가의 문래동 스튜디오. 두 곳으로 나뉘어 있다.
2 작가에게 지금의 스튜디오는 젊은 날 느낀 브루클린과 비슷하다.

2015년 도쿄부터 2016년 서울, 2017년 뉴욕과 지난해 홍콩까지, 최근 4년간 한 해도 전시를 쉬지 않았습니다. 어제까지 아트 바젤 홍콩에 다녀왔습니다. 내일은 한국과 중국 사이쯤 있는 일본 사도섬으로 갈 거예요. 얼마 전 그곳에서 흥미로운 소재를 건져왔어요. 북한 배에서 떠내려온 낙하산 재질의 천이었죠. 지금 캔버스에 붙여놓은 것들이에요.

새로운 타입을 준비하고 있나요? 맞습니다. 화가에게 하얀 캔버스가 아닌 것은 그 자체로 굉장히 도전적인 과제입니다. 어려워요. 하지만 이 천들은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번 만져볼래요? 일반적으로 캔버스 뒤에 붙일 것 같은 소재인데 일부러 앞에 씌워두었어요. 저기 속이 비치는 연분홍색 천을 보세요. 너무나 순수해서 아무것도 입히고 싶지 않습니다.

흥미롭네요. 기존 작품에서 방향을 완전히 바꿀 예정인가요? 글쎄요. 2008년쯤 아라리오갤러리 개인전을 시작으로 올해 4월 현대카드 전시 <굿 나잇: 에너지 플래시> 등을 통해 한국 관객과 계속 만나왔지만, 대중이 제게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 그림은 모두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거든요.

당신 작품을 처음 본 이들은 대체로 거대한 스케일과 복잡한 구조에 압도된다고 말하곤 합니다. 항상 작가로서 탐구하는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고 느껴요. 관객이 제 작품에서 느낀 감정에 상실이나 혼돈만이 들어 있다고 단언할 순 없어요. 생각해보면, 어릴 때는 우스꽝스럽더라도 실험적인 것을 그리려고 했어요. 30대에 아버지가 됐을 때는 보다 좋은 걸 그려야겠다고 결심했고, 40대에는 뭔가 지루하기도 했습니다만, 작가로서 한 가지 스타일을 유지하고 싶지도 않아요.

활동 초기, 찰스 사치가 2004년 프리즈 아트 페어(Frieze Art Fair)에 전시 작품 전체를 구매한 것부터, 모든 게 작가로서 운이 좋았던 걸까요? 강아지와 산책을 하다 갤러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정말 놀라웠죠. 한데, 그 질문을 바로잡고 싶어요. 단순히 운(luck)이 아니라 고맙게도 내게 주어진 일(fortune)이었어요. 저는 아직도 1970년대 미국 가정에 입양됐을 때의 강렬한 느낌을 잊을 수 없습니다. 예전엔 몰랐지만 그림을 시작하면서 저의 지난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는 알 것도 같습니다. 전 항상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품고 있었고, 그림을 그리면서 제 자신을 완성했어요. 그러면서 저를 이해하게 됐죠.

끊임없이 자신을 찾는 과정을 통해 좋은 작품을 만들어나간 거군요. 정확히는 제 삶의 환경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요? 미국 미네소타에서 열세 살까지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뉴욕으로 옮겼고, 내 생애 최고의 걸작인 딸 블루가 태어난 파리와 홍콩, 런던, 독일 등 3개 대륙 16개 도시를 떠돌며 지낸 건 사실이지만, 저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머무르지 않는 삶에 익숙해지고 중독된 것 같아요. 젊은 날의 저는 아나키스트 같았어요. 체제 전복적인 걸 즐겼습니다. 여기 ‘Friendly Fire’(2004)는 미식축구를 그린 겁니다. 제가 자라면서 마주한 미국 문화는 가장 사랑하면서도 싫어했던 애증의 대상이에요. 예를 들면 많은 미국인은 매일 아침 평화로운 교회에 갔다가 폭력적인 미식축구를 즐겨 보잖아요? <아트 인 아메리카>가 제게 첫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기자가 제 이름을 전화로 듣고는 유대계 스웨덴인의 모습을 생각했는지 ‘진’을 ‘짐’으로 잘못 받아 적기도 했어요. 이후 오프닝 파티에서 이 키 작은 아시안을 보고 그가 이렇게 말했죠. “네 작품이 왜 그런지 완전히 이해했어!” 무슨 뜻인지 알겠죠?

이후 건축으로 옮겨갔고요. 맞아요. 2005년부터 5년에 걸쳐 굉장히 다른 작품을 그리기 위해 애썼는데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대신 파리에서 생활하며 카페를 그리고, 가우디로 시작해 프랭크 게리로 관심이 옮겨갔죠. 보다 건축적인 소재와 도시를 다루기 시작했어요. 제가 무척 아끼는 특별한 작품 ‘Stagedive’ (2015)를 보실래요? 저는 건축가 자하 하디드 팬이에요. 뉴욕 하이라인에 가면 그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참여했던 520w28(웨스트 첼시 콘도) 빌딩이 있는데, 이 그림을 그곳에서 전시했었죠. 꿈을 이뤘다고 봐도 좋아요. 고아원 바닥에서만 자던 제가 미국에 와 처음으로 침대를 경험하고, 넓은 공간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던 공포를 40년이 지나서 묘사한 건데요, 작가로서 나는 지금 누군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탐구하는 과정에서 느낀 감정과도 비슷했어요. 어떤 친구는 이런 타입을 보고 “재앙 포르노를 그리려는 거냐?”고 묻기도 했죠.

이후 글로벌 시장에서 스타 작가가 되었고요. 저는 스타가 아니에요. 제 작품은 달라요. 브랜드가 되기 위해 의도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더 유명해지고 싶었다면 비슷한 스타일을 반복해서, 또 연간 50점쯤 다작하면서 유럽을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전, 작품 하나를 마칠 때마다 마라톤을 완주한 것처럼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한 해에 12~15점 이상 절대 그릴 수 없어요.

여러 사람이 이 인터뷰를 보고 전시를 찾을 겁니다. 작가로서 절정기라 보고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지금 제겐 감사하게도 새로운 플랫폼과 알아주는 대중이 있죠. 반 고흐처럼 앞으로 저도 남은 생 동안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저의 가치는 관객이 결정하는 겁니다.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 자체가 작가에겐 특권이고요. 예술은 인류가 창조한 가장 숭고한 작품입니다. 인간의 분노와 슬픔, 기쁨을 예술을 통해 느끼고, 살아 있음을 느끼죠. 17세기 얀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보면 그 당시 공기까지 전달되는 것 같잖아요? 작가로서 제가 추구해야 할 일이죠.




3 Pulp, 패널에 혼합 매체, 305×394cm, 2004
4 Friendly Fire, 패널에 유채, 아크릴릭, 122×188cm, 2004

당신의 작품은 수많은 사진 이미지를 찾아 조합하고 이를 바탕으로 유화로 덧입히는 과정을 거칩니다. 실제로 보니 복잡하기보다는 편하게 느껴지네요. 우리는 부모 세대와 달리 정보 과잉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그런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제 작품을 익숙하게 느낄 겁니다. 작품 속에서 이 시대 사람들이 어떤 것을 느끼는지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요. 지금 클림트의 작품 ‘처녀(The Maiden)’와 같은 크기로 작업하고 있는 ‘Spring Fever’만 해도 스케치 단계에 포토샵으로 깔린 레이어가 50개쯤 돼요. 힘들어서 다시는 못 할 거예요. 여기에는 수많은 정보가 들어 있죠. 믹 재거와 데이트한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린 여성에게 연락해 파일을 받고, 우연히 들른 전시에서 본 작품의 작가에게 사진을 받아 쓰기도 해요. 지금 여기 가운데 있는 노란 꽃을 그리기 위해 한 달 보름째 씨름하고 있고요.

어쩌면 지독한 노동이군요. 작가는 배관공과 다를 게 없어요. 손을 쓰고 도구가 필요해요. 실제 작품을 내놓기 위해서는 꾸준한 루틴이 필요하고, 자신을 느껴가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마치 올림픽에 참여하는 운동선수처럼 1분간 출전하기 위해 몇 년 동안 훈련을 해야 하죠. 제가 술을 많이 마시긴 해도(웃음) 언제나 꾸준히 작업하는 이유입니다. 꿈에서도 작업하고 예술에 대해 논쟁하는데, 항상 제가 지기 때문에 눈을 뜨고요. 매일 10시면 작업실에 출근해서 오후 대여섯 시까지는 내내 일해요. 함께하는 스태프도 저만의 호흡법으로 1년 이상 훈련시킵니다. 저는 이걸 ‘콩글리시’로 올딩(olding)이라 부르죠.

요즘 한국의 젊은 작가들을 주목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노블레스 컬렉션과 함께 제가 직접 찾은 젊은 작가들을 소개하는 온라인 플랫폼을 준비하고 있어요. 서울대와 홍익대에서 강의하면서 지금 1980~1990년대생이 아주 훌륭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형편에 따라,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뭔가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죠. 설사 누군가 이런 과정을 다 가짜(fake)라 해도 흥미로워요. 가상에서 본 것을 실제로 만들어내잖아요? 제 작품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저는 20여 년간 여러 나라에서 그림을 탐구해왔고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만큼 공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죠. 요즘 아시아의 많은 도시가 미술 시장에서 또 다른 뉴욕이 될 것이라고 얘기하는데요, 그렇지 않아요. 창작적인 면으로 보면 뉴욕 역시 예술의 수도라기보다는 자본의 도시죠. 전 독일과 한국이 새로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봐요.

올해 가장 기대되는 작품이 되겠네요. 어린 시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7~8세기쯤 만든 아시아 각국의 ‘천지도’를 본 적 있어요. 한국 것에만 별이 4개 더 묘사돼 있더군요. 반도이기 때문에 바다의 빛 반사를 통해 하늘이 더 맑아 보여서 보이는 별의 개수가 달랐죠. 지금 한국이 그런 곳 같아요. 관용적으로 변했어요. 한국은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극적인 전환기를 앞두고 있고, 전 그 점을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5 Stagedive, 캔버스에 유채, 290×420cm, 2015
6 현재 작업 중인 ‘Spring Fever’. 영감을 준 클림트의 ‘처녀’와 같은 190×200cm 크기.

 

에디터 김미한(purple@noblesse.com)
사진 김제원(인물)   사진 제공 진 마이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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