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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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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의 화가‘ 이배는 검게 타고 남은 물질에서 생성과 소멸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을 본다.

붓질(Brushstroke), 227.3×181.8cm(each) 16ea, Charcoal ink on paper, 2026.

30년 넘게 함께해온 숯이라는 재료와의 인연은 우연에서 비롯했다. 1990년대 초 파리에서 작업하던 시절, 값비싼 물감 대신 동네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었던 바비큐용 숯으로 드로잉을 시작한 것이 계기였다. 그렇게 우연히 손에 쥔 재료가 결국 지금까지 이어지는 작업의 출발점이 되었다. 당시 나는 한국 작가로서 적잖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파리는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이 뒤섞인 도시지만, 동양 미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수묵화와 먹, 여백 같은 개념은 쉽게 전달되지 않았고, 겸재 정선을 이야기하면 낯설어하던 사람들이 미켈란젤로의 이름에는 곧바로 반응했다. 그런 시간 속에서 숯은 단순한 재료를 넘어, 한국 작가로서 나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나는 스스로를 ‘푸른 난초와 대나무를 검정으로 그리는 문명권에서 온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숯은 나무가 불을 만나 만들어진다. 형태를 잃으며 타 들어가지만, 긴 시간을 지나며 다시 전혀 다른 물질로 남게 된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해왔다. 생성과 소멸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순환의 과정 말이다. 그래서 작업하며 숯뿐 아니라 나무가 타고 남은 재까지 함께 사용해왔다. 검은 숯과 흩날리는 재는 결국 같은 자리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그 안에서 자연과 인간, 시간과 존재의 흔적을 오래 바라본다. 오랜 시간 숯을 다뤄왔지만, 아직도 그것을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 숯으로 작업하던 때와 지금 마주하는 숯은 분명 다르다. 같은 재질일지라도 의미는 더 넓고 깊어졌고, 더 많은 시간을 품게 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잘 알지 못한다는 마음이 남아 있다. 어쩌면 그 알 수 없음 때문에 지금까지도 계속 숯 앞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작업이라는 것은 그렇게 오래 바라보고 기다리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 구술 이배
  • 에디터 김수진
  • 사진 뮤지엄 S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