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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빚어낸 여정

ARTNOW

오랫동안 사회 시스템과 인간의 삶을 탐구하며 국가와 제도, 공동체와 개인을 잇는 관계를 질문해온 함양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개인전은 지난 8년간 이어온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프로젝트와 신작을 통해 그 여정을 되짚는다. 거대한 구조를 향하던 시선은 이제 몸과 감정 그리고 관계의 감각으로 확장되며 새로운 순환을 그린다. 그 과정에서 세계와 관계 맺어온 작가의 태도를 함께 들여다본다.

함양아 1968년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 미술이론과를 졸업했고, 뉴욕 대학교 대학원에서 미디어 아트를 공부했다. 사회 시스템과 개인, 공동체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트랜스미디알레, 대안공간 루프, 아트선재센터, 금호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광주비엔날레, 타이베이 시립미술관,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국립현대미술관, ZKM, 상하이 비엔날레, 팔레 드 도쿄 등 세계 각지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프로젝트와 ‘잠’, ‘주림 2.0’, ‘사람은 무엇을 배우나’ 등 주요 작품을 선보입니다. 먼저 소감을 묻고 싶어요. 저는 무엇이든 소화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이에요. 제 생각조차 스스로에게 와 닿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편이죠. 이번 전시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관람객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비로소 전체가 보이는데, 아직은 너무 가까이 있는 상태예요. 그래서 지금은 전시가 세상에 드러난 뒤 천천히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는 어느덧 8년 넘게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사이 싱글 채널에서 3채널, 8채널 작업으로 확장됐는데, 처음부터 이 작업을 장기 프로젝트로 염두에 두셨나요? 장기 프로젝트로 시작한 것은 아닌데 하고자 한 이야기가 워낙 컸어요. 사회 시스템과 인간의 삶을 다루려면 제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오랜 시간 리서치하며 저도 함께 배워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처음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라는 제목을 붙였을 때만 해도 싱글 채널 작업에 왜 360도를 뜻하는 ‘파노라마’라는 이름을 붙이냐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어요. 하지만 저는 언젠가 더 넓게 펼쳐질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돌이켜보면 지금의 작업도 처음부터 제 안에 있었던 것 같아요. 다만 그것을 스스로 깨닫고 현실로 구현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죠. 당시의 환경과 예산, 제가 할 수 있는 조건 안에서 작업을 이어오며 촘촘히 구조를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세계가 자연스럽게 확장되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거대한 원형 구조의 8채널 프로젝션으로 구현한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4.0’ 설치 전경.
거대한 원형 구조의 8채널 프로젝션으로 구현한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4.0’ 설치 전경.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4.0(비디오 스틸), 8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22분, 2026.


그중 신작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4.0’은 생로병사, 노동, 종교 등 인간과 사회, 자연의 관계를 ‘순환’이라는 세계관 안에서 풀어냅니다. 이번 작업에서 순환이 중요한 키워드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공부하면서 계절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고,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순환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게 됐어요. 원래도 계절이나 하루의 시간 변화에 민감한 편인데, 그동안은 그것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은 것 같아요. 최근에는 아버지의 노화와 병을 가까이에서 보며 사람의 몸과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도 훨씬 많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실 돌이켜보면 순환은 처음부터 제 안에 함께 있었습니다. 가장 초기 작업인 ‘치즈’에서도 오랜 시간 썩어가는 과정을 관찰하며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을 이야기했고, 이미 순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죠. 당시에는 거대 서사에 위선적인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 제가 직접 감각하고 경험할 수 있는 작은 이야기에 더 집중했어요. 이렇게 미시적 세계에서 출발해 사람과 사회, 역사와 국가를 다루는 작업으로 점차 확장됐습니다. 지금 다시 인간의 몸과 개인의 차원에 주목하게 된 것도 원래 관심사가 다른 형태로 순환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요. 단지 이전에는 감각적으로 알고 있었다면, 지금은 오랜 시간을 지나며 그것을 조금 더 구체적인 언어와 구조로 설명할 수 있게 된 거죠.

사람은 무엇을 배우나 II(비디오 스틸), 2채널 비디오 설치, 4K, 컬러, 무음, 9분 24초, 2021.
사람은 무엇을 배우나 II(비디오 스틸), 2채널 비디오 설치, 4K, 컬러, 무음, 9분 24초, 2021.

‘잠’ 속 재난 상황의 집단과 ‘사람은 무엇을 배우나 II’의 보디 스트로킹 장면에 이어 이번 신작에서도 탄생과 장례, 노동 등 삶의 여러 서사를 ‘몸’을 매개로 풀어냈습니다. 몸은 작가님의 작업을 관통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저 역시 새롭게 발견한 부분이에요. 오랫동안 사회 시스템이나 구조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보니 거의 모든 작업에 ‘몸’이 존재하는 거예요. 신작을 준비하는 동안 디스크 때문에 몇 달을 누워 지냈는데, 오히려 그 시간 덕분에 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됐어요. 그리고 육체적·정신적 고통의 밀접한 관계를 이야기한 초기 작품이 떠오르면서 제가 처음부터 몸에 관한 작업을 해왔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 사실을 제가 모르고 있었다는 거예요. 동시에 내 작업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오히려 안심이 됐어요.

듣는 화자, 말하는 타자(비디오 스틸), 다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각각 5~15분, 2026.

오랜 시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내는 작업과 이를 다루는 작가님의 태도가 인상적입니다. 새로운 작품은 대개 어떻게 시작되나요? 저는 어떤 대상에 관심이 생기면 먼저 그 대상에 대한 감정을 오래 붙잡고 있어요. 그 감정이 점점 짙어질수록 하나의 이미지가 떠오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미지가 점차 선명해집니다. 작업은 그 감정과 이미지를 충분히 키워가는 과정에서 시작되는 것 같아요.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출발점이 된 ‘잠’을 발표하며 개인과 집단의 고통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사회 시스템을 탐구하는 작업을 이어가겠다고 말했어요. 그 무렵 이미 막연하게 작품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었지만, 2년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구체적인 스케치로 나타났죠. 많은 분이 제 작업은 굉장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과정에서 시작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에게는 오히려 감정이 가장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감정이 점점 커지고 응축될 때, 그것이 작업을 이어가는 원동력이 되죠.

잠(비디오 스틸), 2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8분 40초, 2015~2016.

국가와 제도, 권력 같은 사회 시스템에 관심을 갖게 된 출발점도 궁금합니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겪는 부조리한 사건을 보면서, 그 상황 자체보다 그 안의 구조적 문제가 눈에 들어왔어요. ‘학생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 교육 환경에서 과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계속 품게 됐죠. 이후 ‘사람은 무엇을 배우나’ 같은 작업으로 교육 시스템을 다룬 것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저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보다, 사람에 대한 신뢰나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안정감을 배우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사람과 사회를 탐구해오셨어요. 일상에서 계속 눈길이 가는 순간이 있다면요? 저는 평소에도 늘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편이에요. 누군가 자기 일에 정성을 쏟는 모습을 보면 자연스럽게 애정이 생기고,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궁금해집니다. 특히 저는 사람이 약해지는 순간에 시선이 가요. 사회적으로 약한 위치에 있다는 의미라기보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연약한 순간이 있잖아요. 그런 모습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해요. ‘왜 그런 상황이 되었을까’, ‘그 고통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돼요. 이런 질문이 결국 작업으로 이어지고요.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4.0(비디오 스틸), 8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22분, 2026.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4.0(비디오 스틸), 8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22분, 2026.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4.0(비디오 스틸), 8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22분, 2026.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4.0(비디오 스틸), 8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22분, 2026.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4.0(비디오 스틸), 8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22분, 2026.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4.0(비디오 스틸), 8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22분, 2026.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4.0(비디오 스틸), 8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22분, 2026.

마지막으로, 긴 시간 작업을 이어온 끝에 이 길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세계 사랑(Amor Mundi)’의 길임을 깨달았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작가님에게 세계 사랑은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오랫동안 저 자신을 세상을 관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글을 쓰다 문득 ‘단순한 관찰자라면 그냥 지나쳐도 될 세상을 왜 이렇게 오래 들여다보고, 밤을 새워 몸을 해쳐가면서까지 작업을 이어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니, 결국 저는 작업을 통해 세계로 향하는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그 길이 바로 한나 아렌트가 말한 ‘세계 사랑’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은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하잖아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계속 바라보고 마음을 쓰고 행동하게 되는 것은 결국 그 존재를 향한 관심과 사랑이 있기 때문이죠. 저 역시 작업하며 사람과 사회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게 세계 사랑은 어떤 거창한 개념이라기보다, 세계를 외면하지 않고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려는 태도에 가까워요. 이 시대는 갈등이 너무 심화되고 있고, 여기서 예술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면 결국 그 시작은 ‘듣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에디터 정희윤
  • 사진 아트선재센터, 남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