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담은 베스트(vest)의 오늘
클래식이라는 낭만을 품고 새롭게 해석한 베스트의 오늘.

한때 남성의 신분과 취향을 나타내던 화려한 옷이 어떻게 오늘날 클래식 테일러링의 상징이 되었을까. 영국에서는 웨이스트코트, 프랑스에서는 질레, 미국에서는 베스트로 불리는 이 옷은 1666년 영국의 찰스 2세가 새로운 궁정복을 도입하면서 남성복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당시 유행하던 베스트는 지금보다 길이가 훨씬 길었는데, 이는 페르시아풍 복식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코트 안에 착용한 베스트는 보온 기능은 물론, 코트 사이로 보이는 직물과 장식을 통해 취향과 지위를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베스트는 더욱 화려해졌다. 실크, 새틴, 금사, 정교한 자수와 패턴 등은 개성과 신분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코트 앞부분을 여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만큼 베스트의 색상과 장식은 옷차림에서 중요한 시각적 요소로 기능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남성복의 실루엣이 점차 날렵하고 몸에 맞는 형태로 변화하면서 베스트 역시 보다 정제된 모습으로 바뀌었다. 19세기에는 영국의 테일러링 문화와 함께 허리선을 정돈하고 전체적 실루엣을 완성하는 역할을 맡으며, 코트와 무릎길이의 브리치스를 함께 착용하는 복식은 훗날 스리피스 슈트로 이어지는 기반이 됐다. 특히 19세기 초 리젠시 시대의 댄디즘을 대표한 보 브루멜은 화려한 장식이 아닌 절제된 색과 섬세한 구조를 강조하며 남성복의 미학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다. 20세기에 들어 투피스 슈트가 보편화되면서 베스트는 선택적 아이템으로 물러났지만, 포멀웨어와 클래식 테일러링을 완성하는 요소이자 개성을 표현하는 옷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동시에 남성복의 테일러링은 여성복으로 영역을 넓혔고, 1966년 이브 생 로랑이 선보인 르 스모킹은 그 변화를 상징하는 급진적 사건이었다. 턱시도를 여성의 몸에 맞게 재해석해 성별에 따른 복식의 경계를 허물며 여성 테일러링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여성의 바지 착용을 부적절하게 여겼고, 실제로 팬츠 슈트를 입은 여성이 식당이나 호텔에서 입장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한때 낯설고 파격적이던 시도는 각자 방식으로 변주되는 하나의 스타일 언어가 됐다.
이러한 흐름은 이번 시즌 런웨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슈트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기보다 베스트의 실루엣과 비율, 소재, 레이어링을 새롭게 해석하며 동시대적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랄프 로렌 컬렉션은 레오퍼드 패턴을 더해 클래식한 형태에 대담한 이미지를 강조했고, 톰 포드는 아이보리 톤 베스트를 단독 착용하고 리본 타이를 더해 관능적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아가, 장 폴 고티에는 셔츠와 타이에 베스트를 입는 전통적 구성을 와이드 브림 해트와 팬츠로 과장된 비율을 완성했고, 메종 마르지엘라는 베스트를 길게 늘어뜨린 듯 레더 드레스에 버튼과 플랩 포켓을 적용한 독창적 실루엣으로 재해석했다. 궁정복의 장식에서 출발해 슈트의 구조를 완성하는 옷으로, 다시 다채로운 모습으로 확장된 베스트는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더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