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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헤리티지의 근원

FASHION

키워드로 읽는 메종의 새로운 흐름.

코르셋 중심의 여성복에서 벗어나 유연한 저지 소재로 만든 슈트를 선보인 가브리엘 샤넬.
CHANEL 2026 S/S

LIBERATION

1910년, 가브리엘 샤넬은 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시키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유연한 저지 슈트와 느슨한 슈미즈 드레스는 여성의 움직임을 바꾼 상징적인 옷이었다. 이후 칼 라거펠트는 슈트와 퀼팅 백, 진주, 까멜리아 등 하우스 코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샤넬을 동시대적 하이엔드 하우스로 확장했다. 그리고 2026 S/S 시즌, 마티유 블라지는 다시 한번 ‘해방’이라는 본질에 주목했다. 그는 트위드를 더욱 가볍고 유연하게 만들기 위해 비스코스를 더했고, 로라이즈 스커트 위로 드러난 리브 저지는 샤넬의 저지 슈트가 원래 언더웨어용 저지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착안했다. 이번 시즌의 핵심은 움직임이었다. 트위드는 더 이상 단단한 클래식 소재가 아니라 몸을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패브릭이 되었다. 새롭게 선보인 2.55 백 역시 와이어 구조를 더해 자유롭게 형태를 바꿀 수 있도록 만들었다. 블라지는 완벽하게 새것 같은 제품보다 오래 사용하며 자연스럽게 변형된 사물의 아름다움에 주목했다.

CELINE 2026 S/S
CELINE 2018 S/S

BOURGEOIS SPORTSWEAR

셀린느는 본래 ‘럭스 스포츠웨어’를 지향하는 브랜드였다. 피비 파일로는 이를 절제된 미니멀리즘으로 재해석했고, 에디 슬리먼은 날렵한 실루엣과 1970년대 부르주아 스타일로 풀어냈다. 마이클 라이더는 두 디자이너가 남긴 유산 사이에서 새로운 셀린느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번 컬렉션에서는 피비 파일로 시대의 단단한 여성성과 에디 슬리먼 시대의 록 무드가 자연스럽게 교차했다. 마이클 라이더는 프레피와 부르주아, 스포츠웨어와 테일러링을 뒤섞으며 익숙한 클래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냈다. 럭비 셔츠와 클래식 타이, 캐멀 코트와 실크 스카프, 슬림 팬츠와 레이디라이크 액세서리까지. 익숙한 아이템이지만 조합 방식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스카프를 드레스 네크라인으로 연결하고, 참 브레이슬릿을 과장된 네크리스로 변형한 스타일링 역시 인상적이었다. 발에 착 감기는 재즈 펌프스와 레슬링 부츠는 기존 셀린느의 질서에 미묘한 변화를 더했다.

BOTTEGA VENETA 2026 S/S
BOTTEGA VENETA 2005 F/W

MATERIALITY

보테가 베네타의 핵심은 늘 가죽공예였다. 인트레치아토 위빙은 단순한 가죽 기법을 넘어 하우스의 정체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루이스 트로터는 첫 시즌부터 그 유산을 소재 실험으로 확장했다. 인트레치아토 코트는 뱀 비늘처럼 보이도록 재구성했고, 극도로 얇은 가죽 스트립으로 만든 케이프는 공기처럼 가벼웠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재활용 유리섬유를 사용한 스웨터였다. 퍼 같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잔디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는 소재는 보테가 베네타의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트로터는 촉각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냈다. 실크는 컬리 시어링인 듯 물결치고, 실제 시어링 소재는 폭스 퍼처럼 브러싱했다. 보테가 베네타의 장인정신은 가죽공예를 넘어 소재와 질감 자체를 다루는 방식으로 확장되고 있다.

LOEWE 2026 S/S

CRAFT FUTURISM

1846년 스페인의 가죽 장인 집단에서 시작한 로에베는 가장 오래된 가죽공예 전통을 자랑하는 메종 중 하나다. 조나단 앤더슨 시대를 거치며 로에베는 예술과 공예, 문화적 실험이 공존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새로운 수장 잭 맥콜로와 라자로 에르난데스가 제시한 키워드는 명확했다. “스페인, 공예, 그리고 정체성.” 가죽 재킷은 종처럼 조각적 형태로 열 가공했고, 버튼다운 셔츠와 진 역시 실제로는 가죽으로 제작했다. 티셔츠와 탱크톱은 와이어를 삽입한 가죽 실로 제작해 구겨진 형태를 유지했다. 동시에 로에베의 공예 기술은 테크놀로지와 연결됐다. 벨벳 파일을 구현한 3D 프린팅 드레스와 실크 고어텍스 윈드브레이커는 하이 크래프트의 가능성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들의 로에베는 단순히 장인정신을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공예를 미래적 감각으로 재구성하며 새로운 ‘크래프트 퓨처리즘’을 제안했다.

DIOR 2026 S/S
풍성한 스커트와 잘록한 허리로 완성한 크리스챤 디올의 ‘뉴 룩’ 실루엣.

REVERENCE & DISRUPTION

1947년 크리스챤 디올이 발표한 ‘뉴 룩’은 전후 시대 여성에게 다시 하이엔드를 꿈꾸게 한 선언이었다. 극적으로 조인 허리와 풍성한 스커트는 이후 디올을 상징하는 실루엣으로 자리 잡았다. 2025년, 조나단 앤더슨은 무슈 디올 이후 처음으로 남성복과 여성복, 쿠튀르 전체를 총괄하는 디자이너가 됐다. 그는 첫 여성복 데뷔 쇼를 “Do You Dare Enter the House of Dior?”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며 메종의 거대한 유산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존 갈리아노, 라프 시몬스,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 등 디올을 거쳐간 디자이너들의 흔적을 자유롭게 교차했다. 화이트 크리놀린 드레스와 미니 바 재킷, 데님 미니스커트와 블랙 턱시도의 조합은 디올의 역사적 실루엣을 새로운 비율로 재구성한 결과였다. 젠더와 쿠튀르, 스트리트웨어 사이의 경계를 흐리며 디올의 여성상을 새롭게 제시했다.

GUCCI 2026 S/S
GUCCI 2026 S/S
GUCCI 2026 S/S

CHARACTER

1921년 피렌체의 작은 러기지 브랜드로 출발한 구찌는 인터로킹 GG 로고와 뱀부 핸들, 홀스빗 장식 등을 통해 이탈리아 하이엔드의 상징이 되었다. 톰 포드는 1990년대 후반 섹슈얼리티를 극대화한 구찌를 완성했고,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예술적이고 젠더리스한 감각으로 브랜드를 다시 뒤집었다. 그리고 이제 뎀나가 새로운 챕터를 열고 있다. 그의 첫 구찌 프로젝트 ‘라 파밀리아’는 단순한 룩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캐릭터를 통해 오늘날의 구찌를 보여주는 방식에 가까웠다. ‘미스 아페리티보(Miss Aperitivo)’, ‘엘인플루언서(L’Influencer)’, ‘너드(Nerd)’, ‘라 콘테사(La Contessa)’ 같은 인물은 각기 다른 스타일과 취향을 상징한다. 뎀나는 구찌의 오래된 코드를 보다 직설적이고 현실적인 방식으로 풀어냈다. 톰 포드 시대가 연상되는 풀어헤친 셔츠와 GG 벨트, 1960년대풍 스칼렛 코트와 홀스빗 슈즈, 뱀부 백 같은 요소는 과거를 복원하기보다 새로운 인물을 만드는 장치로 쓰였다. 그는 패션이란 결국 “필요하지 않지만 갖고 싶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의 구찌는 그 욕망을 다시 만들어가고 있다.

  • 에디터 이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