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가 가르쳐준 속도 | Noblesse

NEWSLETTER

노블레스 매거진의 뉴스레터를 신청해보세요.
트렌드 뉴스와 이벤트 소식을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닫기

베니스가 가르쳐준 속도

ARTNOW
구글 선호 매체로 추가

구글 검색과 ai 답변에서
노블레스 닷컴을 우선적으로 보여줍니다.

스펙터클 대신 조용한 집중과 긴 머무름을 요구하는 예술.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는 많이 보는 대신 ‘오래 보기’를 권한다.

카르멜회 수도원 신비의 정원에서 사운드 작업을 선보인 교황청관. Photo David Levene.

베니스의 5월은 본래 다정한 계절이다. 아직 여름만큼 덥고 습하지 않고 늦가을에 찾아오는 홍수도 걱정할 필요 없는,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 비엔날레 오프닝이 매번 이맘때인 건 아마 그래서일 테다. 다만 올해 오프닝 주간은 지구온난화의 영향을 피하지 못했다. 예보에도 없던 비가 간헐적으로 내렸고, 하필 오프닝 날 비가 가장 거세게 쏟아졌다. 어느 인터뷰에서 비엔날레를 도는 요령을 묻기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첫 번째 원칙은 ‘친절함’이다. 나 자신에게도, 함께하는 나의 아이들에게도, 주변 모든 사람에게도 친절해야 오프닝 위크를 살아낼 수 있다. 그리고 올해 오프닝 위크는 그 원칙을 시험하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오프닝 날엔 굵은 빗줄기를 뚫고 자르디니 앞에 긴 줄을 서야 했다. 30여 개 나라가 영구적 전시장을 지어둔 자르디니에선 폭우 속에서도 저마다 오프닝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한국관에서도 오후 4시에 <해방 공간: 요새와 둥지> 오프닝이 열렸다. 큐레이터와 관계자들의 스피치가 앞에서 진행 중이었지만 빗소리 때문에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박수와 환호만은 빠지지 않았다. 옷은 이미 흠뻑 젖고 어깨에는 한국관 도록이 가득 든 가방까지. 한국관 큐레이토리얼 팀은 베니스로 오는 한국인 지인과 관계자들에게 도록을 조금씩 나눠 옮겨달라 부탁했고, 나도 그 십시일반에 동참해 책 꾸러미 하나를 들고 온 참이었다. 한국관만의 사정은 아닐 테다. 100개가 넘는 전시가 동시에 시작되는 베니스 어딘가에는 개막 직전 지인 찬스로 급하게 메운 구멍이 또 있었을 것이다.

매시 정각 철제 셔터가 닫히고 드리스 페르후번의 퍼포먼스가 펼쳐진 네덜란드관. Photo by Jacopo Salvi. Courtesy of La Biennale di Venezia.

올해로 61번째를 맞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관람객의 ‘시간’을 조건으로 삼은 전시들이라고. 작품이 지속되는 시간, 그리고 그것을 보는 데 드는 시간 말이다. 매시 정각에 강철 셔터가 내려와 파빌리온 안팎을 갈라놓는 네덜란드관, 오래된 정원을 천천히 돌아다녀야 감상할 수 있는 교황청관, 관람객에게 전시 정보가 적힌 안전 조끼를 입혀 안내원으로 바꿔버리는 우크라이나관까지. 프리뷰와 오프닝 위크 내내 가장 화제가 된 오스트리아관 전시 도 그중 하나다. 크레인에 매단 거대한 청동 종에 퍼포머가 거꾸로 매달려 몸으로 직접 종을 울리는 이 전시를 보려면 3시간짜리 줄부터 통과해야 했다. 스쳐 지나가는 관람 대신 관람객을 붙들어두고 진짜 경험을 남기려는 시도처럼 보였다. 정작 베니스는 며칠 안에 최대한 많은 전시를 훑고 떠날 수밖에 없는 도시인데도 말이다.

골판지로 짠 가벽을 세운 본전시장. 벨기에 출신 콩고계 시각예술가 레오나르 퐁고의 설치 작품이 놓여 있다. Photo by Luca Zambelli Bais. Courtesy of La Biennale di Venezia.

‘In Minor Keys’를 주제로 삼은 본전시는 결이 조금 달랐다. 지난해 5월 세상을 떠난 총감독 코요 쿠오(Koyo Kouoh)가 던진 이 제목은 큰 소리 대신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자는 뜻이다. 전시는 그가 꾸린 팀이 유고를 이어받아 완성했다. 스펙터클을 거부하고 듣기와 돌봄, 회복 쪽으로 기울어진 구성이고, 작가 주도의 대안 기관들을 ‘학교(schools)’라는 이름으로 전시 안에 들여놓은 대목이 특히 눈에 띄었다. 다카르, 라고스, 나이로비, 쿠마시, 그리고 뉴욕주와 콜롬비아 칼리에 근거를 둔 곳들이다. 전시에 대한 평가는 뚜렷이 갈렸다. 간과된 목소리들을 불러낸 뜻밖의 교향곡이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최근 미술계에서 자주 다룬 주제들이 지나치게 농축돼 기시감을 준다거나, 조용한 집중을 요구하면서도 막상 전시장은 너무 빽빽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골판지로 짠 가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흙빛에 가까운 색과 거친 질감이 미술관보다는 쿠오가 다카르에 세운 로 머티리얼 컴퍼니의 흙빛 안뜰을 떠올리게 했다. 전시장을 채운 이름과 계보도 내게는 상당수가 낯설었는데, 아프리카를 렌즈로 미술을 탐구해온 쿠오에게는 그것이 평생 다뤄온 역사였을 것이다. 내가 몰랐던 미술사가 누군가에게는 ‘다른’ 역사가 아니라 역사 그 자체였던 셈이다.

오스트리아관 전시 에서 진행된 플로렌티나 홀칭어의 퍼포먼스. Photo by Donghwan Kam.

매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술전과 건축전에 들러 100여 개의 전시를 모두 보겠다는 무모한 도전을 시작한 지 올해로 5년째다. 첫째가 생후 6개월이던 때 아이와 함께 다니기 시작했고, 올해는 둘째가 6개월이 되는 시점에 베니스에 들렀다. 이러한 이유로 이번에 베니스에 머무른 2주 동안 동선을 결정한 건 아이들의 다리와 낮잠, 어깨에 쌓이는 무게였다. 하루에 2만 보 넘게 걷고 있자면 큰아이는 “다리 아파”를 연발하다 그대로 잠들었고, 남은 동선은 어깨에 아이를 둘러멘 채로 이어졌다. 그래서 하루는 ‘어떻게든 전시를 다 보겠다’는 계획을 내려놓고, 아침 일찍 산마르코 대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갔다. 이탈리아어 미사는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가 몇 개뿐이었지만, 언어가 달라도 순서는 같았다. 신부님이 아이들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 기도를 해주었다.

한국관 <해방 공간: 요새와 둥지> 속 최고은의 ‘메르디앙’. © Nicole Marianna Wytyczak.

베니스 비엔날레에는 교황청도 참여한다. 2013년 처음으로 비엔날레에 참여했고, 2년 전엔 주데카섬의 여성 교도소를 통째로 전시장 삼아 화제가 됐다. 올해 전시는 산타루치아 기차역 근처 카나레조 지구에 자리한 ‘신비의 정원(Giardino Mistico)’에서 열렸다. 17세기부터 맨발의 카르멜 수도회 수사들이 담장 안에서 약초를 길러온 곳이다. 사전 예약을 하고 찾아가면 높은 담장 사이 작은 쪽문으로 들여보내준다.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가 공동 큐레이팅한 사운드워크 전시 이다. 안내자가 건네는 건 수신기 달린 헤드폰 하나뿐이다. 정원에는 식물의 생체 전기 신호, 물의 움직임, 곤충, 바람, 나무의 진동 등을 감지하는 장치가 설치돼 있었다. 이에 따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음악이 바뀌었고, 사람들은 걷다 말고 정원의 나무에 기대거나 잎의 냄새를 맡았다. 안내된 러닝타임은 25분이었지만 우리는 1시간을 채우고서야 정원을 나섰다. 일행 중 한 명은 이걸 그날의 마지막 전시로 삼겠다고 했다. 다른 전시를 보면 이 여운이 흩어질 것 같다면서.
결국 2주가량 머무른 베니스가 남긴 건 길고 긴 전시 관람 목록이 아니었다. 처음 알게 된 작가와 작품들, 낯선 역사와 미감에 대한 인식, 25분이면 될 거라던 전시를 보며 1시간을 쓴 일. 사실 한 번 더 보고 싶은 전시를 위해 비엔날레가 끝나기 전에 한 번쯤 다시 돌아가고 싶다. 다음 방문은 다음 비엔날레가 열릴 즈음이겠지만.

  • 박재용(독립 큐레이터)
  • 에디터 윤정훈
  • 사진 베니스 비엔날레, 각 전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