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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02

세금을 미술로 낼 수 있다?

국내외 사례로 보는 문화재, 미술품으로 납부하는 상속세 물납제에 관한 모든 것.

ⓒ 명이식





고(故) 이건희 회장의 아트 컬렉션을 기증받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대구미술관.

올 초 한국 미술계는 ‘물납제’ 도입 문제로 한바탕 떠들썩했다. 미술계에서 문화재나 미술품으로 상속세 등의 세금을 대신 납부할 수 있게 하는 물납제 이슈가 대두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주식에 대해 납부해야 할 상속세가 무려 11조366억 원에 이른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시대와 국가를 불문한 국보급 예술품을 포함해 명작 수만 점을 소장한 것으로 알려진 일명 ‘이건희 컬렉션’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상속세 물납제에 대한 논의가 다시 한번 뜨겁게 일었다.
당시 삼성가가 거액의 상속세를 납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일부 작품을 판매할 수도 있다는 소식에 국보급 예술품의 해외 반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들리면서 미술계는 다방면으로 물납제 도입에 힘썼다. 지난 3월에는 미술계의 주요 협회와 단체, 전 문화체육부 장관 등이 대국민 건의문을 발표했고, 물납제 관련 세미나를 주최하는 등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 자리도 마련했다. 물납제 도입을 뼈대로 하는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 제출 등 입법을 위한 움직임도 보였다.
국내 현행법도 일부 항목에 대해서는 물납을 허가한다. 조세는 금전으로 납부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상속·증여재산의 비중이나 금액에 따라 법령 요건을 충족한다면 부동산이나 주식 같은 유가증권으로 상속세와 재산세를 대신 납부할 수 있다. 한마디로 물납이 가능한 항목에 서화, 조각, 사진, 공예품 등 미술품과 문화재보호법에 따른 지정문화재와 국가등록문화재까지 포함하자는 것이 이번 물납세 이슈의 핵심이다. 실제로 영국, 프랑스, 일본 같은 문화 강국이자 선진국에선 이미 물납제를 시행하고 있다.
물납제를 도입하면 많은 긍정적 효과가 따라온다. 물납제는 단순히 납세자의 이익과 예술인 개개인의 복지 차원을 넘어서 공공 이익에 가깝다.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있는 문화재와 예술품의 해외 반출을 막고 이를 국가가 보유해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국공립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재정적 어려움 없이 훌륭한 작품을 소장할 수 있는 만큼 공공은 다양한 문화유산을 누릴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국가 수익 사업으로 연결돼 경제적 효과를 가져온다.





폴 고갱의 ‘Avant et Après’. ⓒ The Courtauld Institute of Art





Camille Pissarro, Late Afternoon in Our Meadow, Oil on Canvas, 54×65cm, 1887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세계 유수의 박물관과 미술관의 유서 깊은 컬렉션은 물납제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K-팝과 대중문화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세계적 문화 강국으로 발돋움한 한국도 물납제를 체계적으로 도입해 주요 예술품과 문화재를 확보한다면, 국가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고 예술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실제로 물납제를 본격적으로 시행하진 않았지만 국공립 박물관과 미술관에 작품을 기부하면 세금 면제 혜택을 주는 미국은 현대미술의 메카로 굳건히 자리매김했고, 프랑스는 해마다 1470만 유로(약 198억 원)에 달하는 수집품을 확보한다. 프랑스를 찾는 예술 애호가뿐 아니라 관광객에게도 꼭 찾아가야 할 명소로 자리 잡은 피카소 미술관 역시 피카소의 유족이 국가에 상속세 대신 작품 수천 점을 납부한 물납제를 통해 탄생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내셔널 갤러리도 그동안 물납제를 통해 많은 작품을 소장하며 명성을 쌓았고, 지난해에 코톨드 인스티튜트(The Courtauld Institute of Art)가 폴 고갱의 중요한 원고(manuscript)를 수집한 사례도, 로널드 펜로즈 경(Sir Roland Penrose) 컬렉션에서 나온 피카소의 ‘Weeping Woman’이 사적 판매의 위협을 받았지만 공공의 품에 안긴 사례도 물납제의 성과다.
게다가 코로나19 확산으로 전 세계 미술계가 불황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영국만은 미소를 지었다. 영국 예술 전문 신문인 와 미술품 물납제(Acceptance in Lieu, AIL)를 시행하는 영국예술위원회(Arts Council England)의 리포트에 따르면, 지난해에 영국은 물납제로 피사로와 렘브란트의 작품을 포함해 추정가 6500만 파운드(약 1013억 원)에 이르는 미술품을 확보했다. 일찍이 물납제를 시행해 그동안 이룬 성과와 비교해도 기록적인 수치다.
AIL 제도는 상속세를 현금이나 수표로 납부하는 대신 중요한 문화유산의 소유권을 국가에 이전해 그 부채를 탕감한다.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있는 건물, 토지 등도 포함되며 과학, 역사, 예술 등의 항목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녀야 하고 수용 가능한 상태여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예술품이 물납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영국을 포함해 물납제를 시행하는 대부분의 국가는 대상 미술품을 한정한다. 영국과 일본은 작고한 작가의 작품만 인정하고 물납할 수 있는 항목 또한 상속세뿐이다. 프랑스는 상속세와 증여세, 재산세 등을 미술품으로 납부할 수 있고 생존 작가의 작품도 가능하지만 까다로운 조건으로 제한한다.
물론 국내의 물납제 도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물납으로 대신하면 그만큼 현금이 부족해져 국가의 재정에 부담이 생길 것이라는 의견이다. 문화유산의 해외 반출을 막고자 시행하는 제도임에도, 현금 납부가 충분히 가능한 상황에서 탈세 수단으로 이를 악용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작품의 가치를 감정하고 정확한 시가를 산출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의 부재도 문제로 꼽을 수 있다. 또 납부자가 중요한 미술품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작품만 내세운다면, 물납제의 실질적 효용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건희 컬렉션을 계기로 물납제가 다시 논의 테이블에 오른 만큼, 결국 삼성가의 세부담을 줄여주려는 의도이자 특혜일 뿐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일단 물납제를 도입해 보완해나가야 한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세계적 예술 행사가 취소되거나 온라인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국내에서 누릴 수 있는 국립 문화 예술 기관이나 국가 소장품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됐다. 에드워드 할리(Edward Harley) AIL 패널 회장은 “관람객이 다시 박물관, 갤러리, 미술관을 찾기 시작하면서 글로벌 블록버스터 투어 쇼에서 벗어나 국가를 비롯해 공공 기관이 보유한 문화재나 미술품의 중요성이 재조명됐다. 이런 때일수록 공공 컬렉션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라며 물납제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물납제를 통해 공공이 향유하게 될 예술품의 가치는 지급해야 하는 세금보다 높을 것이라 장담한다.

 

에디터 정송(song@noblesse.com)
백아영(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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