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가의 대가, 엘리자베스 페이튼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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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20

초상화가의 대가, 엘리자베스 페이튼

나폴레옹, 마리 앙투아네트, 유명 뮤지션과 디자이너를 그리는 엘리자베스 페이튼이 드디어 한국에서 개인전을 연다.

Elizabeth Peyton, Self Portrait, 2021 ⓒ Elizabeth Peyton

하나의 전시를 오픈하기 위해 갤러리들이 작가에게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는지 대중은 쉬이 짐작할 수 없다. 특히 해외 갤러리에 소속된 유명 외국 작가의 전시를 국내 갤러리에서 열고 싶다면 갤러리스트는 시간과 사투를 벌일 마음의 준비를 먼저 해야 한다. 우리 갤러리는 믿을 만하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작가와 소속 갤러리의 결정을 기다리는 과정, 그 후로도 수개월간 시차를 거스르며 거듭해야 하는 회의, 그리고 마침내 좋은 전시를 선보이기까지 짧게는 1~2년, 길게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 될 수 있는 이 과정은 컬렉터에게 인기 있는 작가이면서 다작하지 않는 작가일수록 더 지리한 시간이 되기 마련이다.
6월 15일, 리안갤러리 서울에서 한국 첫 개인전을 연 엘리자베스 페이튼(Elizabeth Peyton, 1965~)의 전시도 꼭 이와 같았다. 리안갤러리 안혜령 대표가 엘리자베스 페이튼의 작품을 처음 만난 건 아주 오래전 방문한 아트 페어에서다. 한 해외 갤러리 부스에서 마주한 엘리자베스 페이튼의 존 레넌 초상화는 비록 크기는 작았지만(엘리자베스 페이튼의 작품은 대략 40×30cm 사이즈다) 흡인력이 강했다. “갤러리를 열기 전부터 아트 컬렉션을 오래 하면서 수많은 작품을 봐왔지만 ‘이렇게 잘 그린 초상화는 처음’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의 전시를 꼭 한번 서울에서 열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때입니다.”
엘리자베스 페이튼의 전속 갤러리인 영국 런던의 새디콜HQ 디렉터가 우연히 리안갤러리 서울을 방문하면서 안 대표와 짧은 만남이 성사되었고, 작가의 전시를 언젠가 리안갤러리 서울에서 열고 싶다는 마음도 전했다. 그렇지만 세계적 작가의 전시가 그렇듯 순조롭게 성사될 리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소식을 듣지 못하던 그즈음, 안 대표는 또 다른 아트 페어에서 새디콜HQ 대표를 우연히 만나 다시 러브콜을 보냈다. 이번에도 역시 기다림은 계속됐다. 그러던 2019년 어느 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안 대표에게 연락도 없이 새디콜HQ 대표와 엘리자베스 페이튼이 리안갤러리 서울의 공간을 보기 위해 갤러리를 방문한 것. 다행히 서울 갤러리를 지키고 있던 안 대표는 그들과 마주쳤고, 적극적으로 전시를 추진해 마침내 이번 개인전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유년 시절을 코네티컷에서 보낸 엘리자베스 페이튼은 열일곱 살에 뉴욕으로 이주해 1987년 뉴욕아트스쿨(School of Visual Arts)을 졸업한 후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요소를 대변하는 시대의 아이콘 초상을 그리며 강렬한 페이소스가 넘치는 작품을 선보여온 작가다.
어린 시절 늘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며 그림을 그려온 엘리자베스 페이튼의 화폭 속 주인공은 나폴레옹, 루이 14세, 엘리자베스 1세 등 역사적 인물을 비롯해 재클린 케네디, 버락오바마와 미셸 오바마, 윌리엄과 해리 왕자, 존 레넌, 커트 코베인, 그룹 오아시스의 리엄과 노엘 갤러거, 데이비드 보위, 리엄 길릭, 클라라 리덴, 리크릿 티라바니야, 마크 제이콥스, 하뉴 유즈루 등 정치인, 뮤지션, 작가, 디자이너, 배우, 스포츠 스타까지 실로 다양하다.





2019년 영국 런던 국립초상화미술관에서 가진 개인전 전경.

“저는 예술과 음악, 영화, 문학을 사랑합니다. 동시에 역사와 심리학, 명상이나 자연, 사랑과 생명 등 무형의 것에도 관심이 많죠.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 바라보며 느끼는 제 감정을 화폭에 표현하는 것을 좋아해요. 저에게 영감을 준 인물을 주로 그리지만,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를 그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녀는 실물을 보고 그리기도 하지만 주로 대중매체에 실린 인물의 사진을 보고 목탄, 잉크, 수채, 유채 등 다양한 회화 도구를 이용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물을 재해석한다. 초상을 그리는 많은 예술가가 있지만 사람들이 그녀의 작품에 열광하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을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로 재탄생시키기 때문. 그녀가 아무리 같은 인물을 여러 번 그려도 매번 다른 인물처럼 보이는 건 실로 신기할 정도다. “모든 사람은 내면에 자신도 미처 모르는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같은 인물을 여러 번 그리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대상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사람이 지난 몇 달간, 지난 몇 년간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가끔은 저절로 눈앞에 그려지기도 해요. 이번에 리안갤러리에서 선보인 작품 ‘라라’(라라는 엘리자베스 페이튼의 스튜디오 어시스턴트다)처럼 말이죠.”
유명인은 물론 주변인도 작품 속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녀가 대상을 고르는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정확히 무엇이라고 정의하긴 어렵지만 ‘내가 외면할 수 없고,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 될까요? 예를 들어 저는 종종 일본의 하뉴 유즈루 선수가 스케이팅하는 모습 같은 특정 장면이나 음악에 흥미를 느끼는데, 그것이 제 안의 감정을 건드려 깊은 감명으로 이어지면 제가 보고 있는 인물의 내면, 그 아름다움을 캔버스에 표현하고 싶어지죠.” 50대 중반을 넘어선 작가는 지금도 여전히 미국과 중국, 영국, 오스트리아, 일본, 이탈리아, 독일, 벨기에 등 세계 주요 국가의 도시에서 매년 개인전을 열고 있다. 하지만 그녀라고 첫 전시부터 화려하게 등장했던 건 아니다. 공식적인 그녀의 첫 전시는 스물여덟 살이던 1993년 11월에 아트 딜러 개빈 브라운이 열어준 개인전. 당시 자신의 갤러리가 없었던 개빈 브라운은 첼시의 한 호텔 방에서 엘리자베스 페이튼의 전시를 열었는데, 관람객이 프런트에서 열쇠를 받아 828호의 문을 직접 열고 들어가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독특한 컨셉의 이 전시는 그녀에게도 여전히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사실 제가 기억하는 제 첫 전시는 스물한 살 때예요.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첼시 호텔 전시가 첫 전시처럼 느껴졌죠. 호텔에서 드로잉 작품을 선보인 전시는 꽤 흥미롭고 당시 제 작업의 맥락상 매우 잘 어울렸어요. 전시 전날 밤까지 액자에 그림을 끼워 넣느라 모두 신경이 곤두서 있던 게 기억나네요. 전시 오프닝 당일 개빈 브라운과 제가 1978년 뮤지션 시드 비셔스와 낸시 스펀겐이 묵었다던 객실을 찾아다닌 것도 기억나고요.” 그녀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도 ”나는 개빈 브라운을 만나 함께 성장했고, 그 덕에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위해 더 열심히 싸우고 이해할 수 있는 여력을 얻었다”라고 고백했을 만큼 그에 대한 신뢰가 깊었다.
이후에도 그녀는 런던의 펍에서, 쾰른의 가정집 거실에서 전시를 여는 등 다양한 공간에서 자신의 작품을 선보였다. 초상화가 갤러리의 화이트 큐브에 걸렸을 때와 일상 속 생활공간에 걸렸을 때 던지는 메시지 또한 각각 달랐을 터. “펍이나 가정집 같은 곳은 예술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 그 틀을 깨고 다시 삶의 일부분으로 예술을 불러오기 좋은 장소죠. 예술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그 자체로 소통이 가능하고, 신선한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잖아요. 누구나 와서 자유롭게 예술을 감상하는 곳이야말로 낯선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장소니까요. 물론 갤러리도 훌륭한 공간이긴 하지만요.”







Elizabeth Peyton, Tony Leung Chiu-Wai (Happy Together), Oil on Board, 35.6 x 27.9 x 2.7 cm, 2021 ⓒ Elizabeth Peyton, Courtesy of Sadie Coles HQ, London Photo by Tom Powel Imaging
Elizabeth Peyton, Elizabeth, Oil on Board, 35.6 x 27.9 x 2.7 cm, 2021 ⓒ Elizabeth Peyton, Courtesy of Sadie Coles HQ, London, Photo by Tom Powel Imaging
Elizabeth Peyton, Lara (Lara Sturgis March 2021 NYC), Watercolor on Paper, 35.9 x 26 cm, 2021 ⓒ Elizabeth Peyton, Courtesy of Sadie Coles HQ, London, Photo by Tom Powel Imaging


2019년 런던 국립초상화미술관(National Portrait Gallery)에서 연 개인전 [Aire and Angels]에서도 전체 갤러리 공간을 활용해 작품을 거는 방식으로 기존 전시와 차별화했다. 국립초상화미술관 관장 니컬러스 컬리넌과 수많은 토론 끝에 수백 년 전에 그린 국립초상화미술관의 소장품과 자신의 그림을 같이 건다거나, 본래 걸려 있는 소장품을 과감히 떼어내고 그곳에 자신의 작품을 거는 방식이었다. 전시를 본 관람객은 “경이로운 경험이었다”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제게도 만족스러운 전시였어요.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한순간에 나란히, 심지어 한 그림 속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이 전시를 통해 저는 하나의 시간, 심지어 자화상 속 한 사람의 얼굴에도 이전보다 덜 구속된다고 느낍니다. 제가 그린 프로이트 초상은 제 아버지의 많은 부분을 담고 있고, 앙겔라 메르켈 초상은 그녀의 정치인생 30년이 들어가 있죠.” 시간을 간직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던 엘리자베스 페이튼의 초상화는 그렇게 국립초상화미술관 전시를 계기로 그 의미가 더욱 확장되었다.
대중매체에 노출된 인물 사진을 기반으로 초상화 작업을 하는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다양한 곳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수많은 종류의 미디어를 읽고 보거나 들으면서 영감을 얻습니다. 이전에는 종종 실물을 보면서 작업했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대면 작업이 어려워졌어요. 이번 서울 전시에선 실물을 바탕으로 그린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 사진과 영화,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을 찍은 사진 등 제가 찾은 이미지를 가지고 작업한 작품을 선보입니다.”
리안갤러리 서울에선 11점의 작품이 한국의 관람객과 조우했다. “이번 전시 출품작 중엔 어시스턴트인 라라의 초상과 제 자화상이 있어요. 영화감독 왕자웨이 초상화는 이번 개인전의 밑바탕이 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이번 전시에 영감을 준 티치아노의 초기 자화상을 바탕으로 한 작품도 있습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사람과 사람이 모이기 어려워지면서 저는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의 자화상에 더더욱 빠지게 되었어요. 자화상이 마치 새로운 제 친구처럼 다정하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 같았죠.” 그녀는 자화상의 매력에 빠지면서 이번 신작 ‘The Friend’를, 티치아노의 ‘전원 음악회’를 바탕으로 모노타이프 작품 ‘The Friends’를 작업했다. ‘Two Friends’ 속 두 남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화파를 대표한 조르조네와 티치아노. 엘리자베스 페이튼은 삶의 깊은 결을 어루만지는 그 둘의 예술을 상상하며 작품을 완성했다. 미국의 노예제도 폐지론자이자 신문 발행인인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글과 그를 찍은 수많은 사진에서 영감을 받은 그의 자화상도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다.
“코로나19는 저를 비롯해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경험과 사고를 하는 계기가 되어주었습니다. 저는 무사하지만 지난 1년은 우리 모두에게 상실감과 외로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 시간이었어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이토록 어려운 시기에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게 된 것은 저에게 큰 행운입니다. 무엇보다 서울의 관람객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떨림과 기쁨 그 자체죠.”
“나 스스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그림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을 잃는 것이며, 그건 죽음 말고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일 것”이라고 말한 엘리자베스 페이튼. 오늘날 거대하게 팽창한 예술계에서 자신의 직관을 믿고 여전히 호소력 짙은 작품으로 관람객과 만날 준비를 마친 그녀의 첫 서울 나들이는 안타까운 이 시대에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사진 제공 리안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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