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계절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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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4-08

와인의 계절

와인 전문가 세 명이 일상에서 마시기 좋은 최애 와인 리스트를 추천했다. 그들에게 들어본 맛있는 와인 이야기.

추억과 이야기를 공유하는 와인
와인은 모름지기 음식과 함께할 때 더욱 빛난다. 늘 내 식탁을 밝혀주는 와인으로 그리뇰리노(Grignolino)를 소개하고 싶다. 옅은 붉은빛을 띠며 투명해서 마치 와인이 그 속을 다 보여주는 듯하다. 씨가 많은 품종이라 그리뇰리노라 이름 붙은 이 와인은 특히 테누타 밀리아바카(Tenuta Migliavacca)에서 만든 것이 좋다. 다채로운 허브 향이 물씬 풍기며 또렷한 윤곽이 그려지는 단아한 타닌 맛이 일품이다. 씨에서 비롯되는 텁텁함을 제어하고, 방향이 풍부하도록 덜 압착하며, 오랜 시간 침용을 한 까닭이다.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바이오다이내믹 인증을 받은 테누타 밀리아바카는 현대 와이너리와는 아주 다르다. 근대 농업을 그대로 이어가는 방식으로, 포도 농사뿐 아니라 밀과 과일 재배, 소 사육 등 혼합 농업을 한다. 아버지에게 농장을 물려받은 프란체스코와 그의 식구들이 19세기 자급자족 시스템을 고수하며 생활과 농장 운영에 필요한 대부분을 스스로 획득하고 만들어낸다. 이 와이너리에서의 식사는 그야말로 시골집 할머니의 솜씨를 먹고 마시는 경험이다. 농가의 투박한 식탁에는 와인은 물론 파스타·소시지·소고기에 각종 과일이며 너트류 등 모두 농장에서 거둔 먹거리가 오른다. 피에몬테 사람들의 일상을 대하는, 나아가 한두 세기 전 현지인과 식탁을 나누는 느낌이다. 그리뇰리노 마개를 딸 때마다 프란체스코의 식탁이 떠올라 그리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나도 모르게 그리뇰리노에 손이 간다. 그런가 하면 축하 자리나 오랜 숙원을 이루었을 때, 크게 기뻐할 일이 있을 땐 어떤 와인을 딸까 고민한다. 어느 영화 속 대사처럼 거꾸로 와인 스스로 축제를 불러올 수도 있다. 즉 개봉하는 것만으로도, 아니 개봉한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내 기분이나 나를 둘러싼 분위기를 일거에 환하게 변모시킬 매력적인 와인도 있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되어 더욱 관심이 높아진 북부 이탈리아의 바르바레스코 마을에 수차례 출장 겸 여행을 갔었다.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들어선 마을의 한 식당에서 수북이 쌓인 병 중 낯선 레이블을 발견했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아주 귀한 와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노부부가 소량 생산하는 와인이었다. 귀국 후 몇 차례 연락했으나 도무지 소식이 닿지 않아 다음 해에 직접 농가를 방문했다. 마당에서 “본조르노” 하고 몇 차례 외쳤을 때, 칠십 줄의 부부가 살며시 밀어내는 현관문 틈 사이로 라구 냄새가 먼저 흘러나왔다. 세라피노 리벨라(Serafino Rivella) 양조장은 현재 일흔이 넘은 테오발도가 아내와 함께 이끌고 있다. 그 유명한 몬테스테파노(Montestefano) 포도밭에서 매년 8000병 남짓 생산하는 이 레드 와인은 고혹적 장미 향기와 범접할 수 없는 밸런스, 비단결 같은 질감이 압권이다. 무려 반백 년을 양조에 몰두해온 노부부 평생의 역작이다. 일생을 바쳐 양조한 이런 와인은 식탁 앞에서 얘깃거리를 좀 더 풍성하게 만든다. 대량생산 및 유통 체계의 대척점에 서서 개별적 와인을 통해 인생을 이어가는 가족들의 스토리를 먹고 마실 때, 나는 다시 한번 와인 세계의 깊이를 실감한다. 리벨라의 바르바레스코는 꽃갈빗살을 숯불에 올린 구리 석쇠에 구울 때 그 어울림이 참 달고 좋다. 이런 식탁을 공유하면 일행은 두고두고 그 순간을 추억으로 곱씹을 수 있다.
_조정용(와인평론가, 큐리어스와인 대표)

여행 즐기듯 고르기
유럽 사람처럼 데일리 와인, 그러니까 테이블 와인을 놓고 물처럼 마신 적이 있었다. 일터의 사무 공간에 수입사 리스트가 산처럼 쌓여 있으니 아무거나 집어 가격에 맞춰 사면 된다. 한국은 세계의 좋은 와인이 다 들어오는 나라다. 오늘은 리오하로 갈까, 아냐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좋더라. 아니지, 그래도 바르베라나 시칠리아 네로 다볼라로. 흠, 오늘은 남프랑스로 가자. 아니 아니, 오스트리아 메를로 어때. 오늘 음식이라면 북이탈리아 메를로가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어떤 날은 옛날 약병처럼, 초록색에 모양도 특이하게 생긴 독일 어느 지방의 화이트 와인을 곁들였다. 와인의 종류는 하늘의 별처럼 많다. 그 이름을 읽다 보면 다 마셔보고 싶다. 호기심이 끝이 없다. 그러다 어느새 창고에 열 박스 넘는 와인이 쌓인다. ‘새로 들여올 와인을 맛보려면 저걸 처분해야 해!’라는 명분도 생긴다. 그렇다고 혼자 한 병씩 마실 체력도 안 된다. 그러니 매일 친구를 불러 함께 데일리(!)에 충실한 와인을 돌려가며 마신다. 첫째는 바르베라다. 내가 요리를 배운 곳인 피에몬테의 대표 품종이기도 하고, 산도가 있어 음식에 두루 잘 맞는다. 바르베라는 지역에 따라 바르베라 다스티, 바르베라 달바 등이 있다(여담인데, 돌체토 달바가 있다면 그것도 맛보시라). 나는 후자가 더 좋다. 산도가 더 생생하고, 좀 더 ‘농부의 와인’답다. 포도 맛이 더 충실하다. 바르베라가 아니라면, 토스카나의 키안티 루피나 키안티 클라시코를 찾는다. 제법 비싼 것도 많은 아펠라시옹(AOC, 프랑스 와인의 최상위 등급) 중에선 딱 가격을 정한다. 와인 숍에서 사는 가격으로 4만 원을 넘지 않는 정도가 좋다. 데일리 와인이니까. 어쩌면 이런 데일리 와인이 그 사람의 ‘와인적 삶’을 설명하기 좋다. 누구에게 대접하거나 체면을 차려야 하는 와인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오늘은 특별하니까 좀 따야 해!’ 하는 날엔 뭘 고를까. 정말 좋은 와인, 특별하게 내고 싶은 와인이 많지 않은가. 여러 조건과 상황을 무시한다면 나는 바롤로나 피노 누아다. 그중에서도 독일이나 부르고뉴 본 로마네의 피노 누아다. 독일의 피노 누아는 또 다른 개성이 있다. 생산자마다 다르지만 어떤 것은 ‘유명세를 치르는’ 버건디의 두세 배쯤 만족감을 준다. 함께 마시는 사람들의 호기심도 증폭시킨다. 대개는 깜짝 놀란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독일 피노 누아를 따기 애매한 날이 있다. 그럴 때는 부르고뉴의 본 로마네나 뉘 생 조르주다. 본 로마네라니. 그 많은 생산자를 어떻게 다 거론하겠나. 근자에 와서 크게 인기를 끄는 AF 그로 같은 걸 찾지 않아도 잘 만드는 도멘이 널렸다. 10여 년 전 국내에 처음 소개된 시기에는 만만한(?) 도멘이었지만, 값이 많이 오른 몽제아르 뮈느레 프르미에 크뤼 같은 걸 낸다면 누구나 좋아할 것이다. 30만 원대에 살 수 있다. 아니, 본 로마네는 에세조(Echezeaux) 정도 따야 하는 거 아니야? 할 수도 있다. 뭐, 맞다. 하지만 지갑이 무너지는 일이라 참는다.
_박찬일(음식 칼럼니스트, 몽로 레스토랑 셰프)







2019년산 그리뇰리노 몬페라토 카살레스. 와인 협찬 큐리어스 와인
2016년산 바르바레스코 몬테스테파노. 와인 협찬 큐리어스 와인
몽제아르 뮈네레 본 로마네. 사진 제공 신세계 L&B
폴 고그 블랑 드 블랑. 사진 제공 보틀 샤크


즐거운 마법 같은 와인
워킹맘이라 집에 돌아와 육퇴 후 마시는 와인 한 잔의 소중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편리하고 맛있고 착한 가격이면 금상첨화다. 그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와인으로 웨스트 와일더 캔 와인을 강력 추천한다. 화이트, 카베르네 소비뇽(레드), 스파클링 화이트, 스파클링 로제 총 4종이 있다. 골라 먹는 재미가 있어서일까. 추운 겨울에는 카베르네 소비뇽을, 봄가을에는 화이트 와인을 자주 마신다. 지난해 여름, 골프장에 갈 때마다 차갑게 보관해 보랭 백에 꾹꾹 담아 가져간 캔 와인은 버블감 좋은 스파클링 로제와 화이트 와인이었다. 가끔 홈 브런치를 즐길 때는 오렌지 주스에 스파클링 화이트를 섞어 미모사를 만들어 먹는데, 지인들의 호응도 좋다. 살짝 고백하자면 간간이 캔 와인에 빨대를 꽂아 홀짝이며 청소기를 돌리거나 화장을 지우는데, 와인 한 모금에 그 많은 일이 귀찮지 않게 느껴지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다. 봄바람 살랑이는 벚꽃 시즌, 골프와 캠핑하기 좋은 시즌이 돌아왔다.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캔 와인이면 맛과 가성비 모두 해결되지 않을까.
하지만 특별한 날엔 조금 다르다. 긴 코스의 마지막 메인 요리보다 때로는 감칠맛 나고 예쁘게 플레이팅한 애피타이저에 더 가슴 설레는 것처럼, 좋아하는 사람과 행복하고 즐거운 일을 함께 축하하고 싶을 땐 ‘펑!’소리와 함께 축복을 받으며 기쁘게 마시는 샴페인을 추천한다. 그중에서도 부드러운 버블과 절제된 듯한 적정량의 산미를 선사하는 폴 고그(Paul Goerg)라면 그 자리가 더욱 빛날 것이다. 폴 고그는 샴페인의 본고장인 프랑스 샹파뉴 지역에서 두 번째로 큰 마을인 베르튀스(Vertus)에 위치한 샴페인 하우스다. 베르튀스는 샹파뉴 지역에서도 가장 높은 등급인 프르미에 크뤼의 테루아를 자랑하는 샴페인 생산 지역. 폴 고그 하우스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블랑 드 블랑(Blanc de Blanc)’은 100% 샤르도네 품종으로 만든 샴페인으로 덩굴 복숭아의 과일 향과 구운 헤이즐넛, 모카 향의 따뜻한 아로마가 인상적이다. 대부분 특별한 날은 바쁜 일정 속에 공복일 경우가 많은데, 빈속에 마시는 블랑 드 블랑의 첫 모금이 과하지 않은 산미와 입속에서 부서지는 은은한 버블이라 누가 마셔도 “참 좋다!”라는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파티 사이즈인 매그넘을 구비하면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날 더욱 손이 가는 와인이다. 두 번째는 같은 폴 고그의 2009 브뤼 빈티지 샴페인. 샤르도네 85%와 피노 누아 15%를 블렌딩한 샴페인으로 감귤류의 섬세한 아로마와 함께 신선한 토양의 풍미가 돋보인다. 풍요로운 산미와 미네랄리티가 2009 빈티지의 개성을 정확히 표현하며, 세련된 블랙 앤 실버 레이블이 존재감을 드러내 마시기 전부터 즐거워진다. 언젠가부터 올드 빈티지를 찾는 와인 애호가가 늘고 있는데, 보석처럼 숨은 부티크 샴페인의 빈티지로 즐거운 자리를 좀 더 특별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_이고은(보틀샤크 부대표)

 

에디터 이정주(jjlee@noblesse.com)
사진 박지홍
스타일링 마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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