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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nguage of Materi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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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은 때로 거창한 서사보다 한 조각 재료에서 더욱 정확하게 발화한다.
손끝으로 다듬은 가죽과 직물, 금속과 크리스털, 한 송이 꽃의 결에는 시간이 남긴 태도가 스며 있다.
다시 말해 재료는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긴 시간 이어온 헤리티지의 가장 선명한 언어다.

에르메스 가죽 공예의 정수를 보여주는 버킨 백 제작을 위한 토고 카프스킨. © Chris Payne.

Leather by Hermès

에르메스의 역사에서 가죽은 언제나 하우스의 중심에 있었다. 1837년 파리에서 마구(馬具) 제작 공방으로 역사를 시작한 에르메스는 말의 움직임과 인간의 시간을 존중하는 제작 철학을 바탕으로 섬세하면서도 견고한 기술을 발전시켜왔다. 승마 문화에서 이어진 이 감각은 형태와 비례, 사용성과 우아함이 균형을 이루는 미적 태도로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20세기 초, 이동 수단과 사회적 라이프스타일이 변하면서 가죽은 가방과 여행 오브제, 소형 액세서리 등 새로운 메티에로 확장되었고, 이는 에르메스가 시대와 더불어 스스로를 재발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켈리, 오뜨 아 크루아, 볼리드 같은 상징적 오브제는 과장된 장식 대신 절제된 선과 구조적 조형미로 에르메스만의 언어를 완성한다. 가죽을 다루는 장인의 손끝에서 하나의 오브제가 형태를 갖추기까지는 수많은 스케치와 분별, 재봉과 마감의 리듬이 축적된다. 이 과정에서 재료는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감각과 기술, 시간의 층위를 품은 존재가 된다. 에르메스는 역사와 아카이브를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형태, 질감, 색상을 지속적으로 탐구해 가죽 메티에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이는 전통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에서 다시 시작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에르메스의 가죽 오브제는 소유하는 물건을 넘어, 삶의 리듬 속에서 함께 시간을 쌓아가는 동반자에 가깝다. 사용자의 손끝에서 비로소 완성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더 아름다워지는 이 변화를 에르메스는 헤리티지의 본질로 이해한다. 결국 에르메스의 가죽은 기능성과 예술성이 고요하게 균형을 이루는 순간을 증명하는 가장 확고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J반클리프 아펠의 특별한 루비 세팅 기법이 적용된 ‘루도 시크릿 워치’.
J반클리프 아펠의 특별한 루비 세팅 기법이 적용된 ‘루도 시크릿 워치’.

Ruby by Van Cleef & Arpels

반클리프 아펠에 루비는 단순한 보석이 아니라 생명과 감정이 응축된 물질이다. 붉다는 뜻의 라틴어 ‘루버(ruber)’에서 유래한 이 붉은 젬스톤은 오래전부터 사랑, 열정, 기쁨 그리고 생의 맥동을 상징해왔다. 메종은 1906년 설립 초기부터 루비의 색 안에 숨은 자연의 심장박동을 발견했고, 그 강렬한 빛을 지구의 본질적 에너지로 보았다. 루비는 한 가지 색이 아니다. 은은한 장밋빛부터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두운 홍색까지, 루비의 컬러 스펙트럼은 감정의 스펙트럼과 닮았다. 반클리프 아펠은 이렇듯 미묘한 차이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1950~1970년대에 루이 · 자크 아펠이 인도와 극동 지역에서 직접 원석을 선별한 기록을 남겼다. 이렇게 선택된 루비는 빛이 머무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1933년 특허를 취득한 ‘미스터리 세팅(Mystery Set™)’은 금속 부품을 드러내지 않고 스톤만으로 표면을 구성하는 반클리프 아펠 고유의 세팅 기법이다. 이는 장식이 아니라 빛이 루비 자체 발화하게 하는 세팅 구조로, 비대칭의 균형 감각과 함께 메종의 조형 언어를 자랑한다. 2012년 메종에서 설립을 지원한 ‘레꼴 주얼리 스쿨’은 이 재료에 대한 감각을 단지 소장가의 영역에 두지 않고, 배움과 접근성의 언어로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했다. 파리와 홍콩 캠퍼스를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루비를 포함한 젬스톤의 역사, 산지, 가공 기술, 감정 기준 등을 교육해 하이 주얼리 문화 전반을 넓은 층위로 전달한다. 이처럼 반클리프 아펠에 루비는 미학, 기술, 교육을 잇는 핵심 재료다. 붉은색은 메종의 역사적 감식안과 장인의 손길, 그리고 오늘날 하이 주얼리 문화를 연결하는 상징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루비는 단순한 장식으로서 보석이 아니라, 메종이 세대를 이어 계승해온 제작 철학의 중심에 놓인 재료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디올 프레스티지 라인의 주재료 그랑빌 장미.

Rose by Dior Beauty

디올 프레스티지는 하나의 장미에서 시작된 세계다. 무슈 디올이 어린 시절을 보낸 노르망디 그랑빌의 정원에는 바닷바람과 염분, 메마른 토양에서도 형태를 잃지 않고 매년 다시 피어나는 야생 장미가 있었다. 그는 그 장미에서 우아함이란 연약함이 아닌, 다시 피어나는 힘이라는 진실을 보았다. 디올 뷰티는 1967년 장미 성분을 담은 첫 스킨케어를 출시한 후, 수십 년에 걸쳐 장미의 생명 메커니즘을 피부 과학으로 해석하는 장기 연구를 이어갔다.
그 연구는 2000년대 초 혹독한 환경을 견딜 수 있는 ‘로즈 드 그랑빌’이라는 단 하나의 장미로 결실을 맺었고, 이 장미의 활성 에너지를 중심으로 ‘디올 프레스티지’ 라인이 탄생했다. 바닷바람과 바위 절벽 등 가혹한 환경을 이겨내고 스스로를 지켜낸 로즈 드 그랑빌은 바로 생명력, 회복력 그리고 재생의 상징이다. 프레스티지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강렬한 효과가 아니라 섬세한 회복이다. 피부의 결을 다듬고, 잃어버린 밀도를 되돌리며 표면 아래 생기를 되살리는 과정이 핵심이다. 장미가 바람과 날씨를 견디며 품은 에너지를 피부가 응답하듯 받아들이는 시간 속에서 디올 프레스티지가 바라보는 재생의 아름다움, 그 힘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브랜드는 더불어 오브제와 내러티브를 중시한다. 보틀은 단순한 용기를 넘어 장미가 한 번 더 피어나는 장소이며, 로즈 드 방 주얼의 모티브는 아름다움이 하나의 방향과 태도임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프레스티지는 빠르게 소비되는 뷰티가 아닌, 시간이 켜켜이 쌓여 드러나는 품위를 지향한다. 장미가 매일 조금씩 피어나듯, 피부 역시 서서히, 확실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디올은 가장 품위 있는 변화라고 말하는 듯하다.

바카라의 최고급 크리스털이 완성되는 과정.

Crystal by Baccarat

바카라의 이야기는 언제나 크리스털에서 출발한다. 1764년, 루이 15세의 칙령으로 프랑스 로렌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바카라는 흙과 불, 공기와 물을 정제해 투명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기술을 완성했다. 1816년 비밀 조성법이 확립되면서 유리는 빛을 머금는 물질로 다시 태어났고, 바카라는 프랑스식 삶의 예술, ‘Art de Vivre’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바카라의 공방에는 지금도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최우수 장인(Meilleur Ouvrier de France) 인증을 받은 이들이 모여 크리스털을 불고, 조각하고, 연마한다. 미세한 온도와 속도의 차이를 몸으로 기억하는 이들의 호흡은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감각이다. 한 점의 크리스털에는 장인의 시간, 집중 그리고 손의 리듬이 그대로 축적된다. 이렇게 완성된 바카라의 작품은 오랜 세월 왕과 차르, 술탄, 마하라자 등 세계의 권력자들이 선택해온 오브제였고, 그 존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공간의 공기와 빛을 바꾸는 역할을 해왔다. 오늘날 바카라는 필립 스탁, 하이메 아욘 등 동시대 디자이너와의 협업을 통해 헤리티지를 새로운 형태로 계속 확장하고 있다. 결국 바카라가 다루는 것은 단순히 유리 조각이 아닌 빛이 한순간을 어떻게 기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크리스털은 손끝에 남는 온기와 빛의 결로 일상의 순간을 한층 특별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260년 동안 이어온 바카라의 본질이다.

로로 피아나의 대표 소재 중 하나인 12마이크론 메리노 울.

Fabrics by Loro Piana

로로피아나는 섬유를 통해 시대를 초월한 우아함을 정의해온 하우스다. 1924년 이탈리아 발세시아에서 역사가 시작된 로로피아나는 6대에 걸친 장인정신과 소재에 대한 절대적 기준을 바탕으로 최고급 캐시미어, 베이비 캐시미어, 비쿠냐, 메리노 울 등 귀한 섬유의 세계를 구축해왔다. 원재료의 조달부터 생산, 완성 그리고 리테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 직접 관여하며 품질을 타협하지 않는 태도는 로로피아나만의 헤리티지다. 로로피아나의 섬유는 단순히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촉감을 넘어 자연의 순환과 생명에 대한 존중을 담는다. 캐시미어와 베이비 캐시미어는 염소의 속털에서, 비쿠냐는 안데스 고지대의 야생동물에게서 얻으며, 이 귀한 섬유를 채집하고 가공하는 과정은 현지 공동체와 생태계를 보호하는 지속 가능한 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섬유의 생산부터 완성된 옷을 입는 순간까지, 재료는 시간이 흐르며 층층이 스며드는 감각적 경험을 만들어낸다. 로로피아나의 옷은 화려한 장식이나 과시적 로고 대신, 촉감과 품질 그리고 절제된 형태를 통해 말한다. 가볍고 부드러우며 체온과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섬유는 착용자의 일상에 조용히 녹아들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은 유연함과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결국 로로피아나의 섬유는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자연과 손끝, 그리고 삶의 리듬으로 완성되는 브랜드의 언어다.

샤넬 르사주 아틀리에의 트위드 패브릭. © Anne Combaz.

Tweed by Chanel

샤넬의 트위드에는 우아함과 실용성, 그리고 여성의 몸을 해방시키고자 한 가브리엘 샤넬의 철학이 응축되어 있다. 1920년대에 샤넬은 남성복에 주로 사용하던 트위드를 과감하게 여성복에 도입하며 기존 의복 관습을 무너뜨렸다.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세련된 형태를 유지하는 트위드는 여행하고, 걷고, 스포츠를 즐기는 현대 여성에게 이상적 소재였다. 샤넬은 스코틀랜드 시골의 풍경에서 채집한 색을 실에 반영했고, 다양한 실과 직조를 결합해 독특한 질감과 깊이감을 갖춘 트위드를 만들어냈다. 르사주 아틀리에가 합류한 후 트위드는 단순한 직물에서 창조적 유산의 보고로 진화했다. 수천수만 개의 실을 한 올씩 엮어 직조하는 과정에는 장인들의 감각과 태도, 그리고 수백 시간의 집중이 스며 있다. 컬렉션의 테마에 따라 트위드는 매 시즌 다시 발명되며, 클래식한 직조부터 예상치 못한 텍스처까지 무한한 변주가 가능하다. 이렇게 완성한 트위드는 하나의 상징적 실루엣을 만들고, 샤넬 룩의 핵심적 정체성을 부드럽게 지탱한다. 샤넬의 트위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면서도 그 본질을 잃지 않는 힘이 있다. 손끝에 느껴지는 촉감, 불규칙한 결, 은은하게 겹치는 색조의 깊이는 기능을 넘어 하나의 태도와 시선을 담는다. 결국 샤넬의 트위드는 여성의 삶을 더 유연하고 우아하게 만드는 옷의 언어이며, 시대를 초월해 계속해서 새롭게 진화하는 헤리티지다.

  • 정송(아트 칼럼니스트)
  • 에디터 김수진(jin@noblesse.com)
  • 사진 디올, 로로피아나, 바카라, 반클리프 아펠, 샤넬, 에르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