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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PEOPLE
- 2023-03-20
찰나에서 영원으로, 작가 박진아
박진아는 직접 사진을 찍고, 포착한 장면을 수십 가지 방식으로 조합해 화면에 재구성한다.

박진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런던 첼시 칼리지 오브 아트 & 디자인에서 수학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국제갤러리, SeMA 창고, 뒤셀도르프 Plan.D, 뉴욕 두산갤러리 등 국내외에서 열린 다양한 전시에 참여했다. 2008 광주비엔날레에서 작품을 선보였고 2010년에는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최종 후보로 선정, 2022년에는 프리즈와 샤넬이 함께한 ‘나우 & 넥스트’ 작가 중 한 명으로 뽑혔다.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등 주요 기관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자신의 작품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박진아 작가.
박진아는 회화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가죠. 회화와 평면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질문을 들으니 여러 생각이 떠오르네요. 평면이 제한적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아요. 사각 틀 안에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무한한 시공간이 있죠. 특히 그린 사람의 제스처가 많이 드러나는 작품은 완성된 상태에서도 누군가가 붓질하고 화면을 만들어온 방식을 볼 수 있어요. 또 한 장면을 그려도 그 안에 긴 시간을 담을 수 있죠. 화면 속 시간은 멈춘 듯해도 그 앞뒤를 상상할 수 있잖아요. 회화는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시간을 담을 수 있는 매체예요. 순간을 그리면서 다음 순간에 벌어질 일을 상상하게 하는 등 제 나름의 방식으로 시간을 다룹니다.
전에 “회화는 이미지면서 물질이다. 이야기를 드러낼 수도, 장식성을 드러낼 수도 있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죠.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보통 화면을 구성할 때 장식 효과까지 생각하는 편인가요?
이미지이자 물질이라는 말은 제 나름대로 내린 회화의 정의예요. 시각 이미지는 사건을 기록하는 역할을 하고, 동시에 회화 자체는 표면에 물감을 바른 하나의 물질이잖아요. 장식 효과를 크게 인식하거나 드러내진 않지만 그것도 회화의 일반적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작업 과정이 궁금해요. 작업실에 걸려 있는 드로잉들이 마치 영화 콘티 같아요.
무작위로 찍은 사진을 보면서 원하는 장면이나 사람들의 행동 등을 조합해요. 간단한 드로잉으로 구현해보고 캔버스에 옮겨요. 드로잉 단계에서 컬러까지 구상하기도 하고, 강조하고 싶은 색이 있거나 색을 바꾸고 싶을 때는 미리 칠해봐요. 스스로 방향을 잡아야 그릴 때 잊지 않으니까요. 이런 방식으로 두 달에 3점 정도를 그려요.
카메라 렌즈로 포착한 장면을 그리는 이유도 궁금해요. 사진을 찍는 단계부터 특정 장면을 염두에 두거나 조합을 떠올리기도 하나요?
거의 직접 찍은 사진을 써요. 다 제 시선에 담긴 장면이죠. 물론 미리 장면을 상상할 때도 있어요. 찍은 사진을 보는 와중에 어떤 장면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거나 어떤 장면을 보며 이미 머릿속으로 화면 속 구도를 구상하기도 해요.

포장, 리넨에 유화물감, 140×140cm, 2021. 사진 안천호,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캐주얼한 동작이나 우연성에 기반한 장면을 화면에 어떻게 연출하는지가 중요하겠네요. 그럼 사진 속 모습을 그대로 그리나요?
간단한 구도라면 그렇지만, 사람들이 다 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는 않으니까 조합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원하는 구도를 만들기 위해 여러 사진 속 한 화면에 합쳐요. 그래서 같은 사람이 두 번 등장하기도 하죠. 주로 연속으로 찍은 장면이지만, 다른 날 찍은 사진을 쓸 때도 있어요. 제스처와 포즈를 위주로 선택하고 여러 가지로 구상하며 조합해봐요.
“사진 속 장면을 그린다”는 사실을 넘어 여러 장면을 하나로 새롭게 만든다는 점이 재미있어요. 처음부터 한 장면이었던 것처럼요. 화면을 연출하고 구도를 잡는 ‘나’만의 기준이 있을까요?
저는 중앙 집중적 구도를 피하고 한쪽으로 쏠린 장면을 만들지 않아요. 화면 속 공간을 밖으로 확장해 평평하고 균일하게 무게중심을 잡고 싶다는 데에 방향성을 두고 작업해요. 사진에서는 중앙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고 해도 제 그림에서는 가운데를 비워두는 등 시선을 바깥으로 향하게 유도하면서 주로 양쪽이 대칭을 이루거나 분산하는 구도를 만들어요.
그런 점이 신작 ‘키친’에서도 잘 드러나요.
'키친’ 연작은 주방을 그리고 싶어서 장소를 수소문해 그렸어요. 제가 영화 촬영장 같은 백스테이지를 자주 그렸는데, 주방도 마찬가지로 그 뒤에서 많은 일이 벌어지잖아요. ‘키친’을 포함한 제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요. 작가마다 연출법이나 공간 구성 방식이 다르듯 화면이 작가의 무대라고 치면 공간감을 확장하는 연출 방식을 쓰죠. 가운데로 힘이 확 쏠린다면 그런 상황을 깨뜨릴 수 있는 요소를 넣고 싶어요. 그래서 제가 여러 사진 속 장면을 조합하나 봐요.
사진 속 인물은 다 실제로 존재하잖아요. 작가 자신을 작품에 넣기도 하나요?
물론 실재하는 사람들이지만 익명이나 마찬가지예요. 온전히 상상한 장면보다는 실제로 접한 장면이 영감을 촉발하거든요. 저보다는 피사체를 주로 그리지만 작품에 필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들면 포함해요. 최근에 제가 비친 거울을 그렸는데 재밌더군요. 하지만 그 인물이 꼭 저일 필요는 없고, 의도하지도 않았으니까 사실 제 작품에 자화상의 기능은 없어요. 작가가 자신을 드러내는 각기 다른 방식 같아요. 저는 숨어 있는 관찰자 역할을 해요.

공원의 새밤 10, 리넨에 유화물감, 130×205cm, 2021. 사진 안천호
‘시간’이 작품의 키워드인데, 그중에서도 ‘찰나, 순간, 특정 상태’가 특히 중요한 듯해요.
네, 순간성이 확 드러나는 장면을 자주 선택해요.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게 하는 장면, 무언가 진행하는 과정에 있는 시간요. t제가 그리는 장면에는 꼭 다음이 있거든요. 보자마자 알 수 있어요. 흐르는 시간 중에 딱 한순간, 완성된 장면이 아니라 반드시 다음 이야기를 앞둔 순간이죠. 하지만 작품을 보는 사람이 제가 상상한 시간을 그대로 읽을 필요는 없어요. 제 작품에서 누군가가 익숙한 장면을 발견하고 나름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다면 기쁠 것 같아요.
작품의 구도도 재미있지만, 박진아 특유의 톤과 컬러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중요한 특징이죠.
톤에도 신경을 많이 써요. 회화에서는 색이 아주 중요한 요소잖아요. 색이 회화의 중요한 언어인 만큼 색을 고민하는 데 시간을 많이 들여요. 제 작품에 액션이 많은데도 조용한 느낌이 든다는 평을 많이 듣는데, 제가 차분하고 가라앉은 색감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제 표현 기법이 그런 톤을 만드는 것 같기도 해요.
어떤 기법인데요?
한 가지 색상보다는 물감을 아주 얇게 여러 겹 덧바르며 캔버스 위에서 특정한 색을 만들어내요. 저는 기름을 많이 써서 유화를 수채화처럼 그리거든요. 물론 팔레트에서도 색을 만들지만 캔버스에 이미 칠한 색 위에 약간 다른 색을 또 칠하죠. 그리는 과정에서 여러 색을 교차하니까 톤다운된 중간색이 나와요. 다 그린 다음에 붓질을 몇 번 더 얹기도 해요. 제 작품의 톤은 발색하는 방법에서 비롯한 특징이에요.
사진과 시간을 교차하며 박진아만의 장면을 만들어내듯 붓질과 색도 여러 번 교차하며 특유의 톤을 완성해내는군요. 그 과정이 자칫 무거운 그림을 만들 수도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처음에 말한 대로 회화가 이미지와 물질이라는 점을 주목해요. 캔버스에 바른 물감도 곧 물질이니까 평평하게 칠하다가 물감이 흘러내리고 표면이 긁혀도 다 보이게 그대로 둬요. 이런 요소가 너무 많으면 전혀 다른 그림이 되지만, 이미지로서 장면을 보여주고 물질로서 물감을 바른 상태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공원의 새밤 09, 리넨에 유화물감, 91×116cm, 2020. 사진 안천호,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빛도 중요하죠. 국제갤러리에서 선보인 작품에선 특히 인공조명이 많이 보여요.
빛과 조명은 제가 관심을 두고 반복적으로 그리는 소재예요. 구상회화에서는 어떻게든 빛을 다룰 수밖에 없어요. 밤이 지닌 특유의 정서를 그리던 시절이 있거든요. 밤을 자주 그리다 보니 인공조명을 넣었는데, 그림에 직접 그려 넣거나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려 나타나는 인공적 결과물을 그대로 회화에 가져오기도 했죠. 무언가 촬영하는 장면을 많이 그리거든요. 빛에서 오는 효과, 예를 들면 하얗게 보이는 덩어리 등을 마치 오브제처럼 크게 넣으니까 재미있어요.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는 아니지만 반사판도 자주 그려요.
앞으로 작품에 담고 싶은 장면이 있나요?
대형화된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의 백스테이지요. 그동안 소소하게 촬영장 뒷모습을 그렸다면 이번에는 대중음악 공연장이나 할리우드 영화 촬영장 뒤, 메인 배우들보다는 백스테이지의 스태프들을 그리고 싶어요. 막대한 자본이 유입된 연예 산업의 백스테이지를 그리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실현하기가 쉽지 않네요. 이런 산업은 정보 유출 문제에 민감하잖아요. 그리고 섣불리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싶지 않아요. 조심스럽고, 사실 스스로 망설이는 마음도 있고요.
마지막으로 올해 계획이 궁금합니다.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지내고 작품 활동은 주로 한국에서 해요. 3월부터 5월까지는 서울대학교미술관에서 단체전을 열어요. 한국의 의식주를 주목한 전시인데, 2007~2008년 사이에 사람들이 무언가를 먹는 장면을 그렸거든요. 물론 아직 미공개 작품이 많아서 신작을 보여주고 싶지만, 예전 작품을 걸 수 있는 기회도 기쁘죠. 또 항상 작업 양을 늘리겠다는 목표를 세우는데 쉽지 않네요. 올해는 새로운 작업을 많이 해보고 싶어요.
에디터 백아영(summer@noblesse.com)
사진 서승희(인물)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