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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03

세상 별별 마라톤

피가 뜨거운 러너 세 팀이 경험한 절절한 이색 마라톤.



세상의 중심에서 드라마를 쓰다, 호주 아웃백 마라톤
호주 아웃백 마라톤(australianoutbackmarathon.com)은 거대한 바위 ‘울루루’로 유명한 아웃백 사막에서 펼쳐진다. 평소 달리기가 취미인 까닭에 휴가 일정에 맞춰 달릴 수 있는 국제 마라톤을 찾던 중 아웃백 마라톤을 알게 됐다.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에 등장한 아웃백 사막에서 마라톤이라니! 1분도 채 고민하지 않고 신청과 결제를 마쳤다. 몇천 명에서 많게는 몇만 명이 운집하는 대표적 국제 마라톤과 달리 호주 아웃백 마라톤은 총 29개국에서 640명 남짓한 인원이 모인다. 마라톤 준비부터 완료까지 하나의 여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코스 답사가 포함된 현지 적응 훈련, 오리엔테이션, 탄수화물을 보충하는 ‘카보로딩’ 이벤트를 포함한 전야제, 마라톤, 완주 기념행사, 저녁 만찬까지 꼬박 4박5일이 걸린다. 모든 참가자의 국가와 이름을 호명하며 안면을 트는 전야제를 마치고 까만 밤을 보내면, 마침내 그날의 동이 튼다.
호주 아웃백 마라톤 코스는 복잡하고 다이내믹하다. 단단한 운동장 모랫바닥 같은 코스가 있는가 하면, 발이 쑥쑥 들어가는 씨름판 같은 모래사장도 있고, 아스팔트 구간도 포함된다.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모래사장을 마주할 땐 정말이지 절망적인 기분까지 든다. 달리고 싶은 마음만으로는 몸이 따라주지 않고, 조바심과 급격한 체력 소모가 찾아온다. 참가자보다 더 많은 응원 인파가 모이는 마라톤과 달리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듯 단 몇 명의 응원단을 만나는 일조차 기적처럼 다가온다. 한데 그들의 존재가 수많은 인파보다 더 힘있게 다가오는 건 기분 좋은 아이러니다.
마라톤의 참맛을 만끽한 순간은 앞뒤 주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간격이 넓어진 완 전한 고독의 순간이었다. 세상의 소리를 ‘Mute’ 모드로 전환하고, 땅에 발을 딛는 나의 발소리와 호흡만이 귀로 전해지는 순간. “내가 숨을 쉬고 있구나, 살아 있구나” 이토록 내 자신을 오롯이 느낀 적이 있던가. 골인 직전 500m에 도달하면 완주 지 점으로 들어올 다음 주자가 누구인지 모두에게 공유되는데, 유일한 한국인 참가자 인 내게 “The only one from south korea!”라고 사회자가 외치는 순간 울컥 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눈물이 핑 돌았다. 마라톤이 끝난 뒤엔 숙소에서 버스를 타 고 캄캄한 사막 한가운데(마라톤 피니시 지점이다!)에서 축배의 잔을 들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눠 먹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주자의 기념일이나 특별한 사연을 공유하기도 하고, 모든 불을 끄고 하늘을 빼곡히 채운 별을 보며 함께 묵상한 시간도 잊지 못한다.
달리기를 시작한 뒤로 여행의 기준이 많이 바뀌었다. 이제 여행지를 선택할 땐, 목적지의 러닝 코스를 가장 먼저 확인한다. 관광지 주변, 골목 구석구석을 달리면서, 혹은 현지인과 함께 뛰면서 다른 어떤 여행에서보다 그 도시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으니까. 아무도 없는 에펠탑 근처 거리를, 무너진 베를린 장벽을 따라, 알프스산맥을 바라보며, 한라산과 부산 앞바다를 달리는 자신을 상상해보라. 그 전에 알지 못하던 풍경이 눈과 마음에 담길 것이다. _ 권준범(회사원, 러닝 클럽 ‘JSRC’ 소속 러너)




LA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 TSP
‘The Speed Project(www.instagram.com/thespeedproject, 이하 TSP)’는 미국 LA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 릴레이 형식으로 달리는 독특한 형식의 마라톤이다. ‘A지점에서 B지점까지 달리면 얼마나 걸릴까?’ 러너 6명의 맹랑하고 순수한 호기심으로 처음 시작된 이 행사는 현재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러닝 크루 사이에 뜨거운 인기를 누리는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평범한 마라톤에 식상해진 상위 러너들에게 ‘No Rules’를 원칙으로, 340마일(약 547km)을 달리는 이 대회는 맹렬한 자극이 되기에 충분하다. 대한민국 단일팀 최초 기부 러닝 크루인 ‘UCON(U can Change Our Next, 1km 달릴 때마다 400원을 자율적으로 기부한다)’ 멤버인 우리 열 명은 작년 3월에 이 행사에 참여했다.
LA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 차로 이동해본 이라면 알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쉬지 않고 달려도 5시간이나 소요되는 데다 여름에는 58。C를 육박하는 더위에 동물도 힘없이 주저앉는 죽음의 골짜기 데스 밸리까지. 이곳을 달린다는 건 비현실 아니면 지옥이다. 러닝 크루 중 실력 있는 러너 위주로 선발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2018년 7월부터 2019년 3월 29일까지, 최종 멤버를 결정하는 총 9개월의 준비 기간 동안 멤버 중 누군가는 회사에 사표를 던졌고, 누군가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참가 취소를, 누군가는 대회 일주일 전 급작스럽게 미국행 항공권을 끊었다.
릴레이 형식의 대회인지라 한 명이 달릴 땐 나머지 멤버가 캠핑카, 4WD SUV 2대로 바짝 따라붙는 식으로 진행했다. 창밖으로는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사이 어디쯤이 연이어 펼쳐지는데, 우리는 오로지 달릴 뿐. 총 50시간 45분 동안 해가 뜨든 어둠이 깔리든, 우리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같은 꿈을 꿨다. 달라지는 건 주변 환경뿐이었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환상적이었다. 길이 없는 곳에서는 앞선 러너의 발자국을 따라 뛰었다.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을 맞이한 건 47시간째 달릴 즈음. 몇 시간째 오르막길이 반복되어 모두가 지친 깊은 새벽,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골인 지점인 라스베이거스였다.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던 화려한 불빛이 차츰 가까워지는데, 일순 모두가 잠에서 깨어 해당 구간을 달리던 주자와 함께 소리를 지르며 미끄러지듯 하강했다. 마침내 동이 트고, 오로지 다리에 의지해 당도한 라스베이거스에는 도처에 있던 한국 러너들이 완주를 축하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샴페인을 터뜨리며 태극기를 흔들던 뜨거운 감동의 순간을 어찌 잊으리. 신사동 어느 술집에서 소주잔을 부딪치며 “우리가 한국 단일팀 최초로 TSP에 참가하는 거야!”라며 멤버들과 뜨겁게 다짐하던 날을 어찌 잊으리. _ 이억이(회사원, 러닝 클럽 UCON 멤버)




몽골 고비사막에서 250km, 고비사막 마라톤
축구 마니아에게는 바르셀로나 경기 직관, 등산가에게는 히말라야 정복이 로망이듯, 러너에게 꿈의 무대는 사막 마라톤이다. 달리는 걸 좋아하다 못해 이제는 ‘러닝 전도사’라는 직함을 만들어 명함에 새긴 나는 결국 마라톤을 위해 몽골의 고비사막으로 향했다. 작년 8월의 일이다. 몽골 고비사막 마라톤은 찌는 듯한 더위와 가물거리는 아지랑이, 그리고 삶의 무게만큼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을 메고 250km를 달리는 마라톤이다. 하루에 40km씩 7일에 걸쳐 달리는데, 하루 뛰어야 할 몫을 해내면 게르와 텐트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성별과 나이, 국적이 뒤섞인 7인의 텐트 메이트는 7일 동안 고된 여정을 함께하며 끈끈한 가족애가 생긴다. 레이스를 하다 만나면 서로의 뒷모습을 응원하고, 식량이 떨어지면 기꺼이 함께 나눈다. 누군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몇 날 며칠 씻지 못한 동료의 발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약을 바른 뒤 붕대를 감아준다. 고약한 발 냄새가 대수인가. 좀처럼 진한 우정을 나눌 기회가 없는 현대사회에서 세계 각국의 친구가 한 번에 6명이나 생긴다는 건 고비사막 마라톤의 짜릿함 중 하나다.
42.195km 길이의 마라톤을 연달아 일곱 번 완주하는 셈이니, 생사를 여러 번 오가는 건 당연하다. 코스에는 모래사막뿐 아니라 자갈밭, 산길, 급류도 있다. 물집이 열 번 이상 터지고 레깅스를 벗을 수 없을 정도로 다리가 퉁퉁 부어 바지를 잘라내는 동안 250번쯤 포기할까 고민도 했다. 그럼에도 다시 일으켜 달리게 한 힘은, 대회 출전 전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약속한 한국소아암재단 기부. 완주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달라고 글을 올린 뒤 펀딩으로 모은 522만 원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각인됐다. 기부자의 이름이 적힌 현수막을 보며, 그들의 마음과 얼굴을 떠올렸다. 혼자 달렸지만, 혼자 달리지 않은 셈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인생길 위에서 다시금 명언을 가슴에 새겼다.
고비사막 마라톤에 참가하는 방법은 홈페이지(www.racingtheplanet.com)를 참조한다. 마라톤 주최 측에서 요구하는 필수 장비는 40개에 달하는데 장비의 용량, 재질 등을 꼼꼼히 살펴 기준에 미달하면 근처 마트에서 다시 사야 한다. 그럼에도 참가자로서 당부할 것은, 속세의 짐을 너무 많이 안고 가지 말기를. 보조 배터리도 과감히 뺄 것. 어차피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아 한 번 완충한 스마트폰은 7일 동안 살아 있다. _ 안정은(러너, <나는 오늘 모리셔스의 바닷가를 달린다> 저자)

 

에디터 전희란(ran@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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